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내부의 적을 역이용하다 (2)
자기가 찾아와 놓고 뜨뜻미지근하게 말끝을 흐리는 차진명에게 박재철이 대답
을 재촉했다.
“지금 내가 여기 들어와 있는데 들어도 되는 말 안 되는 말이 어디 따로 있겠
냐? 뭔데 그래?”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인 차진명이 말을 반 바퀴쯤 돌렸다.
“쫓겨난 사람 이야기하기는 조금 뭣한데, 그래도 너랑 직접 상관있는 걸 수도
있으니까. 왜, 허민회 전 사장이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사람한테는 폭력적인
방법도 동원하고 그랬다며. 그것도 개인적으로가 아니라 사람까지 사서.”
친구의 입을 통해 들은 이 소문에 박재철은 소름이 돋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일을 중간에서 처리한 게 바로 자신이었으니까.
그의 깔끔한 일 처리가 아니었더라면 그중 많은 사건이 소문으로만 끝나지 않
고 수면 위로 불거져 올라왔을 것이다.
“어, 뭐, 그런 얘기가 있었지.”
여기까지는 회사 동료로서 하는 이야기였고, 다음부터가 오늘 점심에 백동준
검사와 차진명이 기획한 일이었다.
“이번에는 그 폭력이 너를 향할 거라는 말을 들어서.”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나도 건너건너 들은 얘기라 정확히는 모르는데, 너 이번에 허민회 전 사장
지시받고 고위급 인사 하나 보내려다가 여기 들어온 거라며?”
끄응-.
박재철의 신음이 깊어졌다. 백동준이 아무리 새내기여도 검사라고 하면 고위
급 인사일 수도 있지. 그런데 그 소문이 회사에 벌써 났단 말인가?
옆에서 그들의 대화를 기록하고 있는 교도관의 눈치를 슬쩍 본 박재철이 잠시
단어를 고르다가 물음을 이어갔다.
“그게 나 잡아온 검사가 하는 얘긴데, 그랬다고 치고 네가 회사에서 건너들은
얘기인가 뭔가 그다음 내용은 뭔데?”
“그러니까 허민회 전 사장 입장에서는 그냥 네가 혼자 그 고위급 인사 보내려
고 하다가 감옥 들어온 거로 치고 네 입을 다물게 하면 만사 오케이 아니겠느
냐, 그런 거지. 너무 신경 쓰지는 말고. 뜬 소문일 수도 있으니까.”
“아니, 잠깐만 그 얘기를 허민회 대표 이사가 했다고?”
당황한 박재철의 물음에 차진명의 능청이 한 번 더 이어졌다.
“나야 모르지. 허민회 전 사장 짤리고 나서 나는 얼굴도 본 적 없는데. 뜬 소
문 출처 찾기가 보통 일 아닌 거 너도 잘 알잖아. 그래도 네가 원하면 알아는
볼까?”
따닥, 따닥-.
그다지 춥지도 않은 날씨였건만, 박재철의 턱이 공포로 인해 떨리며 그 안에
서 어금니가 심하게 부딪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모시는 주군 허민회가 자신을 이곳에서 꺼내줄 거라고 굳
게 믿었지만, 상황은 정반대일 수도 있었다.
허민회가 말하는 입을 다물게 한다는 것의 뜻이 뭔지 박재철이 모를 리가 없
었으니까. 죽은 자는 말을 할 수 없는 법이다.
방금 차진명이 말한 대로 굳이 자신을 이곳에서 꺼내는 것보다 이 안에 영원
히 묻어 버리는 게 허민회로서는 훨씬 간결한 일 처리라는 것도 동의하지 않
을 수 없었다.
자신의 충성심을 허민회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그의 심장이라도 헤집어 파악
할 방법이 없는 이상 차진명의 말이 실현될 가능성은 너무나 농후했다.
“아, 아니. 그럴 필요까지는 없고. 면회 와 줘서 고마워.”
“너 괜찮은 거 맞지? 조금 전에 내가 한 말 그냥 반대쪽 귀로 흘려 버려