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나도 칠 줄 아는 뒤통수 (1)
빡치는 일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나는 BJ 초향에게 잠자리를 요구한 적
이 없다고 항변을 할 채널이 모두 막혀 있었던 것이다.
일부러 이걸 노린 건지, 가짜 폭로 영상의 댓글 창은 닫혀 있었고 BJ 초향의
아메리카 TV 채널 계정도 이미 폐쇄된 지 오래였다.
그 와중에 영상은 인터넷 커뮤니티와 SNS 공유를 통해 일파만파로 퍼져 나갔
으니 나 하나 바보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지이잉, 징징징-.
그날 밤이었다. 핸드폰에 다시 웃는 얼굴로 대할 일은 없을 줄 알았던 번호가
찍히며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여보세요.”
- 히꾹, 딸꾹. 검사님. 안녕... 하시냐고 물으시면 제가 이상한 년이죠?
어느새 술 마시고 하는 딸꾹질이 시그니처 사운드가 되어 버린 것 같은 BJ 초
향이었다. 자기가 사고 쳐 놓고 마음이 쓰렸는지 어제에 이어 또 마셨나 보다.
“안녕, 해요. 왜요? 제가 그 영상 보고 안녕도 못 하고 길길이 날뛰고 있을
줄 아셨어요?”
- 딸꾹, 검사님 저 이거 하나만 확인해 주시면 안 돼요?
“뭔데요?”
난 또, 엄청 대단한 걸 묻는 줄 알았더니만, 기껏 한다는 소리라는 게.
- 지금 이 통화 녹음 안 되고 있는 거 맞죠? 녹음 안 되고 있다는 가정하에
제가 검사님께 드릴 말씀이 너무 많거든요.
“녹음 안 해요. 할 필요도 없고요.”
- 왜요? 왜 필요가 없어요? 이 통화로 검사님 무죄 밝히실 수도 있는 거잖아요.
참나, 고소는 자기가 해 놓고 이제와서 친절하게 무죄 밝힐 방법을 알려주시
려고?
“이 통화 아니어도 저한테 아무 죄 없는 거 증명할 방법은 많거든요. 저 검사
예요. 당장 영상에 잘라서 올리신 그 CCTV 화면만 봐도 뒤로 조금만 더 돌려
보면 저는 그 택시에 동승 안 했다는 거 나올 텐데요?”
- 그렇겠네요. 어제 저만 태워서 보내 주시고 기사님한테 차비까지 현금으로
주신 거 저도 봤으니까요.
“필름 끊기지도 않으셨나 보네요? 그런데 왜 그런 거짓말을 하셨어요? 그래놓
고 이렇게 저한테 전화하시는 이유는 뭐고요?”
- 죄송해요. 저로서는 정말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놓고 지금 전화드리고
있는 건, 정말 죄송해요. 제 부탁 하나만 더 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어이가 없네? 그짓거리를 해 놓고서 나한테 부탁을 하겠다고?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뭔데요? 부탁은 또 뭐고요?”
- HL 그룹에서 저희 아메리카 TV 인수하려고 하는 건 검사님도 알고 계셨잖아
요. 그 조건이 제가 검사님을 저격하는 거였어요. 저쪽에서 부른 인수 대금만
지분 51% 넘기는 조건으로 무려 75억 원이에요. 검사님이라면 거절하실 수 있
으셨겠어요? 이거 받는 것만 도와주세요. 네?
나라면? 당연히 거절하지. 지금 내 통장에 들어 있는 돈은 달랑 30억 원밖에
안 되지만, 이게 곧 몇 백 배로 불어날 텐데 그깟 75억? 껌값이다.
게다가 지금 BJ 초향이 하고 있는 짓거리처럼 양심을 팔아서 받기에는 적어도
너무 적은 돈이다.
그리고 BJ 초향이든, 그녀의 아버지이든 결정적으로 모르는 사실이 있다. 향
후 10년 안에 아메리카 TV는 시가총액 1조원이 넘는 기업이 된다.
그러니 지금 지분의 51%를 넘기는 건 10년만 존버하면 5천억 원이 될 돈을 지
금 당장 눈앞의 이익에 눈이 멀어 그 2%도 안 되는 가격에 넘기는 꼴이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이걸 말려야 하나? 만약에 BJ 초향이 이 일을 나한테 먼
저 상의라도 했으면 그런 호의를 베풀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미 뒤통수를 거하게 맞은 지금은 얘기가 다르다. 나 역시 BJ 초향
의 이 도움 요청을 이용해 먹을 생각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저한테 도와달라고 하신 게, 그 인수 계약 체결 전까지만 입 다물
고 있어 달라는 거죠?”
