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급전이 필요했던 재벌 (2)
선우창 이 인간, 무지하게 쫄렸나 보네. 징계로 법복 벗으면 변호사 활동에도
지장 가니 그럴 만도 하지.
자기 녹음 파일을 묻어 주면 허민회의 범죄 증거를 주겠다는 제안은 나도 구
미가 당기는 면이 있었다. 이건 황성환이 요구했던 사법 거래와는 성격이 완
전히 다르다.
후배 검사가 선배 검사한테 받은 부당한 압력을 감찰부에 보고해야 한다는 규
정은 그 어디에도 없다. 피해당한 사람도 나 하나이니 내 결정으로 그냥 묻어
도 무방하다.
허민회가 믿었던 선우창한테 뒤통수 맡고 어질어질해하는 꼴을 보는 것도 꽤
재밌는 구경이 될 것 같았다.
- 무슨 건수입니까? 횡령 증거는 이미 거의 다 잡아서 관심 없습니다만.
내 답장에 선우창이 상당히 다급한 상황에 처해 있는지 오타까지 내며 재빠르
게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 횡령 아닉 마약이야. 잠깐 화장실 간다고 나온 거라 금방 돌아가 봐야 돼.
빨리 대답해. 그 파일 감찰부에 넘길 거야 말 거야?
오타를 정정해 보면, 횡령이 아니고 허민회가 저지른 마약 범죄의 증거를 주
겠다는 건데. 마약이라. 이제야 비어있던 퍼즐 한 칸이 맞아 떨어지는 느낌이
었다.
감옥은 의외로 마약을 접하기 상당히 쉬운 장소이다. 온갖 범죄자들이 흘러
흘러 마지막에 고이게 되는 곳이니 그중에는 당연히 마약 팔다 들어온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그런 자들과 한 데 몰려 있으니 허민회가 울산 구치소에 수감돼 있는 동안 마
약을 시작했을 가능성은 상당히 컸다.
당연히 원칙적으로 구치소 내 마약 반입이 될 리는 없지만, 울산 구치소가 어
떤 곳이던가? 교도관들이 낮술 파티를 벌이는 동안 재소자들이 서로를 죽였던
레전설 감옥이다.
이렇게 관리가 소홀했으면 전문 기술자인 마약 밀매범들 역시 훨씬 쉽게 마약
을 반입할 수 있었겠지.
어쩌면 교도관이 그 반입에 적극적으로 협조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토록 어
이없이 살인 교사범 허민회를 풀어준 울산 구치소라면, 정말 그럴 수도 있다.
그렇게 쉽게 구치소에서 마약에 물들었다가 사회에 나와 보니 예전에 상납하
던 사람은 여전히 감옥에 있고, 자기가 구하려니 돈이 꽤 들었겠지.
허민회가 황성환한테서 단칼에 삥 뜯어 갔다는 7억. 마약 구매 자금이었구나?
넉넉하게 취했겠네.
그러고 나서도 계속 마약 잡수실 생각은 들었을 테니, 자기 손에 떨어진 휴림
유업이야 망하든 말든 대리점주들 싹 다 털어먹겠다는 계획 짰나 보다.
황성환의 농간으로 각 대리점마다 각 1억씩이나 휴림유업 본사에 예치해 두었
으니 급전 필요한 재벌님한테 얼마나 달달한 사탕으로 보였을지는 잘 알겠다.
선우창이 단순히 허민회의 횡령 증거를 주겠다고 했으면 모르겠으되, 마약 사
범 증거라면 얘기가 다르지.
- 그 녹음 파일 저만 갖고 있겠습니다. 당장 내일 감찰부에 넘기지는 않을 테
니 허민회 마약 증거 넘겨 주시죠.
- 왜 이렇게 늦게 답장해? 자네 선배가 우스워? 지금 내 핸드폰 위치추적 찍
고 그대로 따라와. 거기서 현행범으로 허민회 체포하게 해 줄 테니까.
선우창이 아직도 못 버린 권위의식이야 나중에 처리해 준다 치더라도, 이건
구미가 당기는 걸 넘어선 너무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특정 번호의 핸드폰 위치추적은 검사로서는 너무 쉬운 일인 반면, 그것만 해
주면 허민회를 마약 현행범으로 체포할 수 있다니?
회귀한 이 시점을 기준으로, 우리나라에서 마약 사범은 횡령범 따위와는 그
궤를 완전히 달리 한다.
횡령이야 대장부가 기업 활동을 하다 보면 저지를 수도 있는 문제로 여겨지지
만, 마약은 완전한 인간쓰레기 취급이다.
