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손바닥 안의 원수 (1)
방금 허민회가 내민 게 마약임이 분명한 이상 선우창이 선뜻 받을 수는 없었
다. 지금 저걸 같이 흡입했다간 꼼짝없이 마약 공범이 되고 마는 것 아닌가?
그렇다고 허민회를 백동준에게 넘기고 빠져나가려는 속마음을 들킬 수는 없었
기에 선우창이 얼른 둘러댈 거리를 찾아냈다.
“이따 검사장님도 모시고 같이 하시죠.”
“좋아, 좋아. 여긴 너무 칙칙하니까 자리를 옮기지.”
그렇게 해물탕집에서 나온 선우창은 허민회의 새 수행비서가 운전하는 차에
탔다. 흡사 호랑이 등에 올라탄 느낌을 받으며 선우창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검사장님께 연락 드리려 잠시 핸드폰 좀 쓰겠습니다.”
“그래. 당연히 그래야지. 청악관 나이트로 오라고 해. 거기서 오늘 우리 셋이
끝까지 즐겨 보자고.”
“감사합니다.”
행여나 허민외가 자신의 핸드폰을 볼까 전전긍긍하며 몸을 살짝 돌린 선우창
은 백동준이 보낸 문자메시지를 확인했다.
허민회를 넘길 테니 녹음 파일을 감찰부에 넘기지 말아 달라는 자신의 거래를
승낙한다는 내용이 찍혀 있었다.
선우창이 안도의 한숨을 쉬며 답장하는 사이 차는 한밤중의 도로를 질주했다.
“검사장이 뭐래? 온대?”
다행히 허민회가 잘 속아 넘어가고 있었다. 서울중앙지검 검사장이면 선우창
의 직속 상관일 뿐만 아니라 검찰의 실질적인 2인자다.
선우창은 곤히 자고 있을 게 분명한 자정 가까운 시간에 문자질을 해서 그런
사람을 깨우는 위험을 감수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래도 어차피 거짓말을 하게 된 거, 크게 지르기로 했다.
“네. 바로 답장 주시네요. 밤에 심심하시던 차였는데, 잘됐다고 하십니다. 요
즘 은근 HL 그룹에 관심 많으시던데, 허민회 사장님이 뵙자고 하시니까 반가
워하시는 것 같은 눈치기도 하고요.”
선우창의 아부성 발언에 어깨를 으쓱해 보인 허민회가 마약 기운에 한껏 들뜬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이따 검사장까지 오면 말이야, 더 큰 일도 같이 얘기해 보자고.”
지금 휴림유업 사태 하나 해결 못 해서 전전긍긍하는 주제에 무슨 일을 더 벌
이겠다는 건지 알 수 없었던 선우창이 되물었다.
“네? 더 큰 일이라고 하시면...?”
“우리 회사에 미경실 알지?”
그걸 모를 리가 없었던 선우창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핏 들으면 사람 이름인
것 같기도 한 ‘미설실’의 원래 이름은 ‘미래 경영 설계실’이다.
흔히 HL 그룹 본사라고 하면 이곳 미래 경영 설계실을 지칭한다. HL 그룹 계
열사 전체를 총괄하는 곳이니 그 중요성을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럼요.”
“얼마 전에 나 감옥에서 나올 무렵에 말이야, 아버지가 미경실 실장직에서 물
러나셨어. 이게 무슨 뜻일 것 같아?”
“허창수 회장님이 HL 그룹 경영에서 손을 떼시게 되는 겁니까?”
쯧쯧-.
선우창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허민회가 혀까지 차며 고개를 가로저
었다.
“아니지. 그럴 거면 HL 그룹 회장직에서 물러나셨어야지. 그 자리에는 그대로
계시면서 미경실 실장 자리만 비워 주셨단 말이야.”
이쯤 되니 선우창도 허민회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아들을 법했다.
“곧 HL 그룹 후계자를 지목하실 생각이신가 보네요.”
“그렇지. 아버지 후임으로 미경실 실장으로 가는 사람이 HL 그룹 황태자가 되
는 거야. 나는 그 자리에 꼭 갈 생각이고.”
살짝 어이가 없어진 선우창이 눈을 껌벅이며 옆자리의 허민회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내부 사정을 몰라도 허민회가 차기 HL 그룹 황태자는 아니지 않은가?
감옥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그나마 맡고 있던 HL 중공업 대표 이사
자리도 자기 형한테 뺏기고 휴림유업으로 귀양 와 있는 주제에 미경실 실장이
라니?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형님분도 계시고 동생분도 계시잖습니까?”
