46화. 회장님의 스카우트 제의 (2)
나로서는 백 번 잘된 일이었다. 허민회를 절대로 빠져나갈 수 없는 코너에 몰
아넣었으니 이제 내가 노릴 건 HL 그룹 전체이다.
이 야망을 달성하려면 허규회나 허민회 또는 셋째 허제회 같이 곁다리에 있는
사람들이랑만 딜을 쳐서는 갈 길이 너무나 멀다.
현재 HL 그룹의 본체를 가지고 있는 사람, 즉 허창수 회장이랑 직접 맞다이를
떠야 유의미한 성과를 낼 수 있다.
임정환 실장이라는 사람이 보낸 메시지를 보고 있으니 앞으로의 큰 그림이 대
략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지금부터 나는 허창수 회장을 맞상대하며 머지않아 본격적으로 펼쳐질 HL 그
룹의 후계 구도에 내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다.
그리고 허창수 회장이 모종의 사고로 인해 HL 그룹의 경영에서 손을 떼게 되
는 그 시점에 벌어질 허씨 가문 형제의 난을 이용해 그룹을 찢어발긴다.
그 후, 몇 년 내로 내 손에 떨어질 어마무시한 자금력을 이용해서 찢겨 나간
조각들을 하나하나 먹어 삼킨다.
그 끝에 가서는 지금 허창수 회장이 앉아 있는 HL 그룹의 옥좌가 허규회도,
허제회도 아닌 내 것이 되어 있을 것이다.
과정이야 험난하겠지만, 나는 자신 있었다. 허민회는 이미 골로 보냈고, 허규
회도 반쯤은 내 편으로 만들어 두었다.
또한, 나는 언제 허창수 회장에게 그 불의의 사고가 일어날지 미리 알고 있
다. 그다음에 일어날 HL 그룹 형제의 난의 전개 방향까지 이미 파악되어 있다.
이 미래 지식에 더해 마음 침투 능력까지 십분 활용한다면? 지금은 대략적인
스케치만 보이는 이 큰 그림의 완성은 충분히 가능하다.
- 검사 백동준 핸드폰 맞습니다. 제가 문자를 늦게 확인했습니다. 시간이 늦
었으니 내일 중으로 연락드리겠습니다.
다만, 밤 10시가 훌쩍 넘은 관계로 그렇게만 답장하고 머릿속에서 앞으로 HL
그룹에 터질 사건들을 구체화해 보려는데, 금새 답장이 날아왔다.
- 아뇨. 시간은 관계 없습니다. 불편하지 않으시면 지금 전화 주시죠.
아차차, 그러고 보니 회귀 전에 조사해 둔 바에 따르면 임정환 실장 이 사람
밤낮 안 가리고 허창수 회장한테 자기 한 몸 다 바쳐 일하는 사람이었지.
굳이 낯선 사람을 피하는 성격은 아닌지라 나는 즉시 문자메시지에 찍혀 있는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백동준입니다.”
- 안녕하세요. 처음 인사 나눕니다. 임정환 실장이라고 합니다. 허창수 회장
님 지시로 긴히 검사님을 뵙고 싶은데 언제 시간 괜찮으십니까? 저는 최대한
빨랐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괜찮고요.
저쪽에서 왜 이렇게 서두르는지는 알 만하다. 허민회를 두 번이나 감옥에 보
낸 것으로 이미 내 전투력은 확인됐으니 어떻게든 빨리 봉인하고 싶은 심정이
겠지.
“시간은 저도 지금 괜찮습니다만, 제가 뵙게 되는 분이 임 실장님이십니까?”
- 네. 제가 계신 곳으로 가겠습니다.
“아뇨. 그러실 필요는 없겠습니다.”
내 단호한 대답에 핸드폰 너머의 임정환 실장이 당황하여 되물었다.
- 네? 지금 시간 괜찮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동 시간만 배려해 주시면 장
소는 어디든 괜찮습니다.
이 사람 말의 맥락을 못 읽는 건가, 아니면 내 말이 암시하는 바를 차마 상상
조차 할 수 없었던 건가? 못 알아들으면 설명을 해 줘야지.
“임정환 실장님께서 저한테 용건이 있는 게 아니잖습니까? 허창수 회장님 지
시로 보자고 하시는 거면, 제가 회장님 직접 뵙겠습니다.”
- 그게 무슨 실례되는 말씀이십니까? 회장님께서 그렇게 한가하신 분이 아닙
니다.
