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원수 체포 · 구속 성공
왜 이렇게 자기만 알아볼 수 있게 적는지는 알 만했다. 허민회가 내리는 은밀
한 지시를 안 빠뜨리려 메모는 해야 했으되, 누가 볼까 봐 두려웠겠지.
그래도 사건의 전말을 아는 나로서는 저 문구를 해석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 죽여라(Kill) 검사(Prosecutor) 백동준을(Paik, Dongjun), 비용은 5천만
원(W5000)
이란 뜻이 분명했다. 허민회가 살인 교사 범죄를 저질렀다는 증거를 잡았으니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영장을 청구해야 한다.
- 체포영장청구
- 피의자 성명: 허민회
- 혐의: 살인 교사
타닥타닥-.
그날 늦은 밤까지 검사실에 남아 영장을 친 나는 다음 날 아침 일찍 울산구치
소로부터 박재철의 진술서까지 받아냈다.
해당 메모는 자신이 남긴 것이며, 그 해석은 허민회로부터 검사 백동준의 살
해 청부를 지시받았다는 내용이었다.
이렇게 완벽하게 준비했으니 당연히 기각될 일은 없었다. 판사가 출근하자마
자 허민회의 체포 영장은 발부되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유재형 수사관은 물론 경찰 병력까지 대동하여 영장 집행을
위해 허민회가 있는 곳으로 달리는 중이다.
곧이어 도착한 곳은 울산 시내의 한 단독주택. 허민회가 가족과 함께 머무르
는 집은 서울에 따로 있고, 이곳에는 울산에 내려와 있을 때만 기거한다고 한다.
거의 숲이 아닌가 싶을 정도의 정원 가운데에 중세 시대의 성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우뚝 솟아 있는 2층짜리 건물을 혼자 쓴다니.
심지어 평범한 사람들은 평생 월급 모아도 못 살 이 집이 본가도 아니고 일종
의 별장이라니. 재벌이 좋긴 한가 보다.
띵동, 쾅쾅쾅쾅-.
초인종을 눌러도 안에서 반응이 없자 유재형 수사관이 거칠게 철로 된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안에서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침 댓바람부터 뭐야? 나가 봐.”
“네. 도련님. 누구세요?”
먼저 들린 남자의 목소리는 얼마 전에도 들은 허민회였고, 뒤따른 중년 여성
은 가정부인가 보다.
유재형 수사관이 목에 힘을 잔뜩 준 채로 초인종의 마이크에 얼굴을 바짝 가
까이 댄 채 대답했다.
“검찰에서 나왔습니다. 허민회 씨 체포합니다.”
“에그머니나, 도련님. 이게 무슨 일이래요?”
“나 법정 불구속 판결 나온 지 얼마나 됐다고 또 검찰이야? 판사가 불구속이
라는데 검사 따위가 나를 체포한다고?”
유재형 수사관한테서 바통을 넘겨받을 타이밍이었다. 나는 초인종 옆 카메라
에 방금 받아와 따끈따끈한 체포 영장을 들이밀었다.
“다른 사안입니다. 이미 체포 영장 발부됐습니다. 순순히 문 열고 나오십시오.”
“X발. 백동준이 또 너야? 너 진짜 죽고 싶어?”
푸흡-.
나보다 먼저 웃음을 터뜨린 건 옆에 있던 유재형 수사관이었다. 지금 내 살인
교사 혐의로 영장이 발부됐다는데 또 나한테 죽고 싶냐고 물어보다니.
“문 안 여시면 부수고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띠링-.
내 경고에 집안에서 인터폰을 끄며 우리의 대화가 중단되었다. 그러고 나서
얼마 안 있어서 조금 전의 그 가정부가 문을 열고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저기, 검사님이신가요?”
“네. 맞습니다.”
“저희 도련님이 문 부수고 들어오셔서도 못 잡으면 어떻게 할 거냐시는데요?”
이게 무슨 술래잡기인 줄 아나? 어떻게 되긴. 행여나 그런 일이 발생하면 허
민회는 그 유명한 수배범이 된다.
전국에 얼굴 사진과 죄목을 담은 전단이 쫙 뿌려지고 경찰에 신원이 확인되는
순간 바로 현장에서 체포된다.
죄목이 무려 살인 교사이니 현상금도 넉넉하게 걸려서 경찰뿐만 아니라 전 국
민의 표적이 되는 건 시간문제다.
