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 검사는 재벌을 사냥한다-35화 (35/51)

35화. 돌아온 원수 (1)

사실 처음 편지 봉투에 적힌 김휘한의 이름을 볼 때까지만 해도 별다른 생각

은 없었다. 그저 구치소에 들어가기 전 그토록 걱정하던 손녀딸의 안부나 묻

는 거겠지 하는 예상 정도.

이 문제는 연락이 끊겼다던 그의 아들을 찾아내 사비로 5천만 원을 건네면서

조카를 맡아 달라고 하는 것으로 잘 처리해 두었다.

보육시설에 맡길까도 고민했는데, 아무래도 김휘한의 했던 말을 생각해 봤을

때 손녀딸이 가족의 품에서 크길 바랐던 것 같았으니까.

며칠 전에도 김휘한의 아들이랑 통화했는데 조카는 학교 잘 다니고 있고, 내

가 준 돈으로 학원도 하나 보내는 중이라고 했다.

아버지랑은 사이가 서먹서먹해서 언제가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자기가 직접

면회 한번 가겠다는 약속도 받았다.

이 정도의 내용을 답장에 적어주면 되겠거니 하고 봉투를 뜯어 그 안의 편지

지를 보았는데, 그때부터 뭔가 심상치 않은 기색이 느껴졌다.

편지지가 잔뜩 울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만 보더라도 김휘한이 이 편지를 쓸

때 잔뜩 긴장해서 손에서 땀을 흘리고 있었을 것이라는 그림이 그려졌다.

그 내용 역시 첫 문장부터 불길한 느낌에 들어맞았다.

- 검사님 도와주십시오.

이미 자기 죄를 인정하고 감옥에 가기로 한 사람이니 죄를 사해달라는 의미는

아닌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뭘 도와달라는 걸까?

울산 구치소에서 내가 모르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게 분명하다는 생각을

하며, 얼른 다음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 백동준 검사님 말고는 도움 청할 곳이 도저히 떠오르지 않아 무거운 심정으

로 마음보다 더 무거운 펜을 듭니다. 제가 허민회랑 같은 구치소에 수감 돼

있다는 건 검사님도 잘 아실 겁니다. 그런데 허민회가 이 안에서 저를 죽이려

는 모략을 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게 무슨 소리야? 허민회 이 자식 감옥에 넣어 뒀더니 그 안에서 또 무슨 일

을 꾸미고 있다고?

- 제발 저를 다른 감옥으로 옮겨 주십시오. 제 잘못이 큰 건 알지만, 피해자

이신 검사님께서 용서해 주셨으니 이게 죽을죄는 아니지 않습니까? 교도관들

한테는 아무리 이야기해도 들은 척도 안 하고요, 허민회한테서 사주를 받은

같은 감옥에 있는 놈들은 제 목을 딸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결국, 김휘한이 이 편지를 쓴 내용은 반복해서 언급돼 있듯이 자기가 허민회

한테서 목숨의 위협을 받고 있다는 건데.

대체 왜? 살인 교사죄로 감옥에 들어가 있는 허민회가 또 살인 교사를 저지르

면 그 형량은 엄청나게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김휘한을 죽여야만 하는 사정이 있다면... 설마?

지금 내가 상상하고 있는 그거?

나는 다급한 마음에 얼른 울산 구치소로 전화를 걸었다.

뚜르릉, 뚜르릉-.

통화 연결음이 몇 번이나 지나갔는데도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고, 그 끝에는

듣고 싶지 않았던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삐 소리 후...

이런 젠장. 오늘은 화요일, 지금 시간은 오후 3시. 엄연히 국가 기관인 구치

소 역시 한창 업무에 매진하고 있을 시간인데 전화를 안 받는다고?

그때, 내 검사실 문이 벌컥 열리며 한 여자가 들어왔다. 서울중앙지검으로 오

면서 새로 배정받은 사무관 박진아였다.

서류 챙길 게 있어서 법무부에 보냈는데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나 보

다. 그런데 그녀의 표정에 그늘이 잔뜩 드리워져 있었다.

“검사님, 혹시 소식 들으셨어요?”

“네?”

“검사님 전에 계시던 곳이 울산지검 관할 성해지청이셨잖아요. 방금 법무부

청사 갔다가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혹시 검사님이랑도 관련돼 있는

게 아닌가 해서요.”

울산 구치소가 전화를 안 받는다. 법무부에는 울산지검과 관련된 안 좋은 뉴

스가 퍼지고 있다. 이 둘의 조합이 절대로 바람직한 결과로 나타날 것 같지는

않았다.

