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나도 칠 줄 아는 뒤통수 (2)
사실 BJ 초향이 방금 포워딩해 준 이메일 자체에는 별다른 내용이 없었다.
- 저희쪽에서 작성한 원고 전달드립니다. 이걸 어떻게 활용하셔야 하는지는
아버님께 말씀 들으셨을 것으로 압니다.
이게 끝이었다. 그리고 첨부파일에는 오늘 내가 본 충격적인 영상에서 BJ 초
향이 읽었던 그 내용이 담긴 문서가 있을 뿐이었다.
내가 잠시 이메일을 검토하는 사이 핸드폰 너머의 BJ 초향이 초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 이메일 받으셨죠? 수신확인은 된 거로 나오는데요.
“네. 잘 받았습니다.”
- 그럼 그 저희 아메리카 TV 인수 계약 체결되고 투자금 입금될 때까지 검사
님은 언론에 아무 말씀 안 해 주시는 거 맞죠? 조금 전에 저희가 동의한 계약
서에도 그렇게 쓰여 있었잖아요. 네?
이렇게 재촉해대는 걸 보니 심적으로 무지하게 쪼들리나 보다.
“네. 맞습니다.”
다시 한 번, 휴-.
BJ 초향이 깊은 안도의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 제가 검사님한테 몹쓸짓한 거 아는데 정말 감사드려요. 저 이걸로 BJ 은퇴
는 확실히 할 거고요, 이번 인수만 제대로 처리되면 어떤 식으로든 검사님께
보답할게요.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내가 75억 원 들여서 아메리카 TV 인수해 주는 줄 알겠
네. 솔직히 BJ 초향이 은퇴를 하든 말든 내 관심 밖이다.
내 미래 기억에 비추어 봐도 BJ 초향은 1세대에만 흥했을 뿐 이후 아메리카
TV에서 대 BJ 시대를 이끌어가는 건 다른 사람들이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BJ 초향이 나한테 보답할 일? 절대 없을 거다. 왜냐면 그토
록 소망하는 HL 그룹의 아메리카 TV 인수 내가 빠그라뜨릴 거니까.
“이 통화 전에도 많이 마시신 것 같은데 자세한 이야기는 술 깨고 천천히 나
누시죠.”
- 네. 그렇게 할게요. 정말 다 감사하고 죄송해요. 그 영상도 그렇고 술 마시
고 전화한 거 받아 주신 것도 그렇고, 전부 다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그럼 다음에 뵙죠.”
BJ 초향과의 통화를 마친 나는 포워딩받은 이메일을 한 번 더 확인해 보았다.
그리고 거기에는 내가 원했던 정보가 명확히 찍혀 있었다.
내용이나 첨부파일이 아닌 발신자란에.
- 마규환<[email protected]>
나로서는 잊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 내가 회귀 전에 조사해서 리스트업해 두
었던 HL 그룹 허 씨 가문의 여러 칼잡이 중 한 명이었으니까.
내가 구태여 BJ 초향한테서 내용이 뻔한 이 이메일을 포워딩받으려고 했던
건, 이 칼잡이를 캐기 위해서였다.
시간이 지나 월요일 아침이 밝았고, 나는 출근하자마자 압수영장을 하나 쳤
다. 마규환이 주고받은 이메일을 열람하기 위함이었다.
포워딩 받은 이메일과 아직도 BJ 초향이 너튜브에 올려둔 영상 덕분이 무고죄
의 범죄 사실은 손쉽게 소명되었고, 영장 역시 즉각 발부되었다.
이 영장을 들고 데이버 본사에 쳐들어간 나는 마규환이 그간 아메리카 TV 인
수 작업을 벌이며 BJ 초향의 아버지인 최동걸과 나눈 이메일 기록 역시 간단
히 확보할 수 있었다.
* * *
아메리카 TV의 사장 최동걸은 지금 아주 난감한 상황에 처해 있다. 백동준 검
사가 아메리카 TV 사무실로 찾아오면서 생긴 일이었다.
처음에 그의 이름을 들었을 때만 하더라도 이번 인수 건에 희생양이 되 줄 사
람이니 선심 삼아 한 번 만나는 주자는 생각이었다.
이미 성폭행범으로 낙인 찍힌 검사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냐는 나름의
자신감도 있었다. 그런데 백동준은 최동걸의 사무실에 들어와 인사를 마치자
마자 날선 질문을 쏟아냈다.