HL 그룹 둘째 아드님이라고 얼굴도 빤히 알려졌으니 가문 망신은 망신대로 다
시키고 밖에 나다니지도 못하는 처지가 되는 것이다.
“어떻게든 잡히게 돼 있습니다.”
내 단호한 대답에 가정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래도 말이에요, 만약에 못 잡으면 어떻게 되나요?”
정말 만약에 영원히 못 잡으면 미제 사건이 되는 건데, 이 가정부는 왜 이렇
게 무리한 가정까지 하면서 관심도 없을 것 같은 형사 절차를 묻는 걸까?
“그럴 일 없게 만들어야 하니까 비키세요!”
내 옆에서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안달이 나 있던 유재형 수사관이 고함을 질
렀을 때였다. 가정부가 눈을 꽉 감더니 그녀의 마음속 영상이 내 눈앞에 떠올
랐다.
[목욕 가운 차림의 허민회가 인터폰을 끄더니 드넓은 거실을 서성인다. 그러
다가 가정부에게 소리를 빽 지른다.]
[“나 지금 옷만 갈아입고 바로 서울로 튈 거니까 아줌마 나가서 시간 좀 끌어.”]
[“네? 제가요? 검사님이 오신 것 같은데 무슨 수로요?”
[“나가서 아무거나 막 물어봐. 그래. 못 잡으면 어떡할 거냐고 막 약 올려.
알겠지?”]
[허민회가 가정부의 대답은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자동차 열쇠를 집어 든 채
옷방으로 향하고, 가정부는 쭈뼛쭈뼛 대문을 향해 나온다.]
하아? 허민회 이 새끼 진짜 튈 생각이었네? 나는 가정부를 밀치고 집안으로
들어가려는 유재형 수사관에게 얼른 귓속말했다.
잠시 후, 나와 같이 온 경찰 병력이 허민회의 집을 빙 둘러쌌고 차량 두 대는
긴급하게 차고 앞을 틀어막았다.
나 역시 경찰 두 명에게만 집 안으로 들어가라고 지시한 뒤 유재형 수사관과
함께 급히 차고 쪽으로 달려갔다.
끼이이익-.
차고 문이 열리며 급발진을 하려던 허민회의 슈퍼카가 경찰차에 가로막혀 급
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죽어도 감옥에 가기는 싫었는지, 허민회가 급히 창문을 올리며 차 안으로 몸
을 숨겼다. 쟤는 명색이 재벌인데 체면도 없나?
똑똑똑-.
이미 독 안에 든 쥐였기에 나는 닫힌 창문에 노크하며 조용히 타일렀다.
“좋은 차 망가뜨리기 싫으시면 조용히 나오시죠?”
딸칵-.
그러자 창문이 정말 0.5cm 열리며 그 안에서 허민회의 고함이 터져 나왔다.
“이번엔 또 뭔데! 왜 또 잡아가는 거냐고!”
보통 범죄자를 잡으면 이런 반응을 잘 안 보인다. 자기가 잘못한 게 뭔지 명
확히 아니까 뭘로 잡혀가는 건지 물을 이유가 없다.
그런데 허민회의 첫 항변이 이거라면, 검사로서는 지은 죄가 하나가 아니라고
의심해 볼 수밖에 없지 않나?
그래도 물으니 친절히 대답은 해 줘야겠다. 나는 잠시 자켓 안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체포 영장을 다시 꺼내 허민회의 눈앞에 보여주었다.
“여기 적힌 대로 살인 교사 혐의입니다. 마린다 원칙 고지는 저번에도 해 드
렸는데, 모든 진술 거부할 수 있고 지금부터 하시는 말씀은 법정에서 불리하
게 작용할 수 있습니다. 변호인도 선임할 수 있습니다.”
크흡-.
얘는 저번에 조사실에서도 그러더니, 이 고지 들을 때마다 똥을 무더기로 씹
은 표정을 되게 생생하게 지어준다. 체포하는 맛이 있달까?
쾅쾅쾅쾅쾅-.
유재형 수사관이 그 커다란 주먹으로 차 보닛을 부술 듯이 두드리며 소리쳤다.
“빨리 안 나와요? 끌려 나와서 수갑 차고 연행되고 싶습니까?”
빠아아앙-.
