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급전이 필요했던 재벌 (1)
자기 생각이 읽히고 있는 것도 모른 채 이를 부득부득 갈던 황성환이 검찰청
물까지 얻어 마신 뒤에야 겨우 얼굴로 화산처럼 치솟아 오르던 붉은 기운을
가라앉혔다.
“그래서 저를 왜 잡아 오신 겁니까?”
“댁에서 체포할 때 말씀드렸는데, 못 들으셨습니까?”
“특정 뭐라고 했는데 아이들까지 있는 데에서 그러시니까 너무 당황스러워서
정확히는 못 알아들었습니다.”
긴급체포에서 죄명을 알려주는 건 검사의 의무이니 귀찮아도 한 번 더 이야기
해 주는 수밖에.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제3조 위반하셨습니다. 휴림유업 대
리점주들한테 부당하게 갈취하셔서 개인 통장으로 빼돌리신 금액이 3년간 7억
원이 넘더라고요? 그것 때문에 돌아가실 뻔했던 분도 계시고요.”
빠득-.
황성환의 이가 또 한 번 갈리더니 그의 입에서 익숙한 이름이 튀어나왔다.
“강석동이 그 새끼는 왜 일을 그렇게 벌여 갖구선, 사람 피곤하게.”
“이보세요, 두 분이 아는 사이인 건 짐작하고 있었습니다만, 당신의 범죄로
인해 사망에 이를 뻔한 분입니다. 그분 이름 그렇게 함부로 입에 올리실 상황
이 아닐 텐데요?”
“아, 네. 여기까지 잡혀 온 거, 아니라고 해 봤자 뭐 하겠습니까? 알뜰살뜰
모아서 딱 10억 채우면 때려치우고 휴림유업이고 한국이고 다 뜰 생각이었는
데 일이 그렇게 됐습니다. 잘못했습니다. 그런데 저 정말 억울합니다?”
횡령으로 1년에 몇억씩 부당이득 챙겨놓고 그 돈을 알뜰살뜰 모았다니. 말에
서는 생각이 묻어나온다더니, 저런 생각을 갖고 있으니 그런 범죄를 저지르고
도 이렇게 뻔뻔하지 싶네.
그나저나 추적한 계좌 내역 들이밀면서 한참 입씨름해야 할 줄 알았는데, 금
방 잘못했다고 하니 이건 편하네. 그런데 잘못했다고 해 놓고 마지막에 붙은
사족은 뭐람?
“뭐가 억울하십니까?”
“그 7억 제가 가진 거 아닙니다.”
“일부는 아랫사람들한테 나눠주기도 하셨더라고요. 제가 말씀드린 7억은 나눠
준 액수 빼고 황성환 씨가 개인적으로 착복하신 금액만 계산한 겁니다. 계좌
이미 다 열어 봐서 알고 있습니다. 이익 공유받고 범죄에 동참한 사람들도 차
차 다 구속될 겁니다.”
내 설명에도 황성환은 여전히 억울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컵에 남은 물을 들이
켰다.
“그래서 억울하다는 게 아니라요, 그 7억 지금 저한테 없다고요.”
“범죄 수익금 매달 현금으로 꼬박꼬박 인출하셨던데, 황성환 씨가 안 갖고 계
시면 어디 있습니까?”
회귀 전까지 치면 거의 20년에 달하는 수사 경험상, 유흥비로 탕진했다는 말
이 나올 줄 알았다. 거액의 경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늘 쓰는 수법이다.
이 사람들의 목적은 범죄 수익을 추징당하지 않는 건데, 현금으로 인출해서
유흥비로 쓰고 없다고 하면 수사기관으로서는 정말 자금 추적이 쉽지 않다.
하지만 황성환의 대답은 내 예상을 비켜 갔다.
“허민회 사장한테 있을 겁니다. 허민회가 저 잡아가라고 검사님이랑 저녁까지
드시면서 고자질했다니까, 저도 어이가 없어서 그냥 말씀드립니다.”
오호? 약간의 말장난으로 황성환이 허민회를 불신하게 만들려는 내 계획이 아
주 주효하게 먹혀들고 있나 본데?
“그렇게 알뜰살뜰 모은 자금을 허민회 사장한테 넘겼다고요? 왜요? 기왕 말씀
하기로 하신 거 쭉 풀어 보시죠.”
“옛날에 허규회 사장이 휴림유업에 관심 끄고 있을 때가 좋았는데, 갑자기 사
장이 허민회로 바뀌더니 무슨 미친 사람처럼 눈이 벌게져서 회사에서 돈 나올
구석 없는지 찾아다니더군요. 그러다가 제가 하던 일, 그러니까 검사님이 쭉
말씀하시는 그 범죄가 딱 걸렸지 뭡니까?”
