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성해에서 서울로 (1)
오랜만에 대학 시절을 보냈던 서울로 돌아와 보니 바다 냄새 없는 도시의 공
기 다음으로 가장 먼저 느껴지는 게 내가 회귀했다는 사실이었다.
회귀하자마자 떨어진 성해에서야 워낙 바쁘게 과거의 인연을 만나고 악연을
청산해야 했지만, 서울에서는 알던 사람들이 지금 어떻게 지내는지 훨씬 여유
를 갖고 볼 수 있었달까?
인권 변호사 출신으로 장차 국회에 입성하게 될 사법연수원 동기는 이제 갓
개업한 법률 사무소의 운영 비용을 못 대서 힘들어하고 있더라.
곧 투자 회사를 설립하여 향후 10년 안에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성장시키는 대학 때 후배는 다니는 증권사에서 상사의 괴롭힘을 견디지 못해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머지않아 인생에 회의를 느끼고 절에 들어갔다가
시골에 가서 농사를 짓게 되는 친구는 밤이면 유흥가를 돌며 돈을 뿌리고 다
니고 있다더라.
이 사람들에게 앞으로 그들이 어떤 길을 걷게 될지 말해 줄까 하는 고민도 사
실 조금은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미래 기억이라는 말도 안 되는 특권은 나만 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리고 혹여나 그에 책임이 따른다면 그것도 오롯이 내가 져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그 누구에게도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아는 사람으로서 조언하지는 않
았다. 그걸 모르더라도 각자의 삶을 나름의 훌륭한 방식으로 살아갈 이들이다.
어제는 오래전 약속을 지키려 대검찰청 디지털 포렌식 부서에서 근무하는 동
아리 후배 여세린을 만나기도 했다.
“오빠!”
“어. 왔어? 앉아.”
“저번에 붕가붕가 영상 찾아줬다고 비싼 밥 사준다더니 내가 성해 갔을 때는
쌩까고 오늘은 중국집이야?”
내가 성해지청에서 허민회의 배임 혐의를 밝혀내느라 대검 포렌식 팀 출동을
요청했을 때 여세린도 같이 왔었다고 한다.
“그때 진짜 너무 바빠서 나 혼자 밥 먹을 시간도 없었어. 미안. 그런데 여기
그냥 중국집 아니야.”
정말이다. 지금은 매니아들 사이에서만 알려져 있지만, 몇 년 안에 방송을 타
면서 우리나라 중식 1인지로 불리는 셰프가 운영하는 곳이다.
피식-.
그런데도 여세린은 내가 농담하는 줄 알았던지 그저 웃어 보일 뿐이었다.
“중국집이 다 거기서 거기지.”
“자, 여기 메뉴판. 먹고 싶은 거 골라.”
“중국집에서 무슨 메뉴판이야? 나는 짜장면. 돈 많이 벌었다고 신문에도 나왔
으면서, 탕수육도 사줘.”
얼레? 여기 진짜 그런 거 먹는 곳 아닌데?
“메뉴판이라도 한번 봐.”
내가 보라니까 보는 시늉이라도 해 주겠다는 듯 메뉴판을 펼쳐본 여세린의 눈
이 금세 동그래졌다.
“오빠, 여기 짜장면이 3만 원인데? 사기 아니야?”
“그냥 중국집 아니라니까? 너 비싼 밥 사주려고 예약까지 해서 부른 거야. 여
기서 짜장면 먹으면 어차피 다른 집이랑 맛 똑같아서 손해래. 더 비싼 거 먹어.”
“와, 오빠 돈 진짜 많이 벌었나 보네?”
곧이어 우리가 주문한 2인용 세트 메뉴가 나오고, 이 집의 명물로 알려진 우
육탕면을 폭풍흡힙하던 여세린이 만족스러운 표정이 되어 물었다.
“진짜 맛있다. 나 오빠 만나면 꼭 물어보고 싶었던 거 있는데, 오빠 그 BJ랑
사귀어?”
“그 BJ가 누구야? BJ 초향?”
“응. 오빠랑 같이 방송하던 그 여자.”
푸흡-.
잘 먹다가 사레 걸릴 뻔했네.
“나 성해에서 올라온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서울에 사는 BJ 초향이랑 어떻
게 사귀냐?”
“왜? 장거리 연애라는 것도 있잖아. 아무튼, 안 사귄다는 거지?”
“안 사귀어. 왜 질투해?”
콜록, 콜록-.
이번에는 여세린 쪽에서 진짜 사레가 걸린 듯했다.
