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윗선의 압력을 뛰어넘는 방법 (2)
오히려 아이처럼 구는 건 이 자리에서 나이가 가장 많은 선우창이었다.
“백동준 검사, 이 사람아! 방금 허 사장님도 말씀하시지 않았나? 이런 일, 저
런 일 다 있을 수 있다고. 나도 자네가 부장 명령 어기고 수사하겠다는 그 휴
림유업 사태 대강 훑어는 봤네만, 밑에 직원들 몇 명이 잘못한 거 같고 회사
를 그렇게 들쑤시면 되겠나? 이래서야 어디 우리나라에서 기업 할 맛 나겠어?”
어휴. 검사로서 자존심도 없나? 저러니까 서울중앙지검 차장검사라는 요직까
지 들어왔다가 검사장 못 달고 법복을 벗지.
선우창은 몇 년 내로 검사장 인선에서 탈락하고 국회의원이 돼 보겠다고 정치
판을 기웃거리다가 당선은커녕 공천도 못 받는다.
너무나 투명하게 읽혀 들어오는 선우창의 생각을 통해 지금 이러는 이유 역시
그의 정치 욕심 때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며칠 전에 딱 이 자리에서 선우창과 허민회가 따로 만났나 보다.
[선우창이 허민회의 그릇에 해물탕을 덜어주며 가식적인 웃음을 짓는다.]
[“백동준인가 하는 검사가 들쑤시고 있다는 그 사건만 무마시켜드리면 한민당
이랑 다리 놓아주신다는 말씀 믿어도 되겠습니까?”]
한민당은 현 집권 여당으로, 한국 정치 지형상 특정 지역에서 그 당의 공천만
받으면 국회의원까지는 프리패스였다.
[“그럼요. 그 당에서 입김 좀 뿜는다는 정치인 치고 저희 HL 그룹에서 정치
자금 안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말만 하세요. 원내대표? 당 대표? 아예 빠르
게 곧 있을 총선 공천관리위원장이랑 다리 놔 드릴까요?”]
[“제 입장에서는 마지막으로 말씀해 주신 분이 가장 좋겠습니다. 제가 아무래
도 검사장을 못 달 것 같거든요. 변호사 개업 안 하고 바로 국회로 입성할 수
있으면 저야 가장 좋죠.”]
[“알겠습니다. 그럼 이번 사건에서 저희 회사는 확실히 보호해 주시는 거로
알겠습니다. 한 잔 받으시죠.”]
[술잔이 오간 뒤 선우창이 허민회에게 묻는다.]
[“오기 전에 사건 훑어 봤습니다만, 이게 언론에도 크게 터져서 말입니다. 아
예 없다고 치고 넘어가지는 못하겠고 말단 직원 몇 명 자르시는 것까지는 괜
찮죠?”]
[“그럼요. 직원이야 새로 뽑으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소모품이죠.”]
휴우-.
허민회 이 자식 감옥에서 성장하긴 했어도 역시나 저 썩음썩음한 마음씨는 어
디 가질 않네. 사람을 대상으로 소모품이라니.
[선우창이 자신 있다는 듯 허민회를 향해 웃어 보인다.]
[“그렇게까지 양보해 주시면 저야 일 처리하기 쉽죠. 사건 맡은 백동준이라는
그 검사 이미 자기네 부장한테 항명까지 한 모양이던데, 허 사장님이 말씀하
신 소모품 몇 개 치우는 거로 일 마무리하게 제가 잘 타일러 보겠습니다.”]
결국, 이 둘은 휴림유업의 관리 직원 몇 명 감옥 보내는 선에서 일을 마무리
짓는 것으로 자기들끼리 결론 짓고 나를 이 자리에 부른 것이었다.
하지만 이걸 어쩌나. 나는 그 결론에 응해줄 생각이 전혀 없는데? 타이르는
건 내가 선우창한테 해야겠다. 국회의원 돼 보겠다고 검사가 사건을 덮으면
되나?
“제가 검사로서 정당하게 수사한 일에 사과도 못 드리겠고, 앞으로도 그 정당
한 수사 쭉 이어나갈 겁니다. 이번 휴림유업 갑질 사태 적당히 잠잠하게 덮고
넘어가는 일 없습니다.”