이 건수만 잡으면 HL 그룹에서도 더 이상 허민회를 쉴드치지 못 할 게 분명했
기에 나는 즉각 선우창의 핸드폰 위치추적을 시작했다.
우리가 오늘 해물탕을 나눠 먹던 곳에서 움직이기 시작한 선우창 핸드폰의 움
직임은 곧이어 한참 떨어진 나이트클럽에서 멈췄다.
그냥 클럽에 가고 싶었던 거면 그 근처에도 얼마든지 많았을 텐데 굳이 서울
시내에서 차로 20분 이상 떨어진 딱 저 나이트로 이동했단 거지?
이쯤 되니 선우창의 말에 신빙성이 더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지금 내 컴
퓨터에서 잡히 저 위치에서 허민회의 마약 범죄가 일어날 거란 말이지?
뭐, 선우창이 HL 그룹의 정치 자금줄 라인 타서 국회 입성 한 번 해 보겠다는
생각은 마음에 안 들었어도 그 역시 검사다.
나보다 오랜 세월을 범죄 수사에 전념해 왔던 사람이니 마음의 썩음썩음함과
는 별개로 그 능력은 인정할 만할 것이다.
기왕 선우창의 녹음 파일을 감찰부에 넘기지 않기로 하고 받아낸 정보이니 나
로서도 활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끙차-.
오늘 하루종일 너무 피곤했지만, 나는 이미 회귀를 통해 하루 정도는 밤 새도
끄떡없을 육체를 얻었다. 그럼 어디 마약 사범 허민회를 체포하러 가 볼까나?
선우창의 핸드폰 위치가 찍힌 그 나이트클럽으로 경찰 병력을 이끌고 출동했
을 때였다. 제복 입은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어깨에 힘 잔뜩 준 형님들이 우
리를 막아섰다.
그리고 곧이어 그들 중 대표로 보이는 한 사람이 지하 클럽에서 올라와 우리
를 마주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우리 쪽에서 대표로 나선 사람은 당연히 나였다.
“서울중앙지검 검사 백동준입니다. 이 클럽에서 마약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다
는 첩보를 받고 출동했습니다. 수사에 협조 바랍니다.”
이 정도로는 말빨이 잘 안 먹혔던 걸까? 그 어깨들의 대표자가 한 걸음 더 우
리를 향해 다가왔다.
“영장 있으십니까?”
물론 없었다. 이 늦은 밤에 영장을 내 줄 판사가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
렇다고 해도 저쪽은 현직 검사를 너무 무시했다.
“수사에 협조 바란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저희가 진짜로 영장 갖고 수색했을
때 이곳에서 마약 사범들이 활동한 정황이 포착된다면 지금 제 앞에 서 계신
분들 모두 범인 은닉죄로 처벌받으실 수 있습니다.”
“잠시만요.”
아무리 어깨 형님들이라고 해도 검사랑 직접 맞다이를 떠 보는 건 처음이었는
지, 자기들끼리 스크럼을 짜고 회의를 하더라.
그러던 중, 이 나이트 클럽의 주인인 것 같은 늙수구레한 노인이 등장했다.
“아이고, 검찰, 경찰 나으리들 수고가 많으십니다.”
“네. 검사 백동준입니다. 잠시 수사에 협조 부탁드립니다.”
그러자 그 나이트 주인이 먼저 딜을 치고 나섰다.
“저희는 영업을 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많은 경찰분이 우르르 저희 업소
에 들이치시겠다고요? 그건 아니 될 일입니다. 지금 당장만 해도 저희 영업소
에 들어오시려다가 저 멀리 돌아가시는 분들 보이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말입
니다.”
“네. 계속 말씀하시죠.”
“뭐, 마약 사범 검거하러 오셨다는데, 저희가 그거 막을 생각은 일호도 없고
요, 다만 영업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지금 검사님이라고 말하신 분이랑 경찰
제복 안 입으신 분만 저희 클럽에 입장하시는 거로 해 드리면 어떻겠습니까?”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자자, 거기 제복 입으신 분들은 저기 길 건너편으로 멀찍이 물러나시고
검사님이랑 사복 입으신 분들만 줄 서십시오. 기본 6만8천 원입니다. 팔찌도
당연히 채워 드리고요.”
푸핫-.
이 클럽 주인도 무지하게 독특한 인간일세. 허민회가 선우창을 데리고 이곳에
왔을 때는 이 클럽주와 암암리에 이야기가 끝나 있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그래서 우리 진입을 막나 했더니, 이게 자기가 어쩔 수 없는 공권력
의 행사라는 걸 알게 되자마자 바로 발을 빼네.