선우창의 솔직한 대답에 자존심이 상했는지 허민회가 코를 몇 번 킁킁거리며
선우창을 노려보며 대답했다.
“그래. 솔직히 내 힘으로는 안 될 거 알아. 그래도 뒤집어 생각해 봐. 내가
그 자리에서 왜 멀어졌어? 감옥 가는 바람에 그렇게 된 거 아니야? 그런데 지
금은 이렇게 멀쩡하게 나와 있잖아? 그럼 딱 이때 허규회랑 허제회를 둘 다
감옥에 넣어 버리면 남는 건 나밖에 없잖아?”
허제회는 허민회의 동생, 그러니까 허창수 회장의 셋째 아들이다.
“저한테 연락하신 이유가 휴림유업 사태 해결 하나 때문이 아니셨군요.”
“그렇지. 그 백동준이한테 약점 안 잡혔으면 차장이랑 같이 하려고 했는데,
뭐 기왕 이렇게 됐으니 판을 키워 보자고. 검사장까지 붙으면 백동준이 찍어
누르는 건 당연하고, 나 미경실로 가는 꽃가마 태워 주는 것도 더 쉽지 않겠어?”
선우창은 허민회의 다음 HL 그룹 행선지가 미경실이 아닌 감옥이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지만, 일단은 가식적인 웃음을 지어 보였다.
“HL 그룹 본사가 저희 중앙지검 관할이니 검사장님까지 움직여 주시면 식은
죽 먹기 아니겠습니까? 허규회, 허제회 두 형제분 보낼 카드는 갖고 계시죠?”
“수사하고 감옥 보내는 건 댁 같은 검사들이 할 일이겠지만, 맞아. 휴림유업
사태 따위보다 훨씬 큰 거 몇 개 있어. 그러니까 지금 내가 위기에 처해 있는
것처럼 보여도 오늘 밤에 검사장이랑 차장이랑 의기투합만 하면 이게 바로 기
회가 된다는 거지.”
원대하긴 하다만, 좀처럼 실현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허민회의 꿈에 선우창이
질문을 이어갔다.
“검사장님은 어떻게 설득하실 생각이십니까?”
“그거야 차장이 해 줘야 하는 거 아니겠어?”
“아무래도 제 상사시다 보니, 제가 혼자 설득하기에 자신은 없습니다.”
그러자 허민회가 안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그 원통형의 물체를 다시 꺼내 흔들
어 보였다.
“중앙지검장까지 했으면 검찰총장 달고 싶을 거 아니야? HL 그룹 미경실 실장
이 될 내가 밀어준다는데 감지덕지 아니겠어? 그리고 이거. 한 번 맛보면 계
속 생각나거든. 이따 한 번씩 돌려 마시면 우리 셋은 쭉 같이 가는 거야.”
허민회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들은 선우창이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차는
계속 달려 청악관에 도착했다.
허민회가 왔다는 소식에 나이트 주인이 직접 나와 맞았다.
“오셨습니까? 도련님.”
“내가 늘 쓰던 방 비워 놨지? 같이 놀던 애들도 있고?”
“그럼요. 모시겠습니다.”
늘 쓰던 방에 같이 놀던 애들이라. 결국, 같이 마약 파티 벌여줄 여자들을 찾
아서 여기까지 온 모양이었다.
허민회를 따라 룸으로 들어가자 얼마 지나지 않아 술과 안주가 가득 담긴 쟁
반을 들고 접대부들이 입장했다.
허민회는 익숙하다는 듯 간단한 인사만 한 채 원통형 물체를 꺼내 내용물을
그들의 손에 조금씩 부어주었다.
“그래, 그래. 옳지. 그렇게 코로 쭉.”
“이거 때문에 나 오빠 너무 기다렸잖아.”
“뭐야? 내가 아니라 약이 그리웠던 거야?”
“둘 다지. 오빠도 코로 쭉!”
처음 보는 광경에 넋이 나가 있는 선우창에게도 허민회가 원통형 물체를 내밀
었다.
“어떻게 하는지 보셨으니 차장님도 직접 한번 해 보셔야죠?”
선우창이 이번에도 검사장 핑계를 대고 빼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그의 핸
드폰이 울리며 백동준의 문자메시지가 도착했다.
- 청악관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어딥니까?
* * *
나이트 클럽 주인과의 쇼부를 마치고 안으로 들어와 선우창에게 보낸 문자메
시지에 아주 빠른 답장이 도착했다.
