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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 검사는 재벌을 사냥한다-33화 (33/51)

33화. 코인 탑승 (1)

흐읍-.

얄짤없는 내 반박에 BJ 초향은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 그래서 죄송하다고 했던 건데, 네. qk제 잘못이네요. 그런 제안 처음부터

받지 말았어야 했었어요. 몇십억 단위 돈이 진짜로 주머니에 들어온다고 생각

하니까 제가 정신을 못 차렸던 것 같습니다.

“이제는 정신 차리셨고요?”

- 조금은요. 처음부터 제 돈이 아니었던 거지, 따지고 보면 검사님 탓으로 그

돈 못 받은 게 아니네요.

이 당연한 말을 들으려고 참 먼 길을 돌아왔다. 애초에 HL 그룹은 나를 골로

보낼 생각뿐이었지 아메리카 TV의 사업성을 알아본 게 아니었으니까.

통화 시작에도 말했듯 내가 입건한 피의자와 사적인 이야기를 길게 하기는 부

적절하니 적당히 달래주고 마무리 지어야겠다.

“늦게라도 아셔서 다행이네요. 아직도 돈 많이 벌고 싶으세요?”

- 네? 그건 차마 아니라고 못 하겠네요.

“그럼 아버지랑 같이 아메리카 TV 열심히 운영하세요. 제가 그 회사 콜옵션을

괜히 가져온 게 아니란 거 명심하시면서요.”

화제가 전환되면서 핸드폰 너머로 들리던 BJ 초향의 훌쩍임도 조금씩 잦아들

었다.

- 콜옵션이면, 제가 갖고 있는 지분 나중에 사 가시겠다는 그 계약이요?

“네. 이건 초향님이 더 잘 아시겠지만, 요즘 인터넷에서 저 주식의 신이라고

불린다면서요? 그런 제가 그 회사 주식을 사기로 했을 때는 이유가 있는 겁니

다.”

- 정말 저희 회사가 그렇게 성장할 수 있을까요? 그냥 아무나 나와서 자기 하

고 싶은 말 떠드는 곳인데요.

지금이야 1인 미디어라는 개념이 거의 없다시피 한 시대이니 저렇게밖에 안

보이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

“회사를 못 믿으시겠으면, 그 회사에 투자하기로 한 저를 믿으세요.”

- 네. 열심히 해 볼게요. 그런데 검사님.

“네.”

아주아주 어려운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듯 BJ 초향이 밥 지을 때보다 더 오래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 이제 죄송하다는 말씀드리는 것도 죄송한데요 그래도 정말 죄송하지만, 저

랑 저희 아빠까지 다 입건됐잖아요. 그럼 앞으로 회사 운영을 해 나갈 수 있

을까요?

오? 이거 내가 언제 어떻게 꺼내야 하나 각 재고 있던 이야기인데 저쪽에서

먼저 물어봐 주네?

이러면 검사와 피의자가 아니라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의 대화가 되니 이 통화

를 조금 더 길게 가져가도 괜찮겠다.

입질이 왔으니 낚싯줄을 천천히 감아 볼까나? 나는 반가움을 숨긴 채 나는 1

도 아쉬울 게 없다는 투로 되물었다.

“실형을 받게 되시면 감옥에 계셔야 하니까 실질적으로 정상적인 운영은 불가

능하겠죠?”

- 제가 드리려던 말씀이 그건데요, 그럼 검사님이 가져가기로 하신 콜옵션?

그것도 무용지물이 되는 게 아닌가 해서요.

“실형이 아니라 집행유예나 벌금형을 꼭 받으셔야겠네요.”

꿀꺽-.

얼마나 긴장했는지 도저히 여 BJ 입에서 나올 것 같지 않은 침 삼키는 소리까

지 낸 BJ 초향이 본론을 꺼냈다.

- 가해자가 피해자한테 이런 거 묻기 정말 민망한데요, 그래도 제가 유일하게

아는 법조인이셔서, 혹시 감형받아서 징역 피할 방법이 있을까요?

“변호사 선임하시면 친절하게 상담해 줄 텐데요, 법적으로는 같이 입건된 HL

그룹 마규환 씨한테 덮어씌우시면 됩니다. 사실이 그렇기도 한데, 그쪽에서

돈 주겠다고 회유해서 벌이신 일이잖아요?”

- 아! 그럼 저랑 저희 아빠는 징역까지는 안 살 수도 있는 걸까요?

그런 일 벌여놓고 감옥 가기는 되게 싫었나 보네. 뭐, 나한테는 좋은 신호다.

저 싫은 마음이 클수록 내가 원하는 걸 얻기도 수월해지니까.

“형량이야 판사가 때리는 거라 제가 장담할 수는 없는데요, 그렇게 대응하시

면서 피해자의 처벌불원서까지 있으면 실형이 나올 가능성은 매우 적습니다.”