“HL 그룹에 회사를 넘기기로 하셨다면서요?”
“그렇습니다만, 사기업간의 인수합병 문제에도 검찰이 관여합니까?”
“그 인수합병 과정에 불법 행위가 개입돼 있다면 당연히 관여해야죠.”
자신은 이미 모든 걸 알고 왔다는 듯 몰아붙이는 백동준의 거침 없는 태도에
최동걸은 한 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무슨 불법 행위가 있었다는 말씀이십니까?”
“따님이신 BJ 초향, 본명으로는 최향기 씨가 저를 성폭행범으로 음해하는 대
가로 그 인수 대금을 받기로 하신 거라면서요?”
“이 사람이! 검사면 답니까? 증거 있어요?”
그러자 백동준이 기다렸다는 듯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최동걸의 앞에 주르륵
펼쳐 놓았다.
“법원에서 정식으로 압수 영장 받아서 확보한 자료고요, 최동걸 씨가 HL 그룹
전무 이사로 있는 마규환 씨와 나눈 이메일 기록입니다. 여기, 저를 음해해
달라는 청탁이 있네요? 그리고 이걸 전제로 HL 그룹이 아메리카 TV를 인수하
겠다는 말도 있고요.”
“이, 이게 대체 어떻게...?”
“상대를 잘 보고 덤비셨어야죠. 저는 생각보다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현직 검
사입니다. 이깟 놀음에 놀아나지 않을 정도로 법도 잘 알고요.”
급기야 최동걸은 물러서다 못 해 몸을 웅크린 채 숨을 구석을 찾는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그 잘나신 검사님께서 법으로 저를 어떻게 해 보시겠다고요?”
그 물음에 백동준은 불쌍하다는 듯 최동걸을 빤히 바라보며 한 박자를 쉬었다
가 대답을 이었다.
“법을 말씀드리기 전에, 인간적으로 사과하실 생각 없으십니까?”
“사과요? 제가요? 누구한테요?”
“일단 저한테 사과하셔야 할 것 같고요, 그보다 앞서서 따님한테 미안한 마음
없으신지 여쭙고 싶습니다만.”
뜻밖에 언급된 BJ 초향의 이야기에 최동걸이 눈을 몇 번 꿈벅였다.
“저희 향기한테요? 제가 왜요?”
최동걸을 바라보던 백동준이 이 인간은 정말 인간으로 못 봐주겠다는 것처럼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거 같이 보시죠.”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낸 백동준은 BJ 초향의 너튜브 영상을 틀었다.
- (...) 한 여성으로서 무릎꿇지 않는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
“이게 뭐 어쨌다고요?”
“저도 BJ 초향님 영상 여러편 봤고 같이 방송도 했습니다만, 한 번도 자신의
여성성을 무기로 삼은 적은 없었습니다. 그런 따님이 강요에 못 이겨 자신의
여성성을 팔고 있습니다. 한 여성으로서 무릎꿇지 않겠다는 게 반어법처럼 들
리지 않으십니까?”
그제야 백동준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눈치 챈 최동걸의 눈빛이 급격하게
흔들렸다.
“저희 집안 일입니다!”
그 항변을 무시한 채 백동준은 계속해서 최동걸을 압박해 들어갔다.
“저랑 따님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건 최동걸 사장님께서 가장 잘 아실
겁니다. 그렇다면 최향기 씨는 대체 어떤 남자한테 무릎을 꿇은 거겠습니까?
아버지인 당신? 아니면 당신한테 75억을 주겠다며 딸의 여성성을 팔라고 요구
했던 마규환 씨? 제 생각엔 둘 다 같네요. 이래도 따님한테 사과하실 생각 없
으십니까?”
“그건 제가 딸 아이랑 알아서 하겠습니다. 제발 돌아가 주세요. 오늘 저녁에
HL 그룹이랑 인수 계약서 사인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그 일 끝나면 사과를 하
든 도리어 제가 무릎을 꿇든 알아서 하겠습니다. 검사님께서 더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면 그 다음에 뵈면 안 되겠습니까?”
“결국 75억 원에 딸을 파시겠다는 의사에는 변함이 없으신가 보군요. 당신이
아버지입니까? 그 전에 인간입니까?”
도저히 숨을 곳도 빠져나갈 구석도 보이지 않자 최동걸은 소리를 빽 지르고
말았다.
“돌아가 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경찰 불러서 법적으로 해결하
겠습니다.”
