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 검사는 재벌을 사냥한다-30화 (30/51)

30화. 성해에서 서울로 (2)

그리하여 방송이랑 상관없이 사적으로 만나게 된 BJ 초향은 그간 봐 왔던 이

미지와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방송용으로 늘 입고 있던 코르셋 대신 본인 몸에 다소 커 보이는 티셔츠에 청

바지를 입고 나왔고, 화장품도 기본 파운데이션만 바른 것 같았다.

여기까지만 보면 방송하러 나온 게 아니니까 그럴 수도 있겠거니 싶었는데,

왠지 기운도 없어 보이고 다크서클도 푹 팬인 게 요즘 힘든 일이 있어 보였달까?

그래서 이제 겨우 세 번째 보는 사이인데 밥 먹자는 이야기도 뿌리치고 술 마

시자고 한 걸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만난 장소는 갈매기살을 시키면 돼지 껍데기를 무한으로 제공해 주는

저렴한 소주집이었다.

“정말 여기서 마셔도 괜찮아요? BJ 초향님이 강림하시기에는 너무 누추한 곳

인 것 같은데.”

그러자 BJ 초향이 손사레를 쳐 보였다.

“어휴, 제가 뭐라고요. 저 소주랑 껍데기 좋아해요. 그리고 저 돈 없어서 검

사님한테 비싼 술 못 사드려요.”

이게 무슨 소리지? 실시간 방송 시청자 수 3만을 찍는 BJ가 술값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돈이 없다니?

아무리 아직 인터넷 개인 방송이 본 궤도에 진입하기 전이라 BJ 들의 수익이

안정적이지 않다고 해도 이건 말이 안 되지 않나?

그렇다고 BJ 초향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도 않았던 게, 이런 말이 읽혀 들

어 왔으니까.

[내 팔자야. 언제쯤 돈 걱정 안 하고 살아 보나?]

아쉽게도 구체적인 사정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가 돈이 없는 건 사실로

보였다.

“어차피 저 공무원 신분이라 비싼 거 얻어먹지도 못해요. 오늘 술값도 제가

낼 테니까 편하게 드세요.”

“맞아. 검사님 돈 많으셨죠?”

“요즘 저 주식 천재 검사로 불린다면서요?”

그런 농담과 함께 주문했던 소주와 갈매기살이 나와 불판위에 올라갔다. 한

잔, 두 잔 술잔이 꺾이고 나서 BJ 초향이 물었다.

“그럼 검사님 이제 완전히 서울로 올라오신 거예요?”

“보통 2년마다 새로 발령나니까, 당분간은 여기 있을 거예요.”

“그럼 저랑 합방도 더 자주 해 주실 수 있겠네요?”

그러고 보니 오늘도 자기 방송에 나와달라는 걸 거절해서 이 술자리로 대신하

게 된 것이었다.

“저 찾는 시청자분들이 많아요? 요즘은 저 다른 방송 안 나가고 있어서 인지

도도 많이 떨어졌을 것 같은데요.”

“검사님 한 번 나와주실 때마다 라이브 방송이 흥하니까 저로서는 자주 모시

고 싶을 수밖에 없네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래야 돈도 되고요. 어머, 죄송

해요. 제가 귀한 분 앞에 모시고 자꾸 돈 이야기만 하고 있네요.”

“괜찮아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야 누구한테나 중요한 문제죠. 아메리카

TV 이번에 HL 그룹에 인수된다던데, 그럼 초향님한테도 경제적으로 도움되는

거 있지 않아요?”

저쪽에서 먼저 돈 이야기를 꺼냈으니, 나로서도 물어볼 수 있는 질문 아닐까

싶었는데 그때까지 잘 이어지던 대화가 뚝 끊겼다.

치이이익-.

BJ 초향이 든 집게의 움직임을 따라 고기가 한 번씩 다 뒤집히고 나서야 그녀

의 대답이 이어졌다.

“그게, 도움이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 도 있는 것 같네요. 검사님, 건배?”

“네.”

술잔이 부딪히고 나자 속이 타오르는지 아직 안까지 익지도 않은 고개를 낼름

입안에 넣은 BJ 초향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검사님, 제가 왜 아이돌 관두고 BJ 하고 있는지 알아요?”

그 사정이라면 저번에 BJ 초향의 마음을 읽어서 대략 알고 있었다. 허민회가

있는 자리에 술 접대를 나갔다가 다치게 한 일로 회사에서 짤렸다고.

그래도 짐짓 모르는 척 대꾸해 보았다.

“저는 그냥 이쪽 일이 적성에 맞으시는가 보다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다른

사정이 있으세요?”