“아니거든! 그냥 오빠가 초향이랑 방송하던 그 회사 요즘 재밌는 소문 들려서
얘기해 주려고 물어본 거야.”
“그 회사면, 아메리카 TV? 뭐가 재밌는데?”
“나야 컴공과 나왔으니까 IT 쪽으로 사업하는 친구들 많잖아. 걔네가 그러는
데 HL 그룹에서 아메리카 TV 인수할 거래.”
진짜 재밌네? HL 그룹 같은 거대 기업 집단이 지금 시점에서는 애들이나 보는
방송으로 여겨지는 아메리카 TV를 인수한다고?
신기한 건 또 있었다. 미래를 미리 살고 온 내 기억에 HL 그룹이 아메리카 TV
에 관심을 가졌다는 정보는 없었다.
내가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을 다 외우고 회귀한 건 아니었어도, 최소한 HL
그룹에 관한 정보만큼은 확실히 머릿속에 넣어두고 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내가 알던 미래에서 뭔가 변화가 일어났다는 뜻이었다. 내
가 아메리카 TV를 통해 허민회를 조진 것과 관련이 있으려나?
“HL 그룹이 그런 작은 회사를 왜 인수한대?”
“나도 그걸 몰라서 혹시 오빠는 아는지 물어보려고 했지.”
“IT 사업하는 친구들도 모른대?”
후루룩-.
우육탕면 흡입을 이어가던 여세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걔네도 다 오빠랑 똑같은 반응이야. 요즘 대기업들 죄다 새로 생길 종합
편성채널 방송권 따겠다고 난리인데 HL 그룹은 웬 인터넷 방송국이나 인수하
고 있냐고.”
그러면서 앞에 놓인 양장피를 크게 한 젓가락 집어 그새 비워진 입을 다시 가
득 채웠다. 사주는 보람이 있을 정도로 진짜 잘 먹네.
“종편이랑 인터넷 방송국 다 갖고 싶은 건지도 모르지.”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더니 나는 아직 반도 안 먹었는데 여세린은 곱빼기로 시킨 우육탕면의 마
지막 면을 마저 흡입했다.
쟤는 대학 때부터 저렇게 어마무시하게 먹는데 살 찐 걸 한 번도 못 봤다. 진
짜 신기하단 말이지?
어제는 그렇게 여세린에게 밥을 사줬고, 오늘은 또다른 사람이랑 밥을 먹으러
나와 있다. 정말 뜻밖의 사람이 나한테 식사 대접을 해 주겠다고 하더라.
지금 나랑 마주앉아 있는 사람은 내가 감옥에 보낸 허민회의 형, 그러니까 HL
그룹의 장남인 허규회다.
내가 얼굴 보자는데 소심하게 숨는 성격은 아니라 일단 나와봤는데, 어째 분
위기가 예상했던 것과는 정반대다.
나는 왜 자기 동생 감옥 보냈냐고 따지러 부른 줄 알았는데, 허규회는 시종일
관 아주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고서 방금은 술까지 따라주었다.
“제가 드리는 감사의 표시라고 생각하시고 편히 드십시오.”
자기 가족한테 중형을 때린 나한테 고마워한다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마
음 침투도 해 보았는데도 읽혀 들어오는 정보가 없는 걸 보면 진짜 고마워하
고 있나 본데?
“맛있게 먹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허규회 대표님께 감사받을 일을 한 적이 있
었던가요?”
“그럼요. 허민회 그 자식 골로 보내 주시지 않았습니까?”
아? 반대로 이걸 고마워한다고?
“동생 분 일은 죄송하게 됐습니다.”
“하하하, 죄송이라뇨. 검사님 덕분에 제가 아버지 뒤를 이을 게 한층 더 확실
해졌는걸요. 당장은 HL 중공업 대표 이사 자리까지 제 손에 떨어졌고요. 민회
는 얼마나 감옥에 있게 되는 겁니까?”
그러니까, 내가 후계 구도에서 허규회의 경쟁자였던 허민회를 제거해 줘서 고
맙다는 소리인가 보다. 이 집안도 아주 콩가루네.
“중형을 선고받아서 최종 형량은 대법원까지 가야 정해질 겁니다. 그래도 양
형 기준 따져 보면 10년 이하로 나오기는 어려워요. 가석방까지 생각한다고
해도 형량의 절반은 채워야 신청 가능하니 5년 안에는 못 나온다고 보시면 되
겠습니다.”
“최소 5년이라. 그정도면 민회 그 자식이 다시 돌아와도 절대 제 자리 넘볼
수 없게 완벽한 후계자 자리 꿰찰 시간은 되군군요. 지금 항소심 진행 중이라
는데 혹시 재판 결과가 뒤집어질 일은 없겠죠?”