수십 년을 회장님의 비서실장으로 살았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
서도, 저 노예근성에 기가 막히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한테는 지금 당장 보자면서? 똑같이 하루 24시간 사는 건데, 내 시간에는
똥 발라져 있고 허창수 회장 시간에는 무슨 금이라도 발라놨나?
“그럼 저도 그렇게 한가하지 않은 거로 하겠습니다. 회장님께 전해 주십시오.
백동준 검사가 직접 뵙고 싶어 한다고.”
- 검사님, 그러지 마시고 일단 저를 먼저 만나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회장님
이랑 면담도 제가 차차 기회 봐서 주선해 보겠습니다. 분명히 검사님도 들으
시면 기뻐하실만한 제안입니다.
대충 무슨 소리 하려는지는 이미 짐작하고 있다. HL 그룹에서 떨어지는 떡고
물 몇 덩어리 입에 물려줄 테니 앞으로는 그만 나대란 얘기겠지.
그 뻔한 이야기 들으러 실질적 협상 권한도 없는 임정환 실장을 만날 생각은
없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그 제안 허창수 회장님이 하시는 것일 테니 그분
께 직접 듣겠습니다.”
- 검사님!
“하시려는 말씀은 잘 알아들었고, 제가 드릴 말씀도 충분히 전달된 것 같으니
이만 끊겠습니다.”
감히 HL 그룹에서 전화했는데 내 태도가 너무나 여유로웠기 때문일까? 임정환
실장이 도리어 자신이 난처해졌다는 듯 애걸했다.
- 그, 그러시면 전화 끊고 잠시만 다른 일정 잡지 말고 기다려 주십시오. 회
장님께서 이 일 급하게 처리하라고 하셨으니 제가 바로 하신 말씀 회장님께
보고 드리고 회답 말씀 받아오겠습니다.
푸흡-.
말씀을 받아오겠대. 모세가 하늘을 우러러보며 십계명 받아 적을 때도 저렇게
까지 성스러운 마음은 아니었을 거다.
회장님이라고 태어날 때부터 씨앗이 다르다거나 뼛속부터 성스럽고 진귀한 건
아닐 텐데 왜 저러는지 사실 이해는 잘 안 된다. 저게 나름 임정환 실장이 살
아가는 방식이려나?
“그렇게 하시죠.”
남이 삶에 임하는 태도에까지 내가 일장연설을 할 건 아니었기에 간단하게만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는데, 정말 5분이 채 되지 않았을 때 전화는 다시 걸려
왔다.
- 방금 통화했던 임정환입니다.
“네. 백동준입니다.”
- 회장님께 검사님이 직접 뵙고 싶어 한다는 말씀 전해드렸고요, 다행히 만나
주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말씀드렸듯이 정말 한가한 분은 아니셔서 딱
지금 아니면 곤란하다고 하시는데 괜찮으십니까?
회장님 스케쥴이 아무리 빡빡해도 잘 시간은 비워 놓으셨나 보네.
“네. 괜찮습니다.”
- 그런데 아까랑 다르게 만나시는 장소는 제가 양보해 드리기가 어렵습니다.
마침 회장님이 퇴근하시기 전이라 HL 타워 회장실로 검사님이 오셨으면 하시
던데 이것도 괜찮으실까요?
HL 타워는 HL 그룹의 본사가 들어서 있는 거대한 빌딩이다. 내가 있는 중앙지
검 관할인지라 다행히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푸핫-.
여기서 내가 허창수 회장 데리고 내가 있는 곳으로 오라고 하면 임정환 실장
은 울음이라도 터뜨리고 말 기세였다.
“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출발하죠. 얼마 안 떨어져 있습니다. HL 타워 앞
에 도착해서 다시 전화 드리겠습니다.”
휴우우-.
정말 내가 허창수 회장을 데리고 나오라는 요구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
지 핸드폰 너머로 임정환 실장의 긴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 감사합니다.
임정환 실장과의 전화를 끊고 나니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내가
이미 상대가 부르는 약속 장소로 갔다가 처참한 꼴을 당한 경험이 있다는 건데.
일단 지금은 급하게 잡은 약속이니만큼, 그런 꼼수를 준비했을 가능성이 낮다
는 걸 알면서도 조심하는 차원에서 한 가지 조치를 취했다.
나는 주머니에 넣으려던 핸드폰을 다시 들어 배경목 수사관에게 메시지를 한
통 남겨 두었다.
-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이따 자정에 저한테 전화하셔서 안 받으면 제 핸
드폰 위치 잡히는 곳으로 출동해 주실 수 있을까요?
배경목 수사관이 거절하면 누구한테 부탁을 해야 하나 고민하는 순간, 답장은
바로 도착했다.