그러자 내가 이미 그녀의 마음에 침투해서 알아낸 것과는 다른 대답이 들려왔다.

“사정이야 여러 가지가 있는데, 사실은 아메리카 TV가 저희 아버지 회사거든

요. 그런데 사업이 잘 안 돼서 저라도 어떻게 들어와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거

예요.”

아, 자꾸 돈 없다고 하던 게 이거 때문이었어? 몇 년 안에 아메리카 TV가 코

스닥에 상장되고 대박을 치는 건 맞는데 지금은 힘든 시기가 맞지.

“그건 몰랐네요. 그럼 BJ 수익도...?”

꿀꺽-.

마치 고기가 알약이라도 되는 것처럼 소주에 삼켜 넘긴 BJ 초향이 이때다 싶

었는지 얼른 내 말의 허리를 잇고 들어왔다.

“맞아요. 다른 BJ 들은 시청자분들이 후원해 주시는 달풍선 수익 회사랑 반반

나눠 갖는데, 저는 그런 거 꿈도 못 꾸죠. 아버지가 다 가져가세요.”

이래서 아메리카 TV가 BJ 초향을 그렇게 미친 듯이 밀어줬구나. 메인에는 항

상 그녀의 사진이 올라와 있었으니까.

“그렇다고 다른 플랫폼으로 이동하지도 못하시겠어요.”

“그렇죠. 자꾸 다른 BJ들이랑 비교하게 되는데, 그분들은 아메리카 TV에서 잘

안 되면 T워치 같은 곳으로도 많이 가시거든요. 그런데 저는 가족 관계가 걸

려 있으니까 그런 거 꿈도 못 꾸죠.”

“그럼 수익은 어떻게 내고 계세요? 너튜브 편집 영상에서 내시는 건가요?”

내 물음에 BJ 초향이 소주 한 모금과 함께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다른 영상 수익도 다 회사에서 가져가요. 저는 아메리카 TV 직원으로 등록돼

있어서 월급 받고 있어요. 말이 월급이지, 금액으로 치면 차라리 아빠가 주는

용돈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마음 편할 정도고요. 그 대신 저 뭐 받는 줄 아세요?”

“아, 돈 말고 따로 받으시는 게 있어요?”

“주식이요. 상장도 안 돼서 어디 팔 수도 없는 아메리카 TV 지분 받으면서 방

송하고 있어요.”

나는 BJ 초향이 성공한 1세대 BJ로 돈방석에 앉아 있는 줄 알았더니, 빛 좋은

개살구도 이런 개살구가 따로 없네.

아메리카 TV의 주식이야 몇 년 후에나 대박을 치지, 지금 BJ 초향 입장에서는

종이 쪼가리보다 못 한 것일 테니까.

“그래서 제 방송 출연이 절실하셨나 봐요.”

“아잇. 들켰네요. 검사님이 나와 주시면 제 채널 하나만 뜨는 게 아니라 아메

리카 TV 전체가 흥하니까 저로서는 자꾸 조를 수밖에 없었어요. 죄송해요.”

어쩐지 저번에 내 두 번째 방송 출연 때 아메리카 TV 메인에 대문짝만 하게

내 사진이랑 인터뷰 기사를 걸어 놓더라니.

“아니에요. 죄송하실 것 까진 없고요.”

“저는 제발 아메리카 TV에서 저 말고도 스타 BJ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지금은 뭐, 저 혼자 꾸려나가는 꼴이라 어깨가 너무 무겁네요.”

“그럼 이번에 HL 그룹에서 아메리카 TV 인수하기로 한 게 엄청 잘된 일 아니

에요? 플랫폼 자금난 해소되면 다른 BJ들 지원도 더 할 수 있을 거고, 초향님

한테도 수익 배분 제대로 해 줄 수 있을 텐데요?”

쪼로록-.

내 물음에 BJ 초향은 대답에 앞서 비어 있는 우리 둘의 술잔을 먼저 채웠다.

“그게 말이죠. 하아.”

“왜요? 값을 제대로 안 쳐주려고 해요?”

“그런 건 또 아닌데요, 검사님 말이 맞을지도 몰라요. 이번 인수만 잘 되면

저도 더 이상 아메리카 TV에 목 안 매도 되고 아빠도 자금 걱정 없이 사업하

실 수 있으실 거고요.”

나한테야 꼴배기 싫은 HL 그룹이지만, 자금 BJ 초향과 아메리카 TV에게는 거

의 구세주 아닌가?

“그럼 인수 협상만 잘 되면 고민 없으시겠네요.”