“이봐, 자네 사시 패스하느라 얼마나 힘들었어? 그러고 나서 바로 성해지청
시골로 가서 또 얼마나 굴렀고? 지금 우리 중앙지검으로 온 게 자네 인생 절
호의 찬스라는 생각 안 드나?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이번 사건 잠잠하게 지나
가면 내가 자네 팍팍 밀어줌세. 현실을 봐. 검찰청에서는 결국 라인 잘 타는
사람이 끝까지 가는 거야.”
참 나, 저 말이 맞다고 쳐도 지금 내 머릿속에 검찰총장까지 가게 되는 사람
들이 수두룩 빽빽인데 내가 왜 검사장도 못 달고 곧 검찰청에서 쫓겨날 선우
창 라인을 탄단 말인가?
내가 반박하려는데 이번에는 허민회가 치고 들어왔다. 처음부터 둘이서 나를
저 해물탕마냥 찜쪄먹을 생각으로 불렀겠지.
“백동준 검사님, 저랑 있었던 과거의 악연 때문에 이러시는 거 잘 압니다만,
이만 화해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여기 선우창 차장 검사님 라인에 이어서
제가 줄 하나 더 드리죠. HL 그룹 스폰 받는 검사 어떻습니까?”
“저한테 뭘 주시려고요?”
“백동준 검사님이 원하시는 걸 말씀하시면 뭐든 들어드리겠습니다. 대검으로
가고 싶으시면 레드카펫 깔아드릴 거고요, 검찰에 오래 계실 생각 없으시면
대형 로펌에 자리 알아봐 드리죠.”
HL 그룹을 통째로 나한테 주겠다는 얘기면 그게 내 최종 목적이니 혹할 뻔도
했는데, 달랑 저거 주면서 나를 회유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건가?
“제가 원하는 건, 이번 휴림유업 사태 관련자들 모두 감옥에 집어넣는 겁니
다. 허민회 사장님께도 곧 소환통지서 날아갈 테니 기다리고 계십시오. 저는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문어, 잘 익은 것 같은데 두 분이서 맛있게 드십시오.”
그러고서 나는 이만 일어나려는데 선우창이 내 손목을 덥석 잡았다.
“앉아! 아직 이야기 안 끝났어. 자네 검찰 내에서 평판이 어떤 줄은 아나? 평
검사 주제에 양경동 부장부터 곽한성 검사장까지 목 날린 거 이미 소문 다 났
어. 거기다 며칠 전에는 이유림 부장한테 대들기까지 했다고, 자네 지금 선배
검사들한테 기피 대상 1순위야. 내 제안까지 이렇게 차 버리면 검찰청에 더는
발 못 붙여.”
선배 검사랑 붙어서 진 적이 없는 내 전적을 저렇게 잘 알면서도 나한테 저런
협박을 한단 말이지?
천천히 까려고 했는데, 선우창이 지금 어떤 처지에 있는지 바로 알려주는 것
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찰청에 더는 발 못 붙이게 된 사람이 누구인지 명확히 알려 줘야지.
스윽-.
입고 있던 양복 재킷 안 주머니에 손을 넣은 나는 그대로 검찰청에서 쓰는 감
청장치를 꺼내 들었다.
“이게 뭔지는 선우창 선, 배, 님께서도 잘 아시리라고 생각합니다만. 방금 제
가 들은 말 여기에 고스란히 저장돼 있습니다.”
“너 미쳤어? 영장도 없이 감청을 해?”
“영장, 필요 없죠. 제가 참여한 대화 녹음한 건데요. 검찰청에서 쓰는 장비가
성능이 좋아서 잠시 빌렸습니다. 대화 내용 복기해 드리죠. 허민회 사장님께
서는 현직 검사한테 뇌물 제안하셨고, 선우창 차장님께서는 후배 검사 압박해
서 대기업의 비리 사건을 덮으려고 하셨습니다.”
어느새 내 손목을 잡았던 선우창의 손목은 스르르 풀려 있었고, 그의 눈동자
역시 갈피를 못 잡은 채 이곳저곳으로 마구 튀어 올랐다.
“백동준 검사, 그, 그거 이리 주고 우리 처음부터 다시 얘기하지.”
“아뇨. 말씀드렸듯이 저는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이 안에 저장된 녹음 파
일은 내일 대검 감찰부에 넘길 테니 검찰청에 발 더 붙이고 계실 생각은 안
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제가 아니라, 선우창 차장님이요.”