“허민회 사장은 뭐라고 했습니까?”
휴우-.
허민회한테 단단히 빡이 쳤는지 황성환이 빈 물컵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에는 저를 따로 불러다가 횡령으로 고소하겠다고 길길이 날뛰더군요. 그
래서 제가 국외로 뜰 생각하고 있는데, 그날 밤에 웬 해물탕집으로 다시 부르
더니 회사 안에서 해결하자고 했습니다.”
“어떻게요?”
“지금까지 제가 번 돈 자기한테 다 넘겨 주면 고소는 없던 일로 해 주겠다고
요. 그리고 판을 더 키워서 앞으로 벌어들이는 돈은 저랑 나눠 갖자고 했습니
다. 뭐, 그 판 키우는 얘기 들어보니까 10억 모으려면 그쪽이 더 빠를 것도
같더라고요.”
이쯤이면 슬슬 이번 사건의 전체적인 그림이 나오는 것 같은데, 기왕 황성환
의 입이 열린 김에 말을 더 들어봐야겠다.
나는 컵을 바라보며 침만 꿀꺽꿀꺽 삼키는 황성환에게 물 한 병을 갖다 주면
서 계속 물었다.
“그래서 횡령금 7억은 허민회 사장한테 있다고 하셨군요.”
“네. 검사님 말대로 매달 현금으로 인출해서 금고에 쌓아뒀던 돈 허민회한테
자루로 싸서 갖다 바쳤습니다. 그때 그러지 말고 그냥 튀었어야 하는 건데,
쓰읍.”
“허민회 사장은 왜 그렇게 큰돈이 필요했던 겁니까?”
황성환이 이번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걸 저도 모르겠습니다. 대충 회사에 도는 얘기로는 허민회 사장이 감옥 한
번 갔다 오면서 허창수 회장이 화가 나서 쓸 수 있는 돈을 다 막아 버렸다고
는 하는데, 그렇다고 재벌이 당장 삼시 세끼 못 먹을 건 아니잖습니까? 그런
데 진짜 당장 쓸 돈이 없어서 미친 사람 같았어요.”
내 생각에도, 깜방까지 들어갔다가 허창수 회장이 울산 구치소에 그 어마어마
한 공작을 펼쳐서 겨우 풀어줬으면 허민회는 당분간 숨죽이고 사는 편이 맞았다.
그래야 허창수 회장한테 다시 이쁨받을 기회를 노려보든, 콩고물로 떼어 줄
작은 계열사라도 하나 더 가져가든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도 감옥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이런 일을 벌였다는 건, 허민
회한테 내가 모르는 사정이 하나쯤은 더 있다는 뜻이 된다.
“그럼 그 7억, 지금 허민회 사장이 안 갖고 있을 수도 있겠군요.”
“저도 잘 몰라서 그냥 그럴 것 같다고만 말씀드린 겁니다. 급해 보이던데, 어
디 썼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현금으로 7억이 단기간에 들어갈 일이면 범죄의 냄새가 풀풀 나긴 하는데. 이
쪽도 일단 이건 황성환도 모른다니 허민회를 잡아다가 물어보기로 하고.
“허민회 사장이 벌이자고 했던 더 큰 판은, 대리점주들이 회사에 예치해 놓은
보증금 1억을 갈취하자는 거였죠?”
“네. 그렇습니다. 제가 갖고 있는 돈만 넘겨주면 그 큰 판에서 나오는 돈은
반반 나누기로 했습니다. 대리점 한 곳만 털어도 제 몫이 5천이니 20곳 털면
10억 금방 아니겠습니까? 그거 받고 한국 뜨면 딱이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
데, 그러다가 강석동이 자기 몸에 휘발유 붓고 불붙이는 그 사달을 냈죠.”
“그 일 터지고 나서 허민회는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황성환은 아직도 배신감에 치를 떠는 중이었는지 물병을 쥔 그의 손에 너무
힘이 들어가 하얗게 변해 있었다.
“자기도 이러다가는 다 죽겠다 싶었으니, 일단 죄는 저더러 이고 가라고 하더
군요. 그동안 대리점주들한테 갈취했던 금액도, 보증금 뜯어먹은 것도 다 제
가 했다 치고 적당히 도망 다니다 보면 달러로 현금 쥐어 줘서 중국이나 필리
핀쯤으로 밀항시켜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잡혀와 계시네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다 말씀드리는 거 아니겠습니까? 진짜 어이가 없어서.