- 네, 네. 맞아요. 정확히는 그 돈 입금될 때까지만요. 그럼 제가 평생 은인
으로 모시고 그 영상 다 거짓말이었다고 해명 방송도 할게요. 어차피 성폭행
은 친고죄니까 제가 고소 취소하면 검사님도 처벌 안 받으시는 거잖아요. 원
하시면 잠자리도 가져 드릴게요.
얘 뭐라니? 성폭행이 친고죄가 아니게 된 지는 회귀한 시점을 기준으로 해도
이미 몇 년 전 일이다.
나중에 해명 방송을 한다 쳐도 지금 당장 실시간으로 실추되고 있는 내 명예
는 대체 어떻게 회복할 생각이란 말인가?
더 어이없는 건, 원하면 잠자리를 가져 주겠다고? 가끔 자기가 자 주면 모든
남자들이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는 여자들이 있던데 그게 BJ 초향일 줄이야.
쟤랑 자는 거, 내가 싫다. 세상 어떤 남자가 자기를 성폭행범으로 몰려고 했
던 여자한테 호감을 느끼겠는가?
“해명 방송, 잠자리 다 필요 없는데요? 제 무죄 제가 밝힐 자신 있습니다.”
- 검사님 제발요. 화가 나신 건 알겠는데, 한 번만 봐 주시면 안 될까요? 며
칠 남지도 않았어요. 당장 3일 뒤에 계약서 사인하고 그럼 바로 입금될 거예
요. 그때까지만 시간을 주세요. 시키시는 건 뭐든지 다 할 게요.
오케이. 저 말이 나오길 기다렸다.
“뭐든지 다 한다고 하셨습니까?”
- 네. 딱 3일만 기다려 주시면요.
“좋습니다. 정말 제가 시키는 대로 다 하셔야 합니다.”
히꾸욱-!
제대로 긴장했는지 우렁차게 딸꾹질 소리를 낸 BJ 초향의 목소리가 확 밝아졌다.
- 네!
아주 좋단다. 내가 뭘 요구할 줄 알고? 원래대로라면 이 일은 이렇게 처리된다.
1) 나는 택시 탑승 CCTV 화면 등을 포함한 무죄 증거를 수집한다.
2) 그걸 언론과 수사기관에 밝혀 내 무죄를 입증한다.
3) BJ 초향은 무고죄 및 허위사실 공표에 의한 명예훼손죄로 법정에 선다.
그렇지 않아도 이게 되게 싱겁다는 생각은 하던 중이었다. 사이다로 치면 뚜
껑 열린 채로 미지근하게 방치된 것 같았달까?
우리나라는 무고죄 형량이 꽤 높은 편이라 BJ 초향은 감옥에 가게 될 가능성
이 크지만, 이것만 갖고는 그녀의 아버지나 HL 그룹에 아무런 타격도 들어가
지 않는다.
그리하여 나는 기왕 BJ 초향이 내 말을 고분고분 따르기로 한 것을 십분 활용
하여 나머지 둘에게도 쿠션 데미지를 먹일 생각이다.
“그럼 지금부터 제가 묻는 질문에 거짓 없이 대답해 주셔야 합니다.”
- 당연하죠.
“초향님도 아메리키 TV 지분을 보유 중이시라고 들었는데 현재 대략 얼마나
갖고 계신가요?”
- 어... 그게요, 조금씩 꾸준히 넘겨받아서 11% 정도 돼요.
오? 내 생각보다 많은데?
“지금 제가 이메일로 계약서 하나 보내드릴 건데요, 여기에 동의하신다는 답
장해 주세요.”
- 네? 갑자기 계약서요?
“초향님도 저한테 갑자기 엉뚱한 요구하셨잖아요. 비슷한 거라고 생각하세요.
전화 끊지 말고 계셔 보세요. 바로 보내 드릴 테니까.”
나는 재빨리 노트북을 켜서 계약서 타이핑에 들어갔다. 그 주요 내용은 이러
하다.
- BJ 초향은 백동준에게 (주)아메리카 TV의 지분 10%를 이 계약 체결일로부터
6년 안에 액면가에 매입할 권리를 부여한다.
- 이 대가로 백동준은 BJ 초향에게 금 1,000,000원을 지급한다.
- 이를 위해 BJ 초향은 향후 6년 간 (주)아메리카 TV의 지분 보유량을 전체
주식 총수의 10%이상으로 유지한다.
- 백동준은 이 계약 체결일로부터 3일 간 BJ 초향의 요구에 따라 기 폭로된
성범죄 의혹에 대해 언론을 통한 공식적인 입장 표명을 삼간다.
잠시 후, 계약서를 받아 본 BJ 초향이 끊어지지 않은 전화를 통해 얼른 되물
었다.
