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 검사는 재벌을 사냥한다-39화 (39/51)

39화. 윗선의 압력을 뛰어넘는 방법 (1)

범죄 수사에 있어서 여러 격언이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돈 받은 사람이 범

인이다’라는 것이다.

범인은 부당한 이득을 취하기 위해 범죄를 벌이게 되는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 이익은 대체로 돈이기 때문이다.

범인을 특정하기 어려울 때, 또는 여러 범인 중 일을 실제로 기획한 주범이

누구인지 찾기 어려울 때 꽤 유용하게 작용한다.

이 격언을 이번 사태에 적용해 보면, 주범은 쉽게 나온다. 대리점주들에게 횡

포를 부렸던 관리 사원들이야 내 예상대로 깃털일 뿐이고, 주범은 휴림유업

부사장 황성환이다.

그러고 보니, 허규회를 만났을 때도 자기는 휴림유업 대표 이사 자리에 이름

만 걸어 놓았을 뿐 실무는 부사장이 다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렇게 쉽게 주범을 특정할 수 있다니, 역시 통화 대신 병원으로 직접 찾아와

서 강석동을 만나길 잘했다. 마음 침투 스킬이 아니었다면 알 수 없는 정보였

을 테니까.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해지는 건, 왜 강석동이 황성환을 숨겨주려고 했

단 말인가? 할당량을 면제해 주는 대가로 내는 돈이 황성환한테 간다는 걸 알

았는데도 말이다.

친구라서? 글쎄. 나 같으면 친구에 대한 배신감 때문에라도 관리사원 김학영

대신이 황성환의 이름을 먼저 댔을 것 같단 말이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어져 읽혀 들어오는 강석동의 생각에서 찾을 수 있었다.

[황성환의 압박에 강석동이 황당하듯 되묻는다.]

[”친구면, 그깟 판매 할당량 좀 그냥 깎아줄 수 있는 거 아니야?“]

[그에 따라온 황성환의 대답은 수십 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 고등학생 때 말이야, 네가 나한테서 삥 참 많이도 뜯었지? 할당량 못

채운다고 쥐어패기도 많이 하고. 그때 내가 할당량 깎아 달라고, 우리 집에는

그럴 만한 돈이 없다고 빌었어도 네가 깎아 줬니?”]

영원한 피해자도, 영원한 가해자도 없다는 말은 어쩌면 진실에 가까울지도 모

르겠다. 고등학생 때 삥 뜯기던 피해자 황성환은 그대로 흑화해 범죄자가 되

어 있었다.

강석동이 황성환의 이름을 쉽게 대지 못했던 건, 결국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

렀어도 자기가 잘못한 게 있기 때문이었다.

[강석동이 황당하다는 듯 되묻는다.]

[“30년도 더 지난 그 일 때문에 나한테 이러는 거라고?”]

[“꼭 그것만은 아니고. 너도 알잖냐? 세상이 그렇게 단순하게만 돌아가는 게

아니라는 거. 나도 돈 갖다 바쳐야 할 사람이 생겼고, 그건 우리 같이 고등학

교 다니던 시절의 너도 마찬가지였겠지? 그러니까 조용히 돈 내자. 그때 나는

어떻게 해서도 돈을 마련할 수 없어서 그냥 맞았는데 지금 너는 다르잖아?”]

[“나도 돈 없다고. 지금 너네 회사에서 달라고 하는 매달 300만 원, 우리 대

리점 한 달 순수익이 넘어. 그걸 내가 어떻게 줄 수 있겠냐고.”]

[황성환이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씨익 웃는다.]

[“대출받으면 된다니까? 우리 직원이 이거까지는 안내를 안 했나? HL 캐피탈

에서 휴림유업 대리점주들한테는 특별 조건으로 대출해 주기로 했어. 아, 특

별 조건이라는 게 이자율이 낮다는 건 아니고 대출을 더 쉽게 해 주겠다, 이

런 거지.”]

[“야! 내가 네 말 듣고 휴림유업 대리점 차리면서 HL 캐피탈에서 끌어다 쓴

돈만 1억이야. 이거 때문에 한 달에 이자가 100만 원씩 나가고 있는데, 여기

서 대출을 더 받으라고?”]

[“그거야 네 사정이고. 일단 대출받으면 HL 캐피탈에서 어떻게든 갚게는 해

줄 거야. 화이팅 해.”]

[그러고서 황성환은 그대로 자리를 뜨고, 강석동은 남은 술을 들이키다가 그

자리에서 졸도하고 만다.]