- 네? 제가 잘 못 알아들었어요. 처벌불, 그다음에 뭐라고 하셨나요?

“처벌불원서요. 흔히 하는 말로는 피해자랑 합의한다고 하죠.”

끄응-.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조금씩 알아들은 초향이 자기도 잔뜩 찔렸는지 잠

시 신음을 흘린 뒤에야 말을 이어나갔다.

- 피해자랑 합의면, 저랑 저희 아빠가 검사님이랑 해야 하는 거죠?

“그렇죠.”

- 제가 정말 반성은 많이 하고 있는데요, 저희 아빠도 아마 마찬가지이실 거

고요. 혹시 어떻게 해야 합의할 수 있을까요? 합의금을 드릴 수 있다고는 알

고 있는데 돈이 그렇게 많으신 검사님이 만족하실만한 액수를 저희가 마련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요.

이쯤이면 고기가 수면 위로 올라왔으니 뜰채에 담을 차례다.

“사과 방송은 초향님이 먼저 하겠다고 하셨으니 그 약속은 지키셨으면 좋겠고

요.”

- 네. 당연하죠. 지금 당장이라도 라이브 방송 켤 수 있어요.

“지금은 감정 많이 격해져 계신 것 같으니까 내일쯤 하셔도 됩니다.”

내가 언뜻 합의 의사를 내비치자 초향 역시 반색했다.

- 합의금은 얼마 정도 드리면 될까요? 최대한 마련해 볼게요.

“현금으로 받을 생각은 없습니다.”

- 그럼요?

영차. 이제 뜰채에 고기도 안전하게 들어왔고, 슬슬 대어를 들어 올려 볼까나?

“제가 받기로 한 콜옵션 지분을 늘리죠. 아메리카 TV 지분, 초향님은 11%만

갖고 계시다고 하셨지만, 아버님은 다르시겠죠? 제가 6년 안에 행사할 수 있

는 콜옵션 비율, HL 그룹에 넘기기로 했던 지분율만큼 주세요. 51%.”

- 그 콜옵션을 드리면 합의해 주신다는 거죠?

“네. 맞습니다. 그렇게 해서 실형 면하시고 앞으로 6년 동안 회사 열심히 성

장시키시면 저랑 초향님, 그리고 아버님까지 다 윈윈이네요.”

지금까지 했던 대화 내용이 정리되자 BJ 초향이 한 박자 쉬었다가 다시 물었다.

- 제가 이해한 게 맞으면, 아빠한테도 물어봐야 할 것 같은데요, 내일 사과

방송 하고 나서 다시 연락드려도 될까요?

“네. 그러셔도 괜찮습니다.”

다음 날, BJ 초향은 약속대로 라이브 사과 방송을 진행했고, 그 영상은 무편

집으로 너튜브에도 올라갔다.

그리고 그 직후에 나한테 문자메시지가 도착했다.

- 아빠랑 말씀 나눴는데, 검사님이 요청하신 대로 합의금 대신 콜옵션 51% 드

리기로 했어요. 아빠가 콜옵션 계약서 사인할 겸 검사님 한 번 더 뵙고 싶다

고 하시네요.

- 다행입니다. 아버님 뵐 때 합의서는 제가 작성해서 가겠습니다.

오케이. 이걸로 내 첫 번째 기업사냥이 완료됐다. 이제 5년 뒤에 아메리카 TV

지분을 팔아서 5천억을 챙기는 행복한 상상을 하는데 BJ 초향의 문자가 이어

졌다.

- 그리고 아빠랑 이야기하면서 성폭행당한 여자로 만들어서 미안하다는 사과

도 해 주셨어요. 들어 보니까 검사님이 지적해 주셨다고 하더라고요. 감사합

니다.

최동걸 씨, 내 앞에서는 그렇게 길길이 날뛰더니 막상 눈앞의 돈이 사라지고

나니까 딸이랑 똑같이 정신이 번쩍 들었나 보다.

저게 맞지. 아무리 돈이 좋아도 자기 딸이 성폭행당했다는 가짜 뉴스를 퍼뜨

리는 게 어디 사람이 할 짓인가?

- 잘됐네요.

다른 사람을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에 나와 있어서, 일부러 단답으로 문자를

끝내려고 했는데 BJ 초향이 또 하나를 보냈다. 이게 웬 때아닌 고백이람?

- 제 사과 방송 보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방송에서 이 말을 할까 말까 고

민을 100번도 더 하다가 결국 못 했어요. 정신 차리고 나서 곰곰이 생각해 보

니까, 제가 검사님이랑 자고 싶었더라고요. 저 지금 너무 민망하니까 답장 나

중에 해 주세요.

푸핫-.

