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돌아온 원수 (2)
쯧-.
술잔을 비운 허규회가 혀를 한 번 튕기는 걸 보니 방금 마신 술이 적잖이 썼
나 보다. 그럴 만도 하지. 나만큼이나 허민회의 영원한 감옥 생활을 바랐던
사람이니까.
술잔을 내려놓은 허규회가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되물었다.
“다시 집어넣어요? 어떻게요? 우리나라는 3심제니까 2심에서 무죄 판결받았어
도 대법원에서 다시 유죄 인정되면 됩니까? 검사님이니까 그렇게도 하실 수
있으십니까?”
나도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고개를 가로저을 수밖에 없었다.
“아뇨. 그건 불가능합니다.”
“왜요?”
“대법원에서는 법리적 판단만 하고 사실관계는 다툴 수 없습니다. 2심에서 허
민회의 살인 교사 증거가 부족했다고 사실 판단을 했으면 그걸로 끝입니다.”
자기가 기대하던 대답이 아니었는지 허규회가 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럼 3심제는 왜 있는 겁니까?”
허규회야 그저 답답한 마음에 해 본 소리였겠지만, 법조인으로서는 뼈아픈 지
적일 수밖에 없었다. 냉정하게 말하면 우리나라에서 대부분 사건은 3심제가
아니라 2심제로 처리된다.
1심 재판 결과에 항소를 하면 2심이 심리 없이 기각되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이게 2심에서 3심을 맡는 대법원으로 갈 때는 완전히 반대로 나타난다.
대부분이 아무런 심리 없이 그저 상고한 지 오래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기각된
다. 변명을 들어보자면, 대법원이 그 사건을 모두 들여다보기에는 너무 바쁘
다나?
대법원에서 사실관계를 다투지 않게 돼 있는 것도 사실 이런 맥락이다. 그 높
은 양반들이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사실관계는 2심에서 확정한 게 맞다 치고
법리만 보겠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사정이 이러면 대법원 판사를 더 뽑아야 하겠건만, 그랬다가는 너
무 많은 판사가 각자의 판결을 내서 대법원 판례의 통일성이 떨어질 수도 있
다나?
같은 법조 직역에 있는 내가 봐도 엘리트 법률가들의 특권의식 때문에 헌법이
보장한 3심제를 실질적으로는 2심제로 운영하는 것으로밖에는 해석이 안 된다.
그렇다고 지금 허규회랑 이 사법 제도의 문제점에 대해 심도 있는 토론을 할
건 아니었기에 나는 원론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2심까지 오면서 법리를 오해한 게 있을 수도 있으니까 중요한 사건은 대법원
에서 한 번 더 살펴보겠다는 거죠. 살인 교사 같이 법리 보다는 사실 관계가
중요한 사건에서, 솔직히 말씀드리면, 3심은 의미가 거의 없습니다.”
피식-.
내 말에 술을 따라주던 허규회가 슬쩍 웃음을 지어 보였다.
“되게 태평하시네요? 사정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검사님이랑 아무 상관 없는
남의 일인 줄 알겠어요? 허민회한테 죽을 뻔했던 거 백동준 검사님 본인 아니
십니까?”
백번 맞는 말이다. 처음 공판 담당 선배 검사한테 허민회의 무죄 석방 소식을
들었을 때 너무 어이가 없고 기가 막히더라.
허민회가 진짜로 내 살인 교사를 저질렀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나로서는 2
심을 담당했던 울산고등법원에 쳐들어가서 깽판이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가 피해자가 됐는데 가해자가 무죄 선고받는 걸 직접 경험하고 나니, 법이
얼마나 불합리한지 외치던 사람들의 말도 새삼 이해되더라.
극단적인 생각도 했었다. 법이 허민회의 살인 교사죄를 처벌하지 않는다면 내
가 사적(私的) 복수에 나설까 하는.
돈은 허민회한테만 있는 게 아니다. 나도 킬러 하나 고용해서 허민회 배때지
포 뜰 정도는 갖고 있다.
휴우-.
검사로서 바람직한 일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런 생각에서 며칠 못 벗어났
다. 3심에서 판결이 뒤집히지 않을 거란 걸 잘 알고 있기에 허탈감은 더욱 심
했다.
그러다가, 쓰레기 처리하려고 내가 쓰레기가 될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더
라. 나는 돈 말고도 허민회한테는 없는 정말 많은 걸 갖고 있으니까.