내가 잡히면 자기가 무사할 줄 알았나?”
기왕 허민회에 대한 적개심이 활활 불타오르고 있으니 이것까지 캐 봐야겠다.
“허민회 사장이 대리점주들의 보증금 갈취하라고 지시했던 증거가 있습니까?
허민회 사장이 부정하면 여전히 황성환 씨의 단독범행으로 볼 여지도 있어서요.”
역시 내 예상대로 황성환은 불같이 반응했다.
“증거 있습니다! 허민회 사장이랑 공유했던 이메일 계정 제가 따로 백업해 놓
은 파일 제가 갖고 있습니다.”
“그 파일 넘겨 주시죠.”
흠칫-.
내 요구에 황성환은 자기가 너무 나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는 듯 스스로에게
놀란 표정이 되고 말았다.
“그럼 저는 무죄 석방해 주실 수 있습니까?”
나랑 다른 범죄자의 증거를 줄 테니 자기는 빼 달라는 사법 거래를 하자고?
고스톱 쳐서 부사장 자리 딴 건 아니었는지 나름 딜을 칠 줄은 아네.
나도 그렇게 일하면 편하겠지만, 우리나라에서 검사가 피의자를 대상으로 행
하는 사법 거래는 불법이다.
그리고 내 개인적인 양심에 비추어 보아도 횡령 액수가 수억 원대인 데다 그
걸로 한 사람의 목숨을 위협해 놓고 반성의 기미조차 안 보이는 자를 석방해
주는 건, 아니올시다.
까놓고 말해 오늘 한 자백도 이미 걸렸다는 자포자기 반, 허민회에 대한 배신
감 반 때문에 한 거지 쭉 대화하면서 죄책감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아뇨. 하지만 그 증거가 없어서 황성환 씨의 단독범행으로 인정되면 형량은
늘어나고, 횡령한 돈 7억이 허민회한테 갔다는 말씀도 믿을 수 없으니 몽땅
황성환 씨한테 추징금으로 부과될 수도 있겠죠.”
끄응-.
칼자루를 쥔 쪽은 결국 나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달은 황성환이 고통스러운 신
음을 흘렸다.
“... 생각해 보겠습니다.”
탁탁-.
나는 가져온 서류를 정리하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러셔도 됩니다. 오늘 조사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그럼 저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겁니까?”
“그럴 리가요? 오늘 밤은 유치장에서 보내시게 될 거고 내일 구치소로 이감되
실 겁니다. 구속영장 청구될 거고, 빠르면 내일 오후쯤 영장 적부심 열릴 겁
니다. 그때 다시 뵙죠. 그 증거 파일 계속 혼자만 들고 계시면 적부심이든 실
제 재판이든 계속 황성환 씨한테 불리하게만 작용할 겁니다.”
쿵-.
절망에 찬 황성환의 머리가 책상에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조사실을 나왔다.
* * *
늦은 밤까지 이어진 격무 때문에 피곤한 몸을 이끌고 텅 빈 내 검사실로 돌아
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황성환은 이걸로 됐고. 이제 허민회를 잡아야 하는데 조금 느긋하게 생각해
보자면 황성환이 그 증거를 내놓을 때까지 기다려도 될 것이다.
서두르자면 조금 귀찮긴 하겠지만, 황성환의 자택이고 휴림유업 사무실이고
죄다 압수수색해서 내가 직접 찾아내는 방법도 있다.
어느 쪽이든 허민회는 다시 감옥에 들어갈 테니 딱히 큰 걱정은 없는데, 여전
히 풀리지 않는 의문은 역시 재벌 허민회한테 왜 급전이 필요했냐는 것이다.
어느덧 검사실의 시계는 자정을 가리키고 있었고, 피곤한 하루였으니 이만 자
고 일어나서 계속 생각해 볼까 하는 마음도 들었다.
그때, 다시 개인적으로 연락할 일은 없을 줄 알았던 사람이 나한테 문자메시
지를 보냈다.
- 백 검사, 그 녹음 파일 벌써 감찰부에 넘긴 거 아니지?
발신인은 나한테 허민회랑 짝짜꿍 맞추는 대화를 녹음 당하고 말았던 선우창
차장검사였다.
- 날 밝는 대로 넘길 겁니다.
- 그러지 말고 나랑 거래하지. 자네 목적 결국 허민회 아니야? 그 파일 감찰
부에 안 넘긴다고 약속만 해 주면 내가 지금 바로 허민회 확실히 잡을 건수
하나 주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