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회장님의 스카우트 제의 (1)
내 손바닥 발언에 허민회가 얼굴을 붉혀 당황한 기색을 지우며 되려 나를 향
해 윽박질렀다.
“네가 검사면 검사지, 무슨 부처님이라도 된 줄 알아?”
굳이 범죄자를 대상으로 말싸움 길게 끌고 가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아무
래도 이거 한 방이면 정리될 상황이었다.
“제 손바닥 안에 들어와 계신 범죄자님께서는 저를 부처님보다 더 윗분으로
보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범죄자한테 법이란 건, 그리고 그 법을 집행하는 검
사란 사람은 그런 겁니다.”
“야! 변호사 불러!”
“알아서 부르십시오. 제가 불러드려야 할 의무 따위는 없습니다. 저번에 제
앞에 변호사랑 같이 앉으셨다가 별로 재미를 못 보셨는데, 그 기억은 그새 까
먹으셨나 봐요?”
그제야 허민회한테 옛 기억이 생각났나 보다. 우리 둘 다 성해에 있을 때 허
민회는 법무법인 엑소더스의 박동출 변호사를 대동해서 조사받다가 결국 구속
까지 됐지.
저 눈알이 흐리멍텅해 지는 게 그때 구속당하고 나서 감옥에서 겪었던 끔찍한
일이 다시 떠오르나 보다.
탁탁-.
나는 허민회에게 내밀었다가 지금은 조사실 책상에 마구 흩어져 있는 서류를
정리하며 물었다.
“횡령 및 배임 혐의는 인정하시겠습니까?”
“안 해! 못 해! 이거 다 황성환이 그 자식이 혼자 벌인 일이야.”
“이렇게 허민회 씨가 세부 사항 지시한 내역이 있는데도 그렇게 발뺌하시려고
요?”
그러자 허민회는 되도 않는 소리를 조사실 천장이 터져라 빽 내지르고 말았다.
“아니라고!”
뭐, 허민회가 자기 죄를 인정하든 말든 딱히 상관은 없다. 이미 증인부터 증
거까지 너무 확실하게 확보되어 있으니까.
“지으신 죄는 황성환 씨처럼 빨리 인정하고 선처를 구하시는 게 형량에 가장
도움 되는데, 부정하시겠다니 알겠습니다. 그래도 구속영장은 청구될 거고요,
이따 저녁쯤 열릴 적부심에서 뵙겠습니다.”
“백동준이 이 새끼! 너 우리 HL 그룹이 안 무서워?”
기어이 감옥에서 배워 나온 줄 알았던 자기 조절력까지 잃어버린 채 고래고래
악을 쓰는 허민회에게 이 타이밍에 해 줄 말은 따로 준비돼 있었다.
“HL 그룹을 무서워해야 할 사람이 접니까?”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허창수 회장님이 마약을 그렇게 싫어하신다면서요? 허민회 씨랑 사적으로는
고모 되시는 분도 마약에 손대셨다가 HL 호텔 경영권 박탈당하셨다고 알고 있
습니다. 하필 마약 종류도 허민회 씨랑 같은 필로폰이었다던데, 맞습니까?”
아무렇지 않은 듯 던진 내 말에 허민회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저렇게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현재 시점을 기준으로 이건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소식이니까.
그렇다고 내가 모를 이유는 전혀 없었는데, 회귀 전의 나는 HL 그룹을 잡으려
고 그와 관련된 온갖 정보를 머릿속에 쌓아두고 살아왔다.
“저희 검찰청을 너무 무시하지 마십시오. 아무튼, 지금 HL 그룹을 무서워해야
할 사람은 제가 아니라, 허민회 씨일 것 같습니다만? 어떻게, 허창수 회장님
께서 변호사는 보내 주신답니까? 허민회 씨 개인적으로 쓸 수 있는 계좌도 다
막히셨다면서요? 선임료는 있으신지 모르겠네요.”
그아아악-.
나한테 완전히 쳐발린 허민회의 괴로운 울부짖음을 뒤로하고 나는 이만 조사
실을 나왔다. 쟤랑 유치한 말싸움을 길게 이어가기에는 할 일이 너무나 많았
으니까.
그렇게 용의자를 두 명이나 만나는 바쁜 아침이 지나가고, 낮에는 황성환의
구속 적부심이 열렸다.
내 예상대로 그는 자기가 죄를 반성하고 있다는 걸 나는 물론 판사 앞에서까
지 구구절절이 고해성사했고, 구속영장은 내가 청구한 대로 집행되었다.