회귀를 통해 얻은 미래 지식이 있고, 이 중에는 앞으로 HL 그룹에 터질 사건
사고가 잔뜩 포함돼 있다.
게다가 사람 마음을 꿰뚫어 볼 수도 있고, 무엇보다 수십 년을 갈고 닦은 법
지식까지 내 머릿속에 들어있다.
허민회랑 동급의 쓰레기가 돼서 인생을 망치기에는 너무 아까운 조건이었고,
그 녀석을 조질 방법이라면 얼마든지 더 찾아낼 수도 있었다.
그 생각이 구체화 됐던 건, 어제 허규회가 나를 만나자고 했을 때였다. 저 능
력에 허규회의 협조까지 얻을 수 있다면 허민회 재투옥 계획은 훨씬 빨라진다.
찬-.
나는 허규회와 잔을 부딪치며 작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말씀드렸잖습니까? 허민회 다시 감옥에 집어넣을 거라고요. 억울하지 않다고
는 말씀 못 드리겠는데, 그렇다고 태평하지 못할 것도 없습니다. 저는 자신
있으니까요.”
“그래요? 조금 전까지 대법원 가서 살인 교사 무죄 판결 뒤집는 건 안 된다고
말씀하셨는데 어떻게 자신 있는지 들어나 봅시다.”
허민회가 지은 죄는 살인 교사 하나가 아니다. 최수연을 상무 자리에 앉힌 일
로 배임 혐의가 인정됐고, 이건 집행유예를 같이 선고받았기에 이번에 출소가
가능했다.
그리고 집행유예는 절대 무죄 판결이 아니다. 그 기간에 같은 죄를 또 저지르
면 아무리 판사가 봐주려고 해도 얄짤 없이 감옥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하여 내가 세운 계획은 허규회를 이용해 허민회를 또다시 배임죄를 저지
를 만한 자리에 던져 놓자는 것이었다.
마침, 내 미래 기억 속에는 앞으로 1년 안에 경영진이 줄줄이 횡령 및 배임으
로 기소되는 HL 그룹의 계열사가 하나 있었다.
그 자리에 허민회를 앉혀 놓는다면? 경영진 기소에 허민회를 같이 묶을 수도
있거니와, 얘 성품상 이미 한껏 무르익은 분위기 속에서 분명히 회삿돈을 탐
하리라는 게 내 예상이었다.
“지금 휴림유업 허규회 사장님이 맡고 계시죠?”
휴림유업은 원래 HL 유업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가, 대기업이 서민 먹거리
인 우유 판매까지 장악한다는 비판을 피하려 은근슬쩍 이름만 바꾼 HL 그룹의
계열사이다.
내 물음에 허규회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대표 이사 맡은 계열사 중에는 제일 작은 곳이라 별 신경은 안 쓰
고 있는데, 명목상은 그렇습니다.”
“그 회사 대표 이사직 동생분한테 넘기시죠.”
“네? 제가 왜 그래야 하죠?”
어휴, 이제 이야기 시작인데 이렇게 발끈하는 걸 보니 허규회도 욕심은 무지
하게 많은가 보다.
하긴, 지금 나랑 만나고 있는 이유 자체가 HL 그룹 경영권 승계 경쟁에서 허
민회를 배제하려는 것이니 애초에 욕심 없길 바라는 게 무리였나?
나는 허규회의 자존심을 적당히 자극할 만한 단어를 골랐다.
“왜요? 허창수 회장님이 반대하십니까?”
“아버지는 그런 작은 회사 관심도 없으세요. 그냥 제가 넘기면 넘어가는 건
데, 지금 계열사 하나라도 제가 더 차지해야 될 판에 휴림유업을 민회한테 넘
기라는 이유가 뭔지나 들어봅시다.”
“휴림유업 지금 내부적으로 문제 무지하게 많은 거 모르십니까?”
계속해서 자존심을 쿡쿡 찔린 허규회가 다소 불쾌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저도 그런 작은 회사 별로 관심 없습니다. 실무는 부사장이 다 처리하고 있
고, 말씀드렸듯이 저는 계열사 하나라도 더 차지해야 해서 사장 자리에 이름
만 올려놓은 겁니다. 저희 회사에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여기서는 살짝 구라를 쳐야겠다. 휴림유업에 벼락이 떨어지리라는 건 미래 지
식을 통해 알고 있는 것이었지만, 허규회한테는 검사의 위엄을 보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휴림유업 본사가 HL 그룹 사옥에 있잖습니까? HL 그룹 사옥은 지금 제가 근
무하는 서울중앙지검 관할이고요. 지금 휴림유업에 조용히 수사 들어가 있는
건이 있습니다. 저희 검찰청에서는 내사라고 하죠. 제가 알기론 규모가 꽤 크
고요.”