그 물음에 대한 허민회의 대답은 클랙슨 소리였다. 차 안을 보니까 비키라고
손으로 누르는 게 아니라, 얼굴을 핸들에 푹 파묻고 있네.
“그아아악! 백동준!”
얼마나 절망적이었으면 그 절규가 클랙슨 소리를 뚫고 선명하게 들려오더라.
그렇게 체포된 허민회는 쭉 묵비권을 행사했다. 그러다가 조사받으면서 가끔
씩 면전에서 나한테 욕을 하길래 사뿐히 모욕죄 하나 더 추가해 주었다.
물론 허민회가 아무 말 안 한다고 해도 유죄 입증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김휘한과 박재철의 진술이 원가 일관됐고 물증으로 업무 수첩까지 있었으니까.
게다가 박재철의 수첩에 적힌 다른 지시 사항들 때문에 오히려 죄가 더 추가
되기도 했다. 얘는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사람 있으면 일단 패고 보는 습관이
있더라.
수첩을 통해 확인된 폭행 교사 건수만 6개. 이중에는 심지어 성해조선소 노조
위원장이었던 정규석을 타게팅한 건도 있었다.
그때 내가 사건을 빨리 마무리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아버지 동료분도
험한 꼴 당하실 뻔했더라.
이 때문에 체포 영장에 이어 구속영장도 신속하게 발부되었으며, 뒤이어 1심
재판까지 원활하게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이번에 허민회가 선고받은 형량은 무려 징역 13년. 강력 범죄였기에
이번에는 법정 불구속이라는 특혜도 없었다.
휴-.
회귀 전의 세월부터 치자면 무려 16년이 넘게 걸렸으니 긴 싸움이었다. 그리
고 나는 그 싸움에서 마침내 이겼다.
이제 이 사건은 내 손을 떠나 공판 담당 검사가 2심을 진행 중이지만, 미세한
형량 조정 외에 법적 다툼의 여지는 없다.
이변이 없는 한 허민회는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감옥에서 푹 썩어야 하며,
HL 그룹의 승계는 꿈도 못 꾸게 됐다.
그럼에도 한 가지 찝찝한 게 남아 있었다면, 나와 내 부모님을 죽이고 나를
한 번 더 죽이려고 한 사람한테 주는 벌로 저게 충분한가 싶긴 하더라.
게다가 허민회 정도 되면 감옥에서도 영치금 팍팍 쓰면서 끗발 좋은 죄수, 소
위 말하는 ‘범털’로 살아가겠지.
다른 죄수들이 하늘처럼 떠받들어줄 테니, 그 안에서 그럭저럭 적응만 되면
또 갑의 삶을 이어나갈 가능성이 크다.
억지로, 억지로 나는 법조인이고 원래 법은 저렇게 처벌한다고 스스로를 설득
해 봐도 마음 한구석이 찝찝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어쨌든 업무에 복귀해서 사건을 처리하고 있던 어느 날, 허민회의 공판 담당
검사로부터 그 찝찝함을 조금이나마 씻어 줄 수 있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 이야기를 듣는데 검사로서 범죄 소식에 대놓고 웃을 수는 없어도, 허민회
한테 피해를 당한 사람으로서 속이 시원해지긴 하더라.
구치소에서 허민회랑 같은 방을 쓰던 죄수 중에 동성애자가 있었는데, 돈 많
은 파트너에 대한 패티쉬 같은 게 있었나 보더라.
그 동료 죄수는 어차피 구치소까지 들어와서 끝난 인생 즐기기나 하자는 생각
이었는지, 허민회한테 그 패티쉬를 시원하게 풀고야 말았다고 한다.
푸흡-.
이걸로 허민회가 감옥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알고 그 안에서 깊이 반성하리
라는 희망을 가져 본다.
* * *
허민회의 2심이 진행되는 동안 나의 삶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검찰 인사 발령
시즌이 되었고, 나는 성해지청을 떠나게 되었다.
정든 동료들한테는 조금 미안하지만, 이곳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을 다 했기에
섭섭함보다는 시원함이 앞서더라.
내가 새로 발령받은 곳은 검찰 권력의 핵이라고도 불리는 서울중앙지검이다.
물론 이곳에서 내 관심이 가는 곳은 따로 있었다.
바로 HL 그룹의 본사가 서울중앙지검 관할 구역 안에 있다는 것이었다. 허민
회를 꺾었으니 이제는 HL 그룹을 먹을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