저녁 즈음 열린 허민회의 영장 적부심도 과정은 조금 달랐지만, 결과는 매한
가지였다. 허민회가 아무리 자기 죄를 부정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필이면 영장 담당 판사도 황성환이랑 같은 판사가 배정돼서 이미 낮에 황성
환의 증언을 충분히 들은 터라, 허민회가 기를 쓰고 하는 반박은 모두 무시되
었다.
그러니 당연히 영장은 발부되었고, 지금 허민회는 동부 구치소로 이감되어 그
토록 좋아하던 사회의 맑은 공기를 얼마 마시지도 못한 채 또다시 감옥 생활
을 시작했다.
* * *
이제 수사 결과물을 정리해서 황성환과 허민회를 기소하고 그 자료를 공판 담
당 검사에게 넘기는 것으로 공식적인 내 할 일을 끝난다.
하지만 그 전에 한 가지 확실히 해 두고 싶은 점이 있었다. 나는 저번처럼 허
민회가 감옥에서 범털 생활을 하다가 술수를 써서 출소를 노리는 꼴을 절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리하여 내가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은 전국의 구치소와 교도소 업무를 총괄
하는 법무부의 교정본부장 이고성 검사이다.
고급 중식집의 빙글빙글 돌아가는 테이블을 사이에 둔 이고성 검사가 나에게
고량주를 따라주며 물었다.
“그래, 백동준 검사라고? 우리 후배님이랑 전에 안면은 없는 것 같은데 어쩐
일로 나를 찾아왔나?”
방금 내가 들은 말에서도 어렴풋이 엿보였는데, 이고성 검사는 초면인 나랑
쉽게 술자리를 가질 정도로 검찰 내부의 사람들을 챙기는 인물이다.
이게 검찰 조직 자체를 신성불가침으로 여겼던 과거 곽한성 검사장이랑은 결
이 조금 다른데, 이고성 검사는 특히 후배를 무지하게 챙긴다.
이미 10년이 넘는 세월을 앞질러 살았다가 돌아온 나는 그가 이런 태도를 견
지하는 이유 역시 잘 알고 있다.
이고성 검사는 검찰 내에서의 승진보다는 퇴임 이후 전관예우를 받는 데에 자
기 인생의 목표를 두는 사람이다.
그러니 자신이 퇴직한 후에 맡은 사건의 뒷배를 봐 줄 검찰 내부에 남아 있을
후배들을 무지하게 챙길 수밖에 없다.
특히, 이고성 검사에게 나처럼 임용된 지 얼마 안 된 검사들은 딱 그만큼 검
찰에 오래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기에 가까이 할 1순위로 꼽힌다.
검사로서 바람직한 태도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지금 이고성 검사가 교정본
부장 자리에 있다는 건 내가 이용할 가치가 충분하다.
“법무부 교정본부로 잠깐 자리 옮겨 계신다는 말씀 듣고 찾아뵈었습니다.”
자신의 상황이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았는지 이고성 검사가 건배를 청하며 급
히 한 잔을 비웠다.
“여기가 원래 내 자리가 아니었는데 울산 구치소에서 웬 말도 안 되는 사건이
터져서 내가 지금 여기로 강제 소환돼 있단 말이지. 이렇게 귀양 와 있는 선
배 찾아와 주고 고맙네. 지하철 의자마냥 잠깐 비어있길래 앉아 있다 떠나는
자리인 줄 알았는데, 내가 뭐 해 줄 게 있나?”
그가 지금 있는 자리를 탐탁지 않아 하는 이유는 당연했다. 실질적 수사를 맡
는 검찰청 내의 다른 보직과 비교해 후배 검사들과의 인맥을 쌓을 기회가 부
족한 자리이기 때문이다.
“방금 이야기하셨던 울산 구치소 폭동 사건과 관련해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때 교도관들 모여서 술 마시는 사이에 죄수들끼리 서로 죽이고 난리도 아
니었다면서? 그 와중에 현직 검사 죽이려고 했던 사건 증인들도 죽어 나가는
바람에 결국 교사범 무죄 받고 풀려났고. 그래, 무슨 이야기인가?”
“사실은 그때 살해당할 뻔했던 현직 검사가 접니다.”
또록-.
내 빈 술잔을 채워 주던 이고성 검사의 손이 잠시 멈췄다.
“자네 속이 말이 아니겠네, 그래. 일단 마시면서 좀 달래게나. 그 사건 진짜
무죄는 아니지?”