그런 생각을 하는 강석동의 얼굴을 바라보았는데 여전히 풀지 못한 붕대 아래

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 자리 불편하시면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내 말에 눈을 몇 번 꿈벅인 강석동이 주변의 화상 때문인지 차마 문지르지는

못한 채 젖은 채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닙니다. 아직 더 드릴 말씀이 남아서요.”

“네. 워든 말씀해 주시면 수사에 참고하겠습니다.”

“그 강제 매출 할당량제도 저만 당한 건 아니라서, 곧 휴림유업 대리점주들이

들고 일어날 겁니다. 저한테도 같이할 건지 연락이 왔는데 몸이 이래놔서, 차

마 그럴 수가 없었네요.”

내가 미래 지식을 통해 알고 있던 휴림유업 대리점주들의 집단행동 역시 허민

회의 추가 갑질과 강석동의 분신 자살 시도로 인해 훨씬 앞당겨졌나 보다.

“그분들 연락처 제가 받을 수 있을까요? 제가 변호사는 아니지만, 이 사건 담

당하고 있는 검사로서 도와드릴 수 있는 게 있을 것 같아서요.”

강석동이 자기 핸드폰을 나에게 내밀며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그쪽에서 먼저 검사님 연락처 알려달라길래 지금 여쭈려던

참이었습니다. 그 친구들 연락처는 이렇고요, 저쪽에도 검사님 명함 드려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 * *

강석동과의 밤중 병원 미팅을 마친 나는 다음 날 즉시 황성환의 계좌 추적에

들어갔고, 동시에 그에게 소환 통지서 역시 발송했다.

들어온 계좌 추적 내역을 보니 어제 내가 강석동의 마음에 침투해서 읽은 내

용이 빼박 사실로 드러났다.

휴림유업의 대리점 관리사원들은 강석동에게 판매 할당량을 깎아준 대가로 받

은 돈을 송금하고 있었고, 황성환은 그 돈 중 일부를 다시 자신과 친한 임원

들에게 배분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황성환이 절반이 넘는 금액을 남겨 먹었기에 이 사건의 주

범이 그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이쯤 되면 황성환이 소환 조사에 응하지 않았을 때 바로 체포해서 구속할 명

분까지 갖췄다고 볼 수 있는데.

그러던 중, 엉뚱한 곳에서 연락이 들어왔다.

- 우리 오늘 저녁 식사나 한 끼 같이 할까?

발신인은 검찰청 연락망을 통해서만 서로 번호를 교환하고 있던 서울중앙지검

의 제3차장 검사 선우창이었다.

(이름이 우창이 아니고, 성이 ‘선우’ 이름이 외자로 ‘창’이다.)

검찰청에서 차장검사면 검사장 다음 가는 무지하게 높은 직책이긴 한데, 제3

차장 검사가 대체 나한테 왜 저녁을 먹자고 하는가?

내가 속한 부서는 조직도상 제1차장 아래에 배정되어 있다. 그러니 지금 상황

을 일반 기업으로 치지면 전혀 상관없는 사업부의 이사님이 일개 직원인 나를

보자고 하는 격이다.

대충 무슨 일인지 느낌은 왔다. 이유림 부장검사가 말했던 것처럼 휴림유업

사태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외부 그리고 윗선에서의 압박은 들어올 게 분명했다.

나 덕분에 휴림유업 사장 자리를 꿰찬 허민회가 이번 사건을 압박하는 루트로

제3차장 검사인 선우창을 골랐나 보다.

그렇다고 내가 이걸 피해야 할까? 딱히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 나한테는

이깟 윗선의 압박 따위는 가볍게 뛰어넘을 카드가 손에 들려 있었으니까.

- 네. 저는 퇴근 후라면 시간 괜찮습니다.

그리하여 선우창과의 저녁 식사 자리가 성사되었고, 우리가 만난 장소는 한

고급 해물탕집이었다.

얼마나 고급이었냐면, 손님이 주루룩 늘어선 테이블에 앉는 게 아니라 일행별

로 각각의 방이 배정되었다.

내가 종업원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방에는 선우창이 먼저 와서 해물탕 건더기

에 국자로 국물을 부어가며 익히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차장님.”

“어이, 백 검사 왔나? 앉게나.”

“네.”

그러고서 내가 그의 맞은편 방석에 앉는데 그가 손에서 국자를 놓지 않은 채

나를 향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조금 기다리게나. 아직 이 가운데에 있는 문어가 안 익어서 말이야.”