- 18번 룸. 지금 마약 돌려 마시고 난리야.
오호, 지금 들어가면 허민회를 마약 투여 현행범으로 체포 가능하다는 거지?
아주 마음에 든다. 나는 재빨리 같이 온 사복경찰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18번
룸으로 향했다.
벌컥-.
그 앞에 도착해서 문을 열고 들이닥치려는데, 안에서 왠지 잔뜩 신난 듯한 허
민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검사장님이 벌써 오셨어? 노크라도 하고 들어오시지, 교양 없으시게
말이야.”
푸흡-.
저 바보, 내가 아니라 검사장이 오는 줄 알고 있었던 거야? 대충 선우창이 혀
를 어떻게 놀려서 허민회를 잡아 놨는지 알 것 같네.
“검사장님은 푹 주무시고 계실 겁니다.”
내 얼굴을 보자마자 허민회의 얼굴에서 히죽거리던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그
러더니 발작이라도 하듯 의자에서 펄쩍 일어서 내가 떨리는 손가락으로 삿대
질을 해 댔다.
“백동준! 네가 여길 왜 와? 차장, 설마 나 배신한 거야?”
“차장님이랑 제 일까지 아실 필요는 없고요, 허민회 씨 지금 손에 들려 있는
거 필로폰 가루겠네요. 저한테만 세 번째 들으시는 거니 이제 익숙하시죠? 마
약 소지 및 투여 혐의로 긴급 체포합니다. 지금부터 하시는 모든 말씀은 법정
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고, 묵비권 행사하실 수 있고, 변호인 선임하실
수 있습니다. 모셔 가시죠.”
마지막 말은 나를 따라 들어온 사복경찰들을 향한 것이었다. 그들의 능숙한
손놀림에 순식간에 제압당한 허민회가 고함을 빽 질렀다.
“이거 놔! 백동준이 이 새끼 너,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
“제 안위 걱정해 주실 때가 아닐 텐데요? 이번에 들어가시면 정말 오래오래
계셔야 할 겁니다. 방금 드신 마약도 그렇고, 이미 황성환 씨 자택에서 체포
돼서 휴림유업 횡령도 당신 지시받고 한 거라고 자백했거든요.”
“이 배신자 놈들!”
허민회와 접대부들이 사복경찰들에 의해 줄줄이 끌려나간 뒤, 남아있던 한 명
의 경찰이 나에게 물었다.
“이분은 어떡할까요?”
그가 가리킨 사람은 멍한 표정으로 어찌나 긴장했는지 땀까지 줄줄 흘리며 벽
을 바라보고 있는 선우창이었다.
“차장님, 마약 같이 하셨습니까?”
그러자 선우창이 고개를 돌려 나를 흘겨봤다.
“안 했어!”
“그럼 저랑 잠시 따로 말씀 나누시죠.”
“그래. 앉아.”
나는 경찰에게 방금 데리고 나간 사람들 모두 긴급 체포 처리할 테니 유치장
에 수감하고 마약 검사 진행하라는 지시를 내린 뒤 선우창과 마주 앉았다.
“일단 감사하다는 말씀은 드려야겠네요. 덕분에 허민회 쉽게 잡았습니다.”
“약속은 지키는 거지?”
“그 녹음 파일 감찰부에 넘기지는 않겠습니다. 그래도 법복은 스스로 벗으십
시오. 제가 대기업의 개가 된 거 눈앞에서 본 분 상관으로 모시고 싶지가 않
습니다.”
내 말에 선우창의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어차피 검사장 승진 안 될 거 뻔해서 이미 그럴 생각이었어! 알아서 나가려
는 사람 등 안 떠밀어도 돼.”
“그리고 하나 더, 검찰청 나가서 정치판 기웃거리지도 마십시오.”
“뭐? 그거까지는 네가 관여할 바 아니잖아!”
나는 확인 차원에서 이야기해 두려고 했던 건데, 진짜로 정치 욕심 못 버리고
있었던 거야?
“관여할 능력이 있다고 해 두죠. 그 녹음 파일 감찰부에 안 넘기겠다고 했지,
지워드린다고 한 적 없습니다. 선우창 차장님 어디 출마했다는 소식 들리면
그 파일 감찰부가 아니라 언론에 넘어갈 겁니다.”
“야! 왜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데?”
“대기업의 개가 된 분이 그 모습 감추고 사람들 앞에서 착한 척 정치하는 것
도 못 봐 드리겠거든요. 저는 날 밝으면 또 할 일이 많아서 이만 일어나 보겠
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