- 이게 뭐예요? 6년 뒤에 제가 검사님한테 저희 회사 주식을 팔아달라는 건가
요? 액면가면 주식에 써 있는 300원에요? 그렇게만 해 드리면 제가 아까 말씀
드린 대로 앞으로 3일 동안 아무 대응 안 해 주시겠다고요?
“정확히는 6년의 기간 내에 언제라도 초향님이 보유하신 주식을 제가 매입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 거죠. 콜옵션(Call option) 계약이라고도 해요.”
- 제가 잘 이해한 건지는 모르겠는데, 이거 6년 안에 저희 회사 주가가 300원
은 넘어야 검사님한테 이득인 것 같은데요? 저는 그 안에 상장이라도 될지 잘
모르겠거든요?
이해는 빨라서 좋네. 방금 BJ 초향이 말한 대로 이건 아메리카 TV의 주가가
오르지 않으면 아무 쓸모가 없는 계약이다.
“그 걱정은 제가 할 테니까, 동의한다는 이메일 답장으로 보내 주시면 돼요.
그럼 바로 계약 체결됩니다.”
- 아무리 봐도 제가 손해볼 건 없는 것 같은데, 3일 동안 함구해 주신다니까
감사드려요. 답장 바로 보냈어요. 계약이라는 게 이렇게 간단하게도 체결되는
줄은 몰랐네요.
“민법상 계약 체결의 요식은 따로 안 정해 뒀어요. 상호 의사 표시만 확인되
면 그 계약은 바로 법적 효력을 갖습니다. 구두 계약도 되는데, 영구적으로
기록 남는 이메일을 통해 의사 확인했으니까 더 확실하죠.”
- 그렇군요. 법적인 이야기니까 검사님 말씀 믿을게요.
새삼 미래를 안다는 게 이렇게 좋은 거구나 싶네. BJ 초향이 오를지 잘 모르
겠다는 아메리카 TV의 주가는 앞으로 약 5년 뒤에 찾아올 대 BJ 시대에 액면
가의 100배인 3만 원을 넘긴다.
그럼 나는 그때 달랑 100만 원을 들인 이 콜옵션을 행사하는 것만으로도 3만
원짜리 주식을 300원에, 무려 10%나 매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조금 더 간단히 처리하자면 당장 BJ 초향이 들고 있는 지분을 매수하는 방법
도 있겠으나, 지금 내 통장에 있는 돈 30억은 곧 써야 할 곳이 따로 있다.
그러니 이 콜옵션 계약은 내 돈을 묶어 두지 않으면서도 향후의 막대한 이득
은 몽땅 취할 수 있는 개꿀이 되는 셈이다.
또, 반대로 생각하면 아메리카 TV의 대주주, 그러니까 BJ 초향의 아버지는 향
후 주가가 폭등했는데도 나한테 약 1천억 원 상당의 주식을 고스란히 갖다 바
쳐야 하는 꼴이 난다.
자, 이걸로 시간만 지나면 내가 아메리카 TV를 쪽쪽 빨아먹게 된 건 확정이
니, 이제 본격적으로 HL 그룹의 인수를 빠그라뜨려 봐야겠다.
이건 비단 BJ 초향과 그녀의 아버지가 마음에 안 들어서이기도 하지만, 이제
는 내가 이미 알고 있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함이기도 하다.
5년 뒤에 아메리카 TV의 주가 100배 상승은 어디까지나 HL 그룹이 손대지 않
았다는 가정 하에 이루어지는 성장이기 때문이다.
“제가 요청드릴 게 하나 더 있는데요.”
- 네? 또요?
“초향님도 말씀하셨잖아요. 이 계약 자체는 저한테 득이 되지 않을지도 모른
다고요. 이게 본론입니다.”
휴우-.
내 단호한 대답에 BJ 초향은 핸드폰 너머로도 알코올 기운이 느껴지는 한숨을
내뱉었다.
- 네. 뭐든지 다 하기로 했으니까, 말씀하세요.
“오늘 방송에서 읽으신 원고 직접 쓴 거 아니죠? 평소에 방송에서 하시던 말
이랑 말투도 다르고 쓰는 단어도 미묘하게 차이가 있던데요?”
- 아, 네. 맞아요. 제가 안 썼어요. 제가 아빠한테 말씀하신 대로 하겠다고
하니까, 이메일로 그 원고가 날아왔어요. 그래서 누가 썼는지는 저도 진짜 몰
라요. 믿어 주세요.
뭘 또 이렇게 간절하게 믿어 달라고 애원하기 씩이나?
“알겠어요. 그 이메일 통째로 저한테 포워딩해 주실 수는 있으시죠?”
- 네. 그거야 뭐. 지금 바로 해 드리면 되죠?
“네.”
곧장 BJ 초향을 발신인으로 하는 이메일이 한 통 더 도착했고 여기에는 다른
사람 눈에는 잘 안 보이는, 내가 찾던 바로 그 정보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