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손바닥 안의 원수 (2)
쾅쾅-.
내 통보에 선우창은 자괴감을 못 이기는 듯 앉아 있던 의자 등받이에 자기 뒤
통수를 쾅쾅 찧었다.
그러길래 왜 중앙지검 차장 검사씩이나 돼서 기업, 그것도 하필이면 HL 그룹
이랑 붙어먹을 생각을 했어?
그래놓고 자기는 억울하다는 것처럼 꼭 기소 직전의 피의자마냥 나를 노려보
는데, 내가 방금 말한 거 뒤집을 생각 절대로 없다.
나는 마지막으로 마약 투여 용의자들이랑 같은 방에 있었던 건 확실하니 자발
적으로 경찰 출두해서 확인 검사는 받으라는 말을 남기고 나이트클럽 18번 룸
을 나왔다.
뿌듯한 밤이었다. 황성환한테 자백을 받아냄으로써 휴림유업 사태는 거의 해
결 목전에 다 달했고, 나를 압박하려던 선우창 역시 깔끔하게 털어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드는 건 역시 허민회를 다시 감옥에 처넣은 것이었
다. 이번엔 절대 못 빠져나간다.
* * *
짧은 수면 뒤에 아침은 금세 밝아왔고, 출근하자마자 내 검사실에 새로 배정
된 담당 수사관 배경목이 나에게 후다닥 달려왔다.
“검사님, 어제 구속하신 피의자 중에 황성환이라는 사람 있잖습니까?”
“네. 오늘 아침에 구치소로 넘어가기로 돼 있는 거로 알고 있는데, 잘 갔나요?”
“아뇨. 그게.”
황성환이 그 왜소한 체구로 감시하는 수십 개의 눈을 따돌려 탈옥을 했을 리
는 없을 것 같고, 무슨 일이려나?
“아직 구치소로 안 넘어갔어요? 이따 오후에 구속 적부심 받으려면 변호사도
선임해야 할 테고, 그쪽도 바쁠 텐데요?”
“그게, 변호사고 뭐고 일단 검사님을 봐야겠다고 해서 아직 저희 검찰청 유치
장에 있습니다.”
“저를요?”
내 되물음에 배경목 수사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밤사이에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생겼으려나? 나도 황성환한테 받아야 할 게
남아있으니 굳이 피할 이유는 없겠지.
“만나 볼게요. 조사실로 데려와 주세요.”
곧이어 만 하루가 채 되지 않아 다시 같은 장소에서 얼굴을 마주한 황성환은
밤새 한숨도 못 잔 듯 퀭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검사님, 어제는 제가 죄송했습니다.”
나로서는 어제 황성환을 만난 게 상당히 쉬운 대면 조사였는데, 저쪽은 무슨
고민이 그렇게 깊어서 잠도 못 잤으려나?
“어떤 게요?”
“허민회 사장이 저한테 불법 행위 지시했던 백업 파일 제가 갖고 있다고만 말
씀드리고 넘겨드리지는 않겠다고 했잖습니까?”
끄덕-.
어제 그런 일이 있었지. 나로서는 황성환의 도움이 없더라도 그 파일을 찾아
낼 방법이야 얼마든지 있으니 별 신경은 안 썼지만.
“그랬죠.”
“어제 유치장에 허민회 사장이 잡혀 들어오는 걸 보는데, 아, 제가 그래서는
안 됐구나 싶더라고요. 제가 증거 안 드렸는데도 허민회 사장 어떻게 체포하
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이라도 넘겨드리면 조금이라도 참작 사유가 될까요?”
푸흡-.
황성환은 제 딴에 그 파일을 쥐고서 나랑 허민회 사이에서 외줄 타기를 하며
어떻게든 자기 형량을 줄여 보려는 심산이었겠지.
그러다가 밤늦게 허민회가 잡혀 들어오는 꼴을 자기 눈으로 똑똑히 보고서 이
게 줄타기할 문제가 아니라는 걸 급히 깨달았을 테다.
그러고 나니 자기가 갖고 있는 유일한 카드인 허민회의 지시 기록 파일이 무
용지물이 될까 봐 덜컥 겁부터 났나 보다.
설마 허민회가 나이트에서 마약 킁킁거리다가 잡혀 온 줄은 몰랐을 테니, 자
기가 들고 있는 증거 없이도 허민회의 횡령 혐의가 다 밝혀졌다고 생각했을지도.
지금 허민회가 마약 소지 및 투여 혐의로 잡혀 와 있긴 해도, 나로서는 어차
피 횡령 혐의까지 모조리 까발려야 한다.