“법조인으로서 재판 결과에 확답을 드리는 건 늘 어렵습니다만, 사실 관계 인
정이 바뀌지 않는 이상 법리적으로는 말씀드렸던 중형이 불가피합니다.”
끄덕-.
내 말을 듣고서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한 번 위아래로 움직인 허규회가 조
금 전에 내가 채워 주었던 자기 술잔을 비웠다.
“꼭 그렇게 됐으면 좋겠네요. 아, 그리고 검사님. 조심은 하시는 게 좋을 겁
니다.”
“그건 무슨 말씀이신가요?”
“저야 검사님께 이렇게 감사드리고 있지만서도, 저희 아버지 생각은 많이 다
르시더라고요.”
끄응-.
예상하고 들었어도 가슴이 무거워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소식이었다. 허규회의
아버지면 날아가는 봉황도 떨어뜨린다는 HL 그룹의 허창수 회장이다.
“회장님께서는 뭐라고 하시던가요?”
“그분 아들이 감옥에 갔으니 마음이 편치는 않으신 모양입니다. 어떻게든 빼
낼 궁리하고 계신 것 같고요, 검사님한테도 감정이 많이 안 좋으십니다. 어떤
식으로든 복수하려고 벼르고 계실 거예요.”
“그 어떤 식이 뭘지 조금만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실 수는 없을까요?”
조금 전과는 반대로 이번에는 허규회의 고개가 가로로 움직였다.
“아들인 저도 당최 속을 알 수 없는 분이라서요. 그 자리까지 올라가시려면
그럴 수밖에 없으셨겠죠. 그저 조심하시라는 말씀밖에는 드릴 수 있는 게 없
네요.”
그러고 나서 술이 몇 차례 더 오가고, 나는 어제 여세린한테 받았던 질문을
허규회에게 토스해 보았다.
“제가 최근에 미심쩍은 소문을 하나 들었는데요, HL 그룹에서 아메리카 TV를
인수하려고 하신다면서요?”
“아, 네. 그렇습니다. 저도 그런 회사가 있는지 그 인수 계획 듣고 처음 알았
네요. 아무나 나와서 카메라 켜 놓고 방송하는 곳이라면서요?”
이렇게 되면 소문 자체는 사실이라는 건데.
“혹시 인수하시려는 이유도 알고 계시나요? HL 그룹 같은 대기업이 손대기에
는 너무 작은 사업 아닌가 해서요.”
“저도 정확히 검사님이랑 같은 생각입니다. 공중파 방송국을 하나 인수해도
성에 안 찰 판에 그런 건 뭐 하러 가져오려고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버님
결정이라고 하시니 따로 반대는 안 하고 있을 뿐입니다.”
뭐야? 한 계열사에서 추진하는 것도 아니고, 허창수 회장이 직접 나선 일이라
고? 이 코딱지만한 인수합병이?
- 허창수 회장이 내가 출연했던 아메리카 TV를 인수하려고 한다.
- 허창수 회장은 나한테 복수하려고 한다.
처음에는 전혀 관련 없어 보이던 이 두 사실을 이렇게 나란히 놓고 보니 멀리
떨어져 있지만, 중간 조각을 채워 주면 하나의 그림이 되는 퍼즐 같았달까?
이거 참, 허규회 대신 허창수 회장을 앞에 불러다 놓고 마음을 읽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니 답답하지 그지 없다.
* * *
그로부터 며칠 뒤 중앙지검 업무에도 슬슬 적응을 마칠 무렵, 나한테 만나자
고 하는 서울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 서울 오셨다면서요? 이번에는 성해까지 안 가도 될 것 같은데 저희 합방 한
번 더 안 하실래요? 출연료도 따로 챙겨 드릴게요!
내가 출연해 줄 때마다 시청자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한다고 늘 합방을 요청하
는 BJ 초향이 보낸 메시지였다.
못 나갈 건 없지만, 그렇다고 저번처럼 나가서 적극적으로 해명해야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출연료야 뭐, 관심갈 만한 금액은 전혀 아니었다. 지금
내 통장에 있는 돈이 얼만데.
무엇보다 HL 그룹이 아메리카 TV를 인수한다는 걸 알게 된 이상, 당분간 그곳
에 나가는 건 자제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 합방 말고, 이제 같은 서울 하늘에 살게 됐는데 밥이나 한 끼 먹어요.
- 아쉽지만, 어쩔 수 없네요. 밥 말고 술은 어때요?
- 그것도 괜찮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