“그 협상... 딸꾹. 아, 죄송해요. 제가 너무 빨리 마셨나 봐요.”

정말 빨리 마시긴 하더라. 고기 한 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지금 우리 앞에 비

워진 소주는 세 병. 저 중에 두 병을 BJ 초향이 혼자 마셨다.

“그 협상 잘 되셨으면 좋겠어요. 혹시 법적으로 제가 조언해 드릴 수 있는 부

분 있으면 언제든 물어보셔도 되고요.”

“그 협상... 법적 문제는... 딸꾹, 없는데요.”

벌컥, 푸욱-.

이것도 빛 좋은 개살구인 걸까? BJ 초향은 자기 앞에 놓인 술잔을 확 꺾어 들

이키더니 그대로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그리고 잠시 후,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나에게 마음의 소리가 들려왔다.

[검사님, 죄송해요. 그 협상 시작이라도 하려면 제가 이렇게 할 수밖에 없어

요.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고 저를 원망하셔도 돼요.]

깨어 있었으면 요리조리 캐물어서라도 뭘 어떻게 할 수밖에 없다는 건지, 은

혜를 원수로 갚는다는 건 무슨 뜻인지 물어보련만, 그 뒤로 BJ 초향은 말 그

대로 정신줄을 놓고 말았다.

* * *

BJ 초향을 택시에 태워 집으로 보내고 만 하루가 지났을 때였다. 화면을 통해

다시 만난 그녀를 통해 어제의 의문이 신속하게 해결되었다.

이거 한 방으로 HL 그룹이 왜 듣보잡 기업인 아메리카 TV를 인수하려고 했는

지, BJ 초향은 어제 나한테 왜 그렇게 미안해했는지 한 방에 정리되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건 BJ 초향의 개인 너튜브 채널에 업로드된 지 한 사긴

이 채 되지 않는 영상이다.

화면 속 그녀는 최대한 불쌍해 보여야 한다는 듯, 어제 나를 만났을 때보다

더 펑퍼짐한 옷을 입고 화장을 완전히 지운 맨 얼굴이었다.

- 안녕하세요. BJ 초향입니다. 저는 오늘 제 방송인으로서의 생명을 걸고 이

카메라 앞에 앉았습니다. 이 자리에서 저는 제가 감히 대항할 수도 없는 권력

자가 저에게 자행한 짓을 폭로하고자 합니다. 그 사람은 현 서울중앙지방검찰

청의 검사 백동준입니다.

처음에 이 말을 듣는데 뒷골이 띵하더라. 자기가 술 사달래서 사줬고, 나보다

더 많이 마시고 뻗어서 택시 태워 집에 보냈는데 무슨 폭로를 해?

- 저는 빈약한 제 채널의 시청자수를 늘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스타 검사인

그에게 방송 출연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출연 조건으로 저와의 잠자리

를 요구했습니다. 저는 거절했지만, 어제 그와 가졌던 술자리의 결말은 참담

했습니다.

와, 사실과 거짓을 교묘하게 뒤섞어 사실보다 더 사실처럼 들리게 만드는 저

거짓말 대본. 분명히 본인이 쓴 게 아닐 거다.

그러더니 BJ 초향이 그다음부터는 아예 작정하고 순도 100%의 구라를 술술 풀

어놓았다.

- 술자리 끝에 만취한 저는 기억을 잃었고, 오늘 깨어났을 때는 한 모텔이었

습니다. 간밤에 그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차마 여성인 제 입으로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BJ로 일한다는 게 이렇게 끔찍한 일을 당해야 하는 건지는 마

처 몰랐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검사 백동준을 성폭행 혐의로 고소함과 동시에

BJ 은퇴를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빠직-.

너무 어처구니 없는 모함에 내 이마에 힘줄이 저절로 솟아올랐다. 그러는 사

이에도 BJ 초향은 준비된 원고를 계속해서 읽어 내려갔다.

- 이 싸움에서 제가 승리할지 자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검사라는 거대한

권력 앞에 한 여성으로서 무릎꿇지 않는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이어서 보

실 화면은 경찰을 통해 확보한 CCTV 영상입니다. 저와 백동준 씨가 술집에 들

어가는 모습, 백동준 씨가 저를 택시에 태우는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이렇게 작정하고 덤비겠다는 거지? 이 정도면 미안해한다고 봐 줄 수준이 아

닌데?

BJ 초향은 물론 그 뒤에 있는 아메리카 TV 사장과 이 모든 사태를 설계했을

HL 그룹의 누군가까지. 반드시 박살 내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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