“법이요? 그 이야기도 해야죠. 오늘 저녁에 인수 계약서 사인하시기로 돼 있
으시다고 하셨는데, 그거 어차피 무효인 계약입니다.”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것만은 안 됩니다.”
최동걸의 절박한 외침에도 백동준은 법조인의 면모를 가감없이 펼쳐 보였다.
“그 계약의 전제조건으로 저를 성폭행범으로 음해하셨다는 증거는 여기 이미
다 나와 있습니다. 계약 조건에 불법행위가 포함돼 있으면 그 계약은 아무리
상호 동의가 이루어졌더라도 민법상 강행 규정에 따라 원칙적으로 무효가 됩
니다. 오늘 저녁에 사인하셔도 소용 없다는 뜻입니다.”
털썩-.
결국, 최동걸은 자신의 앉아있던 자신의 사무실 소파에서 내려와 백동준의 앞
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검사님 제발 한 번만 못 본 척 눈감아 주십시오. 이 자료만 없는 셈 치면 되
는 거 아니겠습니까? 저희 이렇게 합시다. 75억 중에 절반, 검사님께 드리겠
습니다. 이 정도면 적은 돈 아니잖습니까? 검사님 여생 편안히 즐기실 수도
있는 금액입니다.”
회귀한 나이 기준으로 아직 서른도 안 됐는데 여생을 즐기라니. 백동준으로서
는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게다가 백동준이 바라보고 있는 돈은 적게는 수천억 원, 많게는 수십 조에 이
르는데 지금 통장에도 있는 삼십몇억 갖고 사건을 덮어 달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현직 공무원을 매수하시겠다는 건가요? 그 역시 범죄입니다. 방금 하신
말씀은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저는 인간적으로든 법적으로든 드릴 말씀
마쳤으니 아까 요청하신 대로 이만 돌아가보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저녁 사인
은 아마 못 하실 겁니다. 그 시간에 마규환 씨 소환 조사 일정 잡혀 있거든요.”
“검사님!”
최동걸의 절규에도 백동준은 아메리카 TV 사무실을 나서서 검찰청으로 돌아갔다.
* * *
검찰청으로 돌아온 나는 압수한 자료를 바탕으로 즉각 BJ 초향을 무고죄, 최
동걸과 마규환을 무고 교사죄로 입건했다.
그리고 최동걸에게 통보했던 대로 그날 저녁 이 사건의 주동자라고 할 수 있
는 마규환의 소환 조사를 마쳤다.
그러고 나서 집에 돌아왔을 때였다. 어째 술 안 마시면 대화가 잘 안 되는 병
에 걸린 것 같은 그녀가 또 전화를 걸어왔다.
- 검사님. 초향이에요.
“네. 찍힌 번호 보고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최향기 씨 입건한 담당 검사라
사적인 통화가 길어지면 안 좋을 것 같은데요, 용건만 짧게 말씀하시죠.”
- 그럼 저 조사실에서라도 곧 검사님 뵐 수 있는 건가요?
일이 이렇게까지 된 마당에 나를 왜 보고 싶어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긍정의
대답은 해 줄 수가 없었다.
“아뇨. 무고 피해자이기도 한 제가 계속 사건 담당하는 게 적절하지는 않아서
내일 재배당 요청할 겁니다. 소환 통지서는 발송될 거고요, 그때 출석하시면
다른 검사님 뵙게 되실 겁니다.”
- 그러면요! 저 이거 하나만 여쭤볼게요.
“네. 말씀하세요.”
- Hl 그룹에서 결국 인수 계약 체결 안 하겠대요. 검사님이 이 사건 입건하셔
서요. 저랑 약속하셨잖아요. 계약 체결될 때까지는 도와주시겠다고요. 저희가
쓴 계약서도 있는데 꼭 그러셔야 했어요?
이건 뭐, 거의 울 기세네. 술 마시고 전화하는 것까지는 괜찮아도 거기서 울
기까지 하면 여자 진짜 별론데.
“저희가 쓴 계약서 잘 보십시오. 제가 언론에 나서서 해명 안 하겠다고 했지,
어디에 검찰로서 범죄 수사까지 소홀히하겠다는 내용이 있습니까?”
- 그게 인수 계약 체결되게 도와주신다는 뜻 아니셨냐고요! 법 잘 아신다고
이런 식으로 뒤통수 치셔도 되는 거예요?
“뒤통수요? 그거 누가 먼저 쳤는지 잘 생각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