- 네. 말씀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마침 철야 잠복 중이거든요. 어디 위험한
데 가시는 건 아니죠?
역시 자기 일에 충실한 좋은 사람이다.
- 별일은 없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 * *
잠시 후, 나는 임정환 실장의 안내를 받아 회귀 전후를 통틀어 처음으로 HL
타워의 꼭대기 층에 입성했다.
“자네가 백동준 검사인가?”
“네. 처음 뵙겠습니다. 허창수 회장님.”
회장실에 마련된 소파에 마주 앉아 그 정도의 간단한 인사를 마친 뒤, 허창수
회장이 농담을 툭 던졌다.
“내 팬인가?”
“그럴 리가요.”
“그런데 왜 우리 실장 통해서 해도 될 일을 굳이 나를 만나자고 했어?”
귀하신 몸 회장님께서 이 불평을 왜 안 하시나 했다.
“회장님께서 저한테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시던데요. 당사자 간 직접 대화 나
누는 게 오해의 소지도 줄이고, 좋지 않겠습니까?”
허-.
그러자 허창수 회장이 이 당돌한 것을 보라는 듯 자신의 성(姓)에 맞는 웃음
을 한 번 내뱉었다.
“그래. 기왕 왔으니까 밤도 늦었는데, 빨리 용건 이야기하고 끝내지. 우리 민
회를 또 감옥에 집어넣었다면서?”
오우, 분명히 속이 끓어오를 텐데 자기 아들 깜방에 보낸 얘기를 이렇게 무덤
덤하게 할 수 있다니, 역시 허민회보다는 몇 클래스 높은 내공이었다.
“네. 허민회 휴림유업 대표 이사 지금 동부 구치소에 있습니다.”
“그래. 백 검사가 보기에 저번처럼 무죄 받아서 나올 가능성은 없고?”
얼레? 자기 속 터지는 이야기할 때만큼이나 내 속 벅벅 긁는 소리도 감정 하
나 안 싣고 아주 무덤덤하게 하네.
그렇다면 나도 여기서 감정적으로 말려들지 말아야지. 나는 일부러 목소리를
한 톤 낮춰 담백하게 법적인 사실을 진술했다.
“특경법 위반이라 법정 최소 형량이 징역 3년입니다. 동종범죄 집행유예 기간
중에 저지른 행위라 무죄는커녕, 집행 유예조차 나올 가능성이 없습니다. 허
민회 대표 이사님 당분간 사회 공기 마시기는 어렵습니다.”
“그래, 그래. 알겠네. 쉽게 풀어줄 거면 가두지도 않았겠지. 저번에는 HL 중
공업을 박살내더니 이번에는 휴림유업까지. 쯧쯧. 우리 회사랑 원수진 거 아
니면 이 건은 나도 이쯤에서 눈감아 줄 테니까 딱 거기까지만 하게나.”
여기부터 본격적인 협상의 시작인가 보다.
“거기까지만 하라고 하시면, 휴림유업이나 HL 그룹의 다른 계열사에 제가 캐
내야 할 범죄가 더 있다는 말씀처럼 들립니다만?”
쾅-.
허창수 회장도 기세에서 밀리지 않겠다는 듯 자기가 앉아 있는 소파 팔걸이를
내리쳤다.
“그러니까 범죄가 더 있든지 없든지 백 검사 자네는 신경 끄라는 말일세.”
“검사로서 그럴 수는 없습니다. 여죄가 있다면 낱낱이 밝혀낼 겁니다.”
“그럼 검사를 관두면 되겠구먼.”
이건 무슨 소리일까나? 언젠가 HL 그룹을 다 먹으려면 공직자 신분으로 영원
히 남아있을 수는 없겠지만, 내가 검찰청을 관두는 게 절대로 지금은 아니다.
“제 직장에 나름 만족하면서 다니고 있습니다. 하는 일에 보람도 느끼고 있고
요.”
“만족과 보람. 글쎄? 직장이라면 돈을 벌어야 하는 거 아니겠나? 검사 관두고
우리 HL 그룹으로 들어와. 마침 본사 법률 고문 자리가 하나 비었거든.”
저번에 곽한성 검사장이 자기 몸뚱아리 들이밀려다가 실패했던 그 자리 말하
는 건가 보다.
“돈을 얼마나 주려고 그런 제안을 하십니까?”
“초봉 10억에서 시작하지. 성과급은 별도. 2, 3년만 일하면 자네가 평생 검찰
청 다녀도 못 벌 돈 받아가는 거 아니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