결국, 궁지에 몰린 선우창은 영 좋지 못한 선택을 하고 말았다. 벌떡 일어나
더니 내 손에 들린 감청장치를 향해 몸을 날린 것이었다.
이것만 뺏으면 자기 마음대로 될 거라고 생각하나 본데, 그게 어디 뜻대로 될
리가 있나?
휙-.
이래 봬도 대학생 때 킥복싱 동아리에서 활동 좀 했던 몸이다. 저런 굼뜬 몸
놀림에 당할 리가 없지.
간단하게 옆으로 한발 비켜서는 것만으로도 공격은 간단히 피했고, 오히려 타
격은 선우창 쪽으로 들어갔다.
와장창창-.
중심을 잃은 그가 잘 차려진 상 위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조금 전까지 위엄
있는 척하던 선배님 얼굴에 김칫국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게 꼴이 말이 아니네.
자기 혼자 나자빠져 놓고 슬슬 정신을 놓았는지 법조인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말까지 내뱉었다.
“너, 이거 내가 고소할 거야.”
“무슨 죄목으로요?”
“폭행! 어디 정당방위라고 우겨보든가.”
나는 피하기만 했는데 폭행은 뭐고, 정당방위는 왜 또 튀어나온담?
“방금 선우창 차장님께서 폭행 미수죄 저지르셨습니다만? 원하면 제가 고소해
드릴 수는 있습니다.”
나는 멍하게 천장만 바라보는 선우창을 남겨둔 채 해물탕집을 나오려는데, 고
개를 가로젓는 허민회의 재밌는 생각이 읽혔다.
[아이씨, 차장이면 졸라 높은 거라더니 끗발 더럽게 없네. 이렇게 된 이상
Plan B 가동이다.]
두 번째 계획까지 마련해 두다니. 점점 내가 회귀 전에 알던 철두철미한 허민
회에 가까워져 가고 있는 것 같긴 한데, 그 내용을 나한테 벌써 들켜서 어쩌나?
* * *
내가 허민회의 생각을 통해 읽은 두 번째 계획은 소환 기일 전에 황성환 부사
장을 도피시키겠다는 것이었다.
황성환에 대한 출국 금지 명령이야 소환장 발부와 동시에 이미 내려져 있으
니, 국내 산골 마을로 빙글빙글 돌릴 작정이었나 보더라.
황성환 부사장 선에서 심지를 뚝 잘라버림으로써 불이 자기한테까지 타고 올
라오는 건 막겠다는 심산인가 본데.
내가 그렇게 놔둘 리가 있나? 해물탕집에서 나온 나는 그대로 경찰 병력과 함
께 황성환 부사장의 집을 급습했다.
허민회의 연락을 받고 급히 짐을 싸고 있던 그는 자택에서 그대로 체포되었
고, 지금은 검찰청 조사실에서 내 앞에 앉아있다.
“내일 뵙기로 한 거 아니었습니까? 영장도 없이 갑자기 집까지 찾아오셔서 이
렇게 잡아 오셨어야 했습니까?”
짐 싸다가 아내와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수갑 채워져 끌려온 게 상당히 쪽팔
렸는지 그의 얼굴에 올라온 붉은 기운은 아직도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형사소송법 제 200조 3항. 피의자가 도망할 우려가 있는 때는 일단 체포하고
사후에 영장 청구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내일 안 오실 생각이었잖아요? 어디
멀리 가시려는 것 같던데요.”
“잠깐 집 앞에 산책 나가려고 했습니다.”
“집 앞에 나가시는 분이 그렇게 큰 트렁크에 짐을 싸십니까?”
이미 짐 싸는 것까지 들킨 마당에 자기도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다는
걸 알았는지 황성환의 얼굴이 더욱 붉어지고 말았다.
“... 도대체 어떻게 아셨습니까?”
사실대로 말해 줘 볼까나?
“허민회 사장이 알려주던데요?”
“네?”
“조금 전에 허민회 사장이랑 같이 저녁 먹었거든요.”
황성환의 저 어처구니없어하는 표정 아주 마음에 든다. 결국, 내가 잡을 사람
은 허민회이니 황성환이 허민회를 불신할수록 나한테는 좋은 일이니까.
나는 거짓말을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황성환은 정확히 내 뜻대로 어마
어마한 오해를 품게 되었다.
[허민회 이 새끼, 굴러들어와서 내가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 얹다가 상 엎어
놓고서 나를 넘겨? 그래놓고 자기는 빠져나가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