“뭔데요?”

“울산 구치소에서 폭동이 일어났대요. 그 과정에서 재소자 한 명이 사망했고,

또 한 명은 중태에 빠져서 지금 병원에 있는데 생사를 장담할 수 없나 봐요.”

“구치소에서 폭동이요? 그게 말이 돼요? 교도관들은 뭐 하고요?”

내가 연거푸 캐묻자 박진아 사무관이 당황한 듯 고개를 저었다.

“저도 법무부 직원분들이 급하게 나누는 대화 들은 거라 자세히는 몰라요. 그

런데 울산 구치소에 지금 수감돼 있는 사람들이면 검사님이 성해지청에 계실

때 수사하셨던 사람들일 것 같아서 얼른 알려드리려고 달려왔어요.”

끄응-.

그렇지. 지금 이 사건이 쭉 서울중앙지검에만 있던 박진아 사무관한테 캐물을

일은 아니었다.

“죽은 재소자랑 중태에 빠진 재소자 이름까지는 못 들으셨죠?”

“네. 그분들도 워낙 바쁘게 자기들끼리 말씀 나누시던 거라, 제가 끼어들어서

여쭤볼 상황은 못 됐어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나머지는 제가 알아볼게요.”

그러고 나서 후다닥 검사실을 나온 나는 성해지청에서 내가 수사한 허민회 살

인 교사의 2심 재판을 맡고 있는 공판 담당 검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 어, 동준아. 지금 난리 나서 너무 바쁜데 내일쯤 다시 통화하자.

“제가 그 일 때문에 전화 드린 건데요, 울산 구치소에서 폭동이 일어났다면서

요? 한 사람은 이미 죽었고, 또 한 사람은 생명이 위태롭다고 들었어요.”

끄으응-.

핸드폰 너머로 조금 전 내가 흘렸던 신음보다 훨씬 고통스러워하는 소리가 들

려왔다.

- 아는구나. 그래, 뭐. 기왕 이렇게 된 거 너랑 너무 밀접하게 관련된 일이니

까 얘기를 해 주자면, 어이없게도 이미 죽거나 죽을 것 같은 사람 둘 다 네

살인 미수 사건 용의자들이야. 너 직접 찔렀던 김휘한은 이미 죽었고, 중간에

교사 지시 전달했던 박재철은 의사 소견상 오래 못 버틸 것 같단다.

“저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데 어떻게 교도관들이 있는 교도소에서 그것도

대낮에 폭동이 일어날 수가 있고, 심지어 사람이 죽어 나가죠?”

- 나도 그게 어이가 없는데, 정확히 말하면 폭동이라기보다 재소자들끼리 다

툼을 벌인 거고, 그 시간에 근무 서고 있어야 할 교도관들은 다 같이 모여서

낮술 파티를 벌이고 있었다더라.

이쯤 되면 이걸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술 파티랑 재소자들 사이의 다툼, 혹시 허민회가 주도한 거예요?”

- 나도 그렇게밖에 생각이 안 되네. 그 술 파티에 무슨 100년 넘은 양주까지

들어갔다는데, 그렇게 돈 쓸 곳 울산에서 HL 그룹밖에 없고 목숨 위협당한 사

람 둘 다 딱 허민회 유죄랑 밀접하게 관련된 증인들이잖아?

“심증 말고, 허민회나 HL 그룹이 이 사태를 일으켰다는 구체적인 증인이나 물

증 나왔나요?”

휴우우-.

이번에는 핸드폰 너머의 선배 검사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지금 사건 일어난 지 3시간도 안 됐어. 네가 얼마나 당황스럽고 초조할지는

나도 짐작 안 되는 거 아닌데, 너도 검사면 알잖아. 증거라는 게 그렇게 빨리

나올 수가 없다는 거. 그리고 이건 조금 미안한 이야기인데, 앞으로도 그 증

거 찾을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조금만 더 자세히 이야기해 주세요.”

- 이것도 결국 심증이긴 한데, 울산 구치소 전체가 HL 그룹한테 매수된 것 같

아. 교도관들이야 술까지 얻어먹었으니 당연한 것 같고, 재소자들도 딱 입 맞

춘 것처럼 누가 시켜서 한 거 아니고 그냥 자기들끼리 파벌 싸움이었다고만

진술하고 있어.

여기까지 이야기를 듣고 나니 머릿속에 스쳐 가는 장면이 있었다. 지난번에

허민회의 형 허규회를 만났을 때 들었던 이야기였다.