나를 방으로 안내한 종업원이 그 말을 듣자 자기 할 일을 해야겠다는 듯, 얼

른 우리 사이에 끼어들었다.

“저희가 살 잘 오른 문어들로만 넣다 보니까 안쪽까지 익는 데에는 시간이 조

금 오래 걸려서요. 다리 잘라서 먼저 익혀 드시고 몸통은 식사 끝나실 때쯤에

드시면 딱 맞습니다.”

고급 해물탕집이라 그런지 일개 직원까지 요리 매뉴얼을 확실히 숙지하고 있

나 보다.

내 생각에도 방금 저 종업원이 말한 대로 하면 금방 식사를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선우창이 국자를 든 반대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아닙니다. 천천히 익혀 먹겠습니다. 아직 오기로 한 사람이 한 명 더 있어서

요.”

그 말을 들은 종업원이 죄송하다는 듯 얼른 허리 굽혀 인사하고 돌아갔다. 그

나저나, 분명히 나한테는 둘이서 밥 먹을 것처럼 얘기해 놓고 또 누가 와?

그 의문에 대한 답은 문어가 다 익기 전에 밝혀졌다.

“아이고, 사장님. 안녕하십니까?”

우리가 들어와 있는 방문이 다시 열리자 선우창이 그토록 소중하게 쥐고 있던

국자까지 내팽겨친 채 얼른 손님을 맞으러 달려나갔다.

나 역시 상사가 일어서는데 마냥 앉아만 있을 수는 없어서 예의상 일어나 열

린 방문을 바라보는데 아주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나를 두 번이나 죽이려고 했고, 그중 한 번은 정말로 성공하기까지 했던 허민

회가 그 특유의 긴 팔을 앞뒤로 열심히 흔들며 안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차장님도 안녕하시고요?”

“네, 네. 저야 사장님한테 오늘 저녁 얻어먹을 생각에 하루종일 싱글벙글이었

습니다. 와서 앉으시죠. 같이 보고 싶다고 하셨던 친구도 이미 와 있습니다.”

우와, 허민회 저 자식 진짜 얼굴에 철판을 깔아도 대체 몇 겹을 깐 건지 모르

겠다. 나한테 그런 짓을 저질러 놓고 자기가 먼저 나를 보자고 했다고?

허민회가 방안으로 들어오는 동안 선우창 검사는 얼른 종업원에게 귀속말을

했다. 이어지는 종업원의 행동을 보니 문어 다리를 잘라 달라는 것이었나 보다.

잠시 후, 우리가 먹을 해물탕을 정갈하게 정돈해 놓은 종업원이 나간 뒤 허민

회가 내게 술병을 내밀었다.

“우리 백동준 검사님, 저랑은 인연이 참 깊으십니다. 저번에 조사실에서 보고

다시 보는 건 처음이시죠?”

그 말에 우리 사이의 사정을 모르는 선우창의 얼굴이 굳어졌다.

“자네, 허 사장님을 조사실로 모신 적이 있었나?”

내가 대답하려는데, 허민회가 허리를 뚝 자르고 들어왔다.

“어휴, 조사실에서만 뵀다 뿐인가요. 제가 백동준 검사님 덕분에 난생처음으

로 감옥 구경도 해 봤지 뭡니까? 거기서 험한 꼴도 당해 보고요.”

“어서 사과 못 드리겠나?”

대화의 중심에는 내가 서 있는데 자꾸 선우창과 허민회 사이에서만 말이 오가

는 뻘쭘한 상황이 이어졌다.

“아닙니다. 검사님이 공무 수행하다 보면 이런 일, 저런 일 다 있으신 법이

죠. 일단 저는 이렇게 멀쩡하게 석방돼 있으니 이걸로 됐습니다. 그나저나 검

사님이 제가 대표 이사 맡고 있는 휴림유업에 자꾸 법의 칼날을 들이대려고

하셔서 제가 요즘 걱정이 많습니다.”

허민회 얘, 감옥 갔다 오더니 많이 바뀌었네? 더이상 앞뒤 가리지 않고 내 멱

살을 잡으려고 들던 철부지가 아니었다.

이 자리에서 나를 압박하려면 선우창을 쥐고 흔들어야 한다는 것도 명확히 알

고 있었고, 이전처럼 자기 감정을 못 이겨서 광분하지도 않았다.

그래 봤자, 곧 다시 감옥에 들어가겠지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