마약 혐의만 갖고는 동종 범죄 초범이라, 또 그놈의 집행 유예가 나올 가능성
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나름 법 집행의 큰 한 축을 담당하는 나로서도 우리나라 법, 정말 물러 터졌
다는 생각이 들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황성환이 알아서 허민회의 횡령 지시 증거를 갖다 바치겠다고
하면 당연히 땡큐지.
“공범 잡는 데에 협조해 주시면 정상 참작 해 드려야죠. 그렇다고 황성환 씨
가 저지른 범죄가 없어지는 건 아니고요, 구형에는 반영될 겁니다.”
“네? 구형이요? 그럼 형량을 깎아 주신다는 말씀이십니까?”
“형량은 판사님이 정하시는데요, 검사가 구형한 형량을 참고해서 그보다 살짝
낮은 수준에서 선고하는 게 보통입니다. 구형량이 줄어들면 최종 선고 형량도
낮아질 가능성이 크죠. 파일 지금 넘겨 주시겠습니까?”
형량이 낮아질 가능성이 있다는 말에 황성환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물론입니다. 검사님도 아시듯이 제가 몸이 자유롭지가 않아서, 어디
있는지 말씀드리면 될까요?”
“네. 그렇게 해 주세요.”
“회사에 제가 쓰던 업무용 책상 서랍 제일 아래 칸 열어 보시면 맨 뒤쪽 우측
구석에 빨간 USB 있습니다. 비번 걸려 있는데, 4868 입력하시면 됩니다. 구형
량 낮춰 주신다는 말씀 꼭 지켜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아주 좋은 정보를 들고 조사실에서 나온 나는 배경목 수사관에게 황성환이 말
한 USB 저장 장치를 챙겨오라고 지시했다.
배경목 수사관은 행동력 넘치는 사람답게 금방 다녀와 나에게 황성환이 말했
던 그 USB를 넘겨 주었고, 나는 컴퓨터에 꽂아 그 내용물을 확인해 보았다.
날짜별로 정리된 첫 이메일은 황성환이 허민회에게 보낸 것이었다. 장기간 할
당량 못 채운 대리점들을 열거하고, 이 대리점들의 보증금을 떼먹으면 수익이
얼마가 될지 계산해 놨네.
황성환이 지목한 대리점은 총 6개, 한 곳당 1억씩 본사에 예치해 뒀으니 횡령
예정액은 총 6억이나 됐다.
그런데 그 이메일에 허민회의 답장이 가관이었다.
- 고작 이거 갖고 누구 코에 붙여? 꼭 6개월 이상 할당량 못 채운 곳들 보증
금만 압수해야 되나?
6억이 적은 돈이라고? 평생 그 돈 못 모으는 사람, 그 돈이 없어서 목숨 거는
사람이 얼마나 지천으로 깔렸는데.
법적으로 보더라도 횡령 액수 6억 원은 형법상 횡령죄가 아니라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이 적용되는 고액이다.
그러자 USB에 저장된 이메일 속 황성환도 얼른 거들었다.
- 아닙니다. 6개월은 제가 임의로 정한 숫자고요, 대리점 계약상에는 ‘장기간
현저히 판매량이 부족한 경우’에 계약 해지하고 보증금은 본사에 귀속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얼씨구? 전형적인 갑질 계약서였네. 계약서에 저렇게 ‘장기간’이나 ‘현저히’
같이 해석에 따라 기준이 바뀔 수 있는 말은 없는 게 좋다.
부당한 일 당했을 때 이 꽉 깨물고 법원 가서 소송 걸 게 아닌 이상, 저런 조
항은 무조건 강자한테 유리하게 해석될 수밖에 없다.
이어지는 허민회의 답장과 황성환의 일 처리에서도 그 점은 여실히 드러났다.
- 할당량 3개월 못 채운 대리점, 1개월 못 채운 대리점 다 뽑아 봐.
- 3개월 연속으로 못 채운 곳은 총 이렇게 11곳, 최근 한 달 못 채운 곳은 이
렇게 15곳입니다.
- 그럼 일단 3개월 연속 못 채운 곳 보증금부터 압수 들어가지. 1개월은 내가
봐도 장기간은 아닌 것 같은데, 그쪽도 들어가는 물건 가격 팍팍 올려서 앞으
로 2개월 더 못 채우게 만들어서 다 뜯어먹고.
이 과정에서 자신의 몸에 불을 질렀던 강석동의 대리점이 포함되었고, 휴림유
업 사태가 내 예상보다도 훨씬 더 빠르게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되었다.
이러니, 황성환 입장에서는 허민회가 나중에 와서 숟가락 올리려다가 상 엎었
다는 볼맨소리가 나올 만도 하네.
그 외에도 USB에 들어 있는 허민회의 이메일을 보니 정말 악마 같은 자잘자잘
한 지시들도 잔뜩 포함돼 있었다.