그러니까 내가 해명을 늦춰 주면 잠자리를 가져 주겠다고 술 마시고 했던 말

의 진심은, 자기가 나랑 자고 싶었던 거라고?

HL 그룹이랑 마규환이 중간에서 그 난리를 안 피웠으면 BJ 초향이랑 나, 좋은

인연이 됐을지도 모르겠네.

그렇다고 내가 이제와서 얘랑 파트너 관계라도 가질 생각은 절대로 없고, 그

저 앞으로 대주주가 될 회사의 직원일 뿐이다.

앞으로 방송도 접을 거라고 했으니 또 합방할 일도 없을 테고, BJ 초향이랑의

관계는 딱 여기까지.

* * *

퇴근한 내가 한 레스토랑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같은 검찰 소속이지만,

하는 일은 많이 다른 대학 후배 여세린이었다.

사실은 성해에서 서울로 올라오자마자 착수하려고 했던 일인데, BJ 초향 사건

으로 조금 늦춰진 일에 본격적으로 돌입하기 위해서이다.

저번에 여세린을 만나서 IT 사업하는 친구들 이야기와 함께 나누었던 대화이

다. 회귀한 나보다도 젊은 애가 한숨을 푹푹 쉬어가면서 신세 한탄을 하더라.

“휴. 나도 공무원 그만하고 사업하고 싶다. 이건 뭐, 재미도 없고, 월급도 적

고.”

“왜? 공무원 짤릴 일도 없고, 때만 되면 호봉도 올라가고, 은퇴하면 연금도

나오고, 좋잖아?”

“그건 오빠 같은 성골 공무원 이야기고. 나는 1두품도 못 되는 일반임기제잖아.”

이 얘기 딱 듣는데 내가 염장을 제대로 질렀구나 싶더라. 일반임기제 공무원

은 보통 해커 여세린처럼 특정 분야의 전문가를 채용하는데, 이게 흔히 생각

하는 공무원이랑은 많이 다르다.

‘임기제’라는 이름답게 정년이 보장되는 게 아니라, 정해진 임기(보통 5년)가

지나면 해직되고 계속 일하고 싶다면 다시 처음부터 채용절차를 거쳐야 한다.

당연히 호봉 누적도 이루어지지 않고, 한 번 임기가 끝나고 재임용될 때마다

오히려 처음 호봉으로 돌아가서 경력은 쌓였는데 오히려 월급이 깎이는 기현

상까지 벌어진다.

심지어 회귀한 이 시점을 기준으로 공무원 연금에도 가입이 안 된다. 일반임

기제를 사기업이랑 비교하자면, 공무원 계의 비정규직이라고나 할까?

그러니 내가 여세린한테 철밥통, 호봉 누석, 연금 이 세 가지를 동시에 언급

했을 때 뺨 안 맞은 게 정말 다행일 정도다.

잠시 후, 불쌍한 여세린이 초췌해진 얼굴로 레스토랑에 들어와 내 앞에 앉았다.

“오빠, 미안. 내가 많이 늦었지? 일 다 끝내고 퇴근하려는데 누가 붙잡고 하

나만 빨리 처리해 달라고 해서.”

“괜찮아. 다 우리 검찰을 위해서 일하는 건데, 뭐.”

“그거 정말 지긋지긋하다. 내가 언제 짤릴지도 모르는 검찰을 위해서 왜 이렇

게 눈 빠지고 뼈 빠지게 일해야 되는 건지 모르겠어. 요즘 현타 완전 작렬.”

그러고서 여세린은 일이 정말 힘들었는지 미리 나와 있던 물을 벌컥벌컥 들이

켰다.

“아직도 공무원 그만두고 사업하고 싶어?”

“그럼? 당연하지. 나 검찰청 들어간 거 부모님이 하도 공무원하라고 해서 그

런 거라니까? 이제 나도 검찰 위해서 말고 나를 위해서 일하고 싶어.”

그러고 보면 여세린은 대학 때부터 상당히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한 번은 컴퓨터공학과 전공 수업에서 교수님이 자기 컴퓨터를 해킹하면 A+를

주겠다는 농담을 했다고 한다.

동아리방에 와서 해킹 실력은 자기가 그 교수보다 낫다던 여세린은 정말 그

일을 해 버렸고, 결국 그 수업의 나머지는 출석도 하지 않은 채로 진짜 A+를

받아냈다.

이런 애가 경직된 공무원 조직 중에서도 딱딱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검

찰청에 있으니 좀이 쑤셔 못 견디는 것도 충분히 이해된다.

“그럼 나랑 진짜 사업 한번 해 볼래?”

“뭐야? 큰 사업 얘기하자고 보자더니, 그 사업이 진짜 돈 버는 사업이었어?

뭔데? 말해 봐. 나 벌써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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