이 정도 이야기하니 허규회도 슬슬 내 말을 알아먹는 눈치였다. 휴림유업을
괜히 들고 있다가 그 사건의 후폭풍을 자기가 뒤집어쓸 수도 있다.
“그러니까 검사님 말씀은, 그 사건 검찰에서 본격적으로 터뜨리기 전에 허민
회한테 넘기라는 겁니까?”
“맞습니다. 휴림유업 정도 되는 작은 규모 계열사는 어차피 경영권 승계에 별
영향도 없잖습니까?”
“생각해 보죠. 어차피 아버지도 민회한테 떼 줄 계열사 하나 고민하고 계신
것 같던데, 제가 선뜻 나서서 휴림유업 준다고 하면 그 뜻에도 맞을 것 같고요.”
* * *
그날 허규회와의 술자리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마무리되고 몇 주 지나
지 않아 휴림유업은 대표 이사 변경을 공시했다.
당연히 내가 말한 대로 허규회에서 허민회로 교체된 것이었다. 이제 휴림유업
에서 내가 알고 있는 사건이 터지기만을 기다리면 된다.
아직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내 미래 지식에 의하면 지금 휴림유업의 경영진은
자사 제품을 유통하는 대리점주들에게 한창 갑질을 벌이고 있다.
각 대리점별로 판매 할당량을 부여하고 그걸 못 채우면 공급하는 물건값을 올
려받는 아주 몹쓸 짓이다.
이렇게 되면 대리점주들은 비싸게 주고 물건을 사 왔으니 소매점에 싼값에 납
품하기가 어려워지고, 결과적으로는 할당량을 채우기가 점점 더 곤란해지는
악순환에 빠져든다.
여기서 상식적으로는 대리점주가 가맹 계약을 해지하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이걸 막는 장치는 또 따로 마련해 두었다.
가맹 계약 체결 당시 일종의 권리금이라고도 볼 수 있는 보증금을 1억씩이나
휴림유업에 맡겨 놓고, 대리점주의 일방적인 계약 해지 시 이 돈을 회사가 날
로 먹게 계약서를 썼다.
아무리 자본주의의 노예가 되었다고 해도 악마가 아닌 이상 어떻게 이렇게까
지 사람을 쥐어짤 생각을 해낼 수가 있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그렇다고 휴림유업의 경영진이 회사 또는 주주들의 이익을 위해서 이 짓을 하
고 있는 것도 아니다.
나중에 밝혀지는 바로는 할당량을 깎아주거나 면제해 주는 명목으로 임원 개
개인이 뒷돈을 받아 챙겼단다.
여기에서 새로 들어간 허민회가 뒷돈을 같이 챙겨 주면 나로서는 금상첨화고,
어벙하게 가만히만 있어 줘도 대표 이사로서의 관리 감독 소홀의 책임을 물을
수 있다.
이제 1년쯤 뒤에 이 사건이 수면 위로 올라오기만을 기다렸다가 허민회의 대
가리가 드러났을 때 후려치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사건은 내가 알던 것보다 훨씬 빨리, 그리고 훨씬 극적인 방식으로 터졌다.
허민회가 휴림유업 대표 이사가 된지 두 달이 채 안 된 오늘 아침에 아주 충
격적인 기사 제목이 떴더라.
- [속보] HL 그룹 본사 앞에서 휴림유업 대리점주 분신자살 시도
황급히 기사를 클릭해 보니 역시 본사의 갑질에 못 이긴 대리점주의 항의였
다. 다행히 분신을 시도한 대리점주의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는 내용에 안도의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내가 아는 휴림유업 사태는 대리점주들이 연합체를 결성하고 HL 그룹 앞에서
단체 시위를 벌이면서 세상에 알려진다.
그런데 갑자기 분신자살 시도라는 내가 전혀 모르는 사건이 튀어나왔다. 이건
결국 허민회가 기존 경영진들보다 훨씬 심한 갑질을 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상 사람 본성이 안 바뀐다더니, 혹시 휴림유업 대표 이
사가 된 허민회가 청렴 경영을 할지도 모른다는 내 생각은 완전 쓸데없는 걱
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