전국적인 휴림유업 제품 할인 행사 광고를 내보내면서 대리점에 공급가는 낮
추지 않는 방식으로 그들의 자진 폐업을 유도한다든가.
할당량을 잘 채우고 있는 대리점에는 일부러 유통기한이 임박한 제품을 공급
해서 싼 값에 팔 수밖에 없게 만들라든가.
모두 어떻게든 대리점주들이 스스로 자신의 사업을 포기하고 회사에 보증금을
헌납하게 만들려는 수작질이었다.
이럴 때 보면 허민회 잔대기라기 나쁜 것 같지는 않은데, 어쩜 저렇게 썩음썩
음한 방향으로만 돌아가는지 모르겠다.
척-.
잠시 후, 조사실에서 잔대가리 좋은 허민회를 마주한 나는 그 앞에 가져온 서
류를 올려놓았다.
“허민회 씨, 참 자주 뵙습니다?”
그래도 어젯밤에는 존댓말은 하더니 밤사이에 악이 받쳤는지 허민회의 말투는
또 반말로 홱 돌아서 있었다.
“나도 너네 ‘사’자 들어가는 직업들 꼴 보기 싫거든?”
크흡-.
틀린 말은 아니네.
흔히 말하는 ‘사’자 돌린 직업들, 판사, 검사, 변호사, 의사. 당사자로서 돈
을 많이 버는지는 잘 모르겠고, 하나 같이 직업적으로 자주 보면 안 좋은 사
람들인 건 맞다.
특히 그중에서도 나 같은 검사는 절대로 자주 봐서는 안 될 사람이다.
“검사 보기 싫으셨으면 죄를 짓지 마셨어야죠? 마약 투여 현장에서 걸리셨으
니 발뺌하실 거 없으실 테고, 방금 약물 검사 반응도 양성으로 나왔더라고요?
소지하고 있던 물건도 제 짐작대로 필로폰으로 확인됐고요. 범죄 인정하시죠?”
킥-.
그러자 허민회가 건방진 웃음을 흘렸다.
“그래. 인정. 그런데 마약 한 거 한 번 걸렸다고 감옥 안 가는 거 다 알고 있
거든? 백동준 검사님 덕분에 감옥에 가서 나도 배운 게 많아서 말이야. 선우
창 그 차장 새끼가 꼰질렀나 본데, 나가면 뒤졌어.”
“나가요? 어딜요?”
“저 맑은 공기가 있는 사회로. 그리고 우리 HL 그룹으로. 빨리 처리하자고.
내가 마약 판매한 것도 아니고, 단순 소지 투약인데 이거 어차피 약식 기소해
서 벌금형, 끽해서 정식 재판 가도 집행 유예 나올 거 아니야? 그래서 변호사
도 안 데리고 왔잖아. 괜히 시간 끌지 말라고.”
감옥의 별칭이 범죄학교라더니, 어쩜 저렇게 안 좋은 것만 배워 왔는지 모르
겠다. 우리나라 법이 너무 물러터져서 저 말이 틀리지는 않다.
그렇다고 허민회가 꿈꾸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그 맑은 사회 공기, 당분간 다시 못 마십니다.”
“뭐? 검사가 법을 모르나? 이거 왜 이래?”
“어제 유치장 들어가시면서 익숙한 얼굴 못 보셨습니까?”
허민회가 도저히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다는 듯 뚱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
았다.
“누구 말하는 거야?”
황성환은 허민회를 봤는데, 그 반대는 아니었다니. 허민회 얘는 평소에 다닐
때도 말 그대로 눈 앞에 사람이 안 보이는 안하무인인가 보다.
“같은 유치장에 수감되지는 않으셨나 본데, 어제 황성환 씨가 먼저 체포됐고
요, 허민회 씨랑 같이 벌이신 횡령 범죄 다 자백했습니다. 내용 살펴보니 보
증금 갈취 건은 허민회 씨가 주범이더라고요? 형량 적지 않게 나올 겁니다.
이미 배임죄 집행 유예 받으셨으니, 횡령은 동종 범죄 초범도 아니시고요.”
빠직-.
그제야 자신의 처지를 깨달은 허민회의 인상이 팍 찌푸려졌다.
“황성환 그 새끼, 도망 못 갔어?”
“네. 같은 유치장은 아니셨나 본데, 어젯밤에 바로 옆에 계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는 저한테 이런 것도 주시던데요.”
그러면서 나는 허민회에게 프린트해 놓은 황성환의 USB 파일을 툭 던졌다.
“이, 이거 내가 삭제하라고 했는데? 내 눈앞에서 지운 것도 보여줬는데?”
“허민회 씨, 당신 제 손바닥 안에서 못 벗어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