“제가 칼 맞은 것도, 그 뒤에 HL 그룹 둘째 아들 허민회가 있었던 것도 다 사
실입니다. 실행범은 폭동 중에 사망해서 공소권 없음으로 처리됐고요, 허민회
는 말씀하셨듯이 증거불충분 무죄로 풀려났습니다.”
공소권 없음이란 사법 기관에 용의자를 처벌할 권리가 없는 경우에 내려지는
처분으로, 주로 용의자가 재판 이전 또는 재판 도중 사망하였을 때 나온다.
“허, 참. 일단 자네가 이렇게 살아서 나랑 대작(對酌)하고 있으니 그건 다행
이네만, 이거 우리나라 사법 질서가 어떻게 되려고 현직 검사한테 칼질한 놈
들을 아무 죄도 안 묻고 풀어준단 말인가?”
“저도 너무 억울해서 따로 알아봤는데, HL 그룹에서 허민회를 빼 내려고 작정
하고 울산 구치소에 수를 썼나 보더라고요.”
“아무리 그래도!”
이고성 검사가 이렇게 감정적으로 동조해 주는 건 아주 좋다. 이제 슬슬 본론
을 꺼낼 때가 다가왔다. 나는 역시 비어있던 이고성 검사의 술잔을 채워 주었다.
“그런 일이 다시 벌어지지는 않아야 한다는 생각에 선배님 찾아뵈었습니다.”
“그래? 허민회인가 뭔가, 하는 그 자식 증거불충분으로 이미 석방됐다며? 교
정본부장으로서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있겠는가?”
“방금 허민회 다시 감옥에 넣고 오는 길입니다. 구속적부심까지 통과돼서 지
금 서울 동부 구치소에 있습니다.”
내 말에 이고성 검사가 반색하며 술잔을 내밀었다.
“능력 있는 후배님일세? 무슨 수로?”
“횡령, 배임에 마약까지 했더라고요. 그렇게 어려운 수사는 아니었습니다. 실
형 받아낼 자신도 있고요, 이렇게 되면 교정본부장님으로 계신 선배님께 공을
넘겨 드려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 이렇게 뵙자고 청했습니다.”
“그럼, 그럼. 이제 내 일 맞지. 동부 구치소 허민회라고 했지? 내가 확실히
조치 취해 놓겠네.”
그 뒤로 허민회에게 어떤 조치를 취할지에 대한 토론이 쭉 이어졌다. 나는 먼
저 다른 재소자들과의 접근을 차단하기 위해 허민회를 독방에 가둬 달라고 했다.
이고성 검사는 흔쾌히 수락했고, 이로써 허민회는 범털이 되기는커녕 말 섞을
사람 한 명 만나기도 힘들 것이다.
이어서 다른 죄수들과 허민회를 만나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내 취지에 십분
공감한 이고성 검사가 먼저 운동 제한, 작업 제한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허민회 이 자식, 감옥이 만만해 보이니까 나오자마자 또 그런 범죄를 저질러
서 다른 사람 목숨을 죽음으로 몰아갔겠지.
이번에는 아무것도 할 일 없이 몇 년 동안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야 하는 지옥
에 갇혀 있게 될 것이다.
불지옥, 얼음 지옥보다 레벨이 높은 곳이 아무런 자극도 들어오지 않고 아무
런 반응도 해 주지 않는 곳이라고 하지 않던가?
안타깝게도 우리나라 사법 체계상 아무리 큰 죄를 지었어도 불로 지지거나 얼
려 버릴 수는 없어도, 내 능력으로 허민회를 그 마지막 레벨 지옥에 넣을 수
는 있다.
* * *
그렇게 이고성 검사와의 미팅을 통해 허민회가 가게 될 지옥의 레벨을 몇 단
계 업그레이드 해 놓고 중식집에서 나오는 길이었다.
몇 시간 동안 확인하지 않고 있던 핸드폰에 문자 메시지 하나가 찍혀 있었다.
- 백동준 검사님 휴대폰으로 알고 메시지 남깁니다. HL 그룹 허창수 회장님
모시고 있는 임정환 비서실장이라고 합니다. 검사님께 긴히 드릴 말씀도, 들
을 말씀도 있사오니 시간 되실 때 전화 주시기 바랍니다.
오호, 이제 HL 그룹에서 나를 상대하려고 허민회나 허규회 급이 아닌 허창수
회장이 직접 움직인다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