허창수 회장이 직접 나서서 허민회를 빼낼 방법을 궁리 중이라고 했었다. 대

한민국 재계 서열 1인자라고도 볼 수 있는 그가 나섰다면 이 정도 규모로 일

을 벌이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

“바쁘신데 사정 설명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 그래. 네가 피해자인 사건인데 일이 이상하게 되고 있는 것 같아서 미안하

고, 허민회 2심 공판도 최악의 경우까지 생각해야 될 것 같다.

“각오하고 있겠습니다.”

그리고 약 한 달이 더 지났을 때 그 선배 검사가 말했던 최악의 2심 결과가

기어이 나오고야 말았다.

죽은 자는 말을 할 수 없다. 이건 폭동 당시에 죽은 김휘한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 결국 병원에서 숨을 거둔 박재철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살아 있는 사람은 죽은 자의 말을 대신해 줄 수 있다.

허민회의 2심 재판에 당시 울산 구치소에 있던 재소자들이 대거 증인으로 출

두했다.

그리고 그들이 한 진술은 너무나 기가 막혔다.

- 김휘한 할아버지한테 들었는데요, 사실은 허민회 사장이 시켜서 그 검사 찌

른 거 아니래요. 같은 구치소에 있던 박재철이 시킨 건 맞는데, 자기는 허민

회 사장 얼굴 본 적도 없대요.

- 저도 같은 방 쓰면서 똑같은 얘기 들었어요. 실제로 시킨 건 박재철이고 그

검사가 뭐 돈도 좀 준다고 허민회가 시켰다고 하라고 했다던데, 높으신 분들

무슨 사정인지까지는 모르겠고 제가 들은 건 그렇습니다.

- 저는 허민회 사장 비서였다던 박재철이랑 같은 방 썼는데요, 되게 자랑스럽

게 입버릇처럼 하던 얘기가 있었어요. 허민회 사장이 갑질해 대니까 자기가

물귀신 작전으로 끌고 들어온 거라고요. 그렇게 말하면 자기가 대단한 사람처

럼 보일 줄 알았나 본데, 그 바람에 깜방 안에서 허민회 사장 추종하던 사람

들한테 미운털이 단단히 박혔죠.

심지어 입을 맞춘 건 재소자들만이 아니었다. 당시 술 마시느라 폭동 진압도

못 했다던 교도관의 진술은 이러했다.

- 아무래도 허민회 사장이 사회적 지위도 있고 그래서 구치소 내에서 범털이

었거든요. 영치금도 워낙 잘 쓰고 교도관들도 그 사람 앞에서는 조심하고 그

러니까 재소자들 중에서도 따르는 사람들이 꽤 됐고요. 그런데 김휘한이랑 박

재철이 대놓고 허민회 사장 엿 먹인 걸 자랑하니까 폭동 당시에 주요 타겟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진술이 이렇게 나오니 허민회의 살인 교사를 입증할 가장 중요한 물증이었던

박재철의 수첩에 기록됐던 업무 지시도 재판정에서 증거로 인정받지 못했다.

애초에 허민회에게 살인 교사 혐의가 씌워진 건 박재철과 김휘한, 그리고 내

가 짠 시나리오라는 궤변에 따라 그 메모 역시 박재철이 조작한 것이 되어 버

렸기 때문이다.

* * *

지금 나는 침통한 심정으로 허규회와의 두 번째 술자리에 나와 있다. 그 역시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내게 술을 따라주었다.

“허민회 그 자식 결국 2심에서 증거불충분으로 무죄 받고 오늘 출소해서 서울

로 올라왔습니다. 뭐, 얘기 들어보니 아버지도 따로 뵌 것 같고요. 허민회가

사회 공기 마실 일 없다고 하셨던 검사님이 틀리셨습니다?”

“법리적으로는 그랬는데, 이렇게 사실관계가 뒤집혀 버리면 어쩔 수가 없죠.

오히려 제가 묻고 싶네요. 이 일 HL 그룹이나 허창수 회장님이 기획하신 겁니

까?”

“확실히 제가 한 건 아니고요, 아마 그렇지 않겠습니까? 아버지 정도 힘이면

그깟 재판 하나 뒤집는 거 일도 아니시죠. 앞으로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나는 허규회가 내미는 잔에 건배한 뒤 대답을 이었다.

“다시 집어넣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허규회 사장님도 그러려고 저 부르신 거

아니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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