그러더니 지금은 공권력한테도 받을 돈 일인당 6만8천 원은 받아야겠다고? 나
는 너무 거리낄 게 없어서 수사비가 들어 있는 카드로 결제했다.
그리고 허민회가 마약 파티를 벌이고 있을 클럽 안으로 당당하게 들어섰다.
* * *
몇 시간 전, 백동준 검사가 선우창 차장검사의 얼굴에 김칫국물을 뒤집어씌우
고 나간 뒤에 허민회가 물었다.
“차장검사면 평검사 하나는 가볍게 제압하실 수 있는 거 아니었습니까?”
민망한 듯 탁자에 놓여 있던 티슈로 얼굴을 훔치던 선우창이 고개까지 숙여가
며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명령 계통상 제 직속 부하 검사가 아니다 보니 말을
안 듣는 것 같습니다. 허민회 사장님께서 원하시면 제가 다른 루트 알아봐 드
리겠습니다.”
그때였다. 백동준이 있을 때는 한참 성장한 척하던 허민회가 품에서 웬 길다
란 사탕통 같은 걸 꺼내 들었다.
그러더니 그 통 뚜껑을 열고 자신의 손등에 내용물을 살짝 털더니 그걸 코로
그대로 들이마셨다.
“하아, 이제야 살 것 같네. 이봐. 차장?”
말투까지 싹 바뀐 허민회가 내뿜는 안광에 선우창이 엉겁결에 대답했다.
“당신 지금 우리 HL 그룹에 찍힌 거야. 알아?”
“이번 일은 제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덮겠습니다.”
“무슨 수? 어떤 수를 쓸 건데?”
선우창이 아직 닦이지 않은 관자놀이에서 흐르는 김칫국물 한 방울을 느끼며
머리를 조아렸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대로 백동준 검사 직속 차장을 붙여 드리든가, 아니면
제가 책임 지는 수준이 아니라 목숨 걸고 저희 검사장님이라고 연결해 드리겠
습니다. 부디, 한민당 공관위원장님이랑 다리만 놔 주십시오.”
선우창이 그렇게 바싹 기는데도 이미 마약을 들이켠 허민회는 아랑곳하지 않
고 압박을 이어갔다.
“방금 그 백동준인가 뭔가한테 녹취까지 다 따였잖아? 그런데 그게 효과가 있
을까?”
“제 목숨을 걸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 그럼 그 목숨 어디 한 번 걸어 봐. 우리 지금 같이 어디 좀 갈 건데,
거기로 백동준 직속 차장검사든 그 대단한 서울중앙지검 검사장이든지 불러
보라고.”
선우창으로서는 녹음을 따간 백동준과 어쨌든 HL 그룹이라는 어마어마한 금권
을 쥔 허민회 사이에 껴서 참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푹 숙인 머리를 열심히 굴리던 선우창이 결국 한 가지 꾀를 생각해 내었다.
“네. 같이 가시죠. 거기로 저희 검사장님도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진짜 검사장? 좋았어. 우리 오늘 같이 가는 거야.”
“너무 죄송한데, 제가 잠시 화장실 좀 갔다 와도 되겠습니까? 아까부터 너무
긴장도 하고 술도 많이 마셔서 지금 방광이 터질 것 같습니다.”
위기 상황에 자신의 체면을 다 내려놓고 한 요청을 허민회가 흔쾌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승낙했다.
“그래, 그래. 갔다 와.”
그리고 화장실로 온 선우창 차장검사는 재빠르게 백동준 검사와 딜을 쳤다.
허민회와 천하의 원수를 진 백동준 검사라면 단박에 콜을 외칠 줄 알았는데
어째 한참 답이 없다.
잠깐 화장실에 갔다 온다고 해 놓고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울 수는 없었기에 얼
른 허민회가 있는 해물탕집 방으로 돌아왔다.
“요즘 제가 오줌이 잘 안 나와서 말입니다. 조금 오래 걸렸습니다. 한 잔 받
으시죠.”
그러자 허민히가 술잔을 받는 대신, 원통형의 물체를 선우창에게 내밀었다.
“방광 터질 것 같다더니? 이깟 술보다 더 좋은 거 나누자고. 이따 검사장님
오셨을 때도 같이 하면 더 좋고. 그렇게 우리 HL 그룹이랑 검찰청이 다 같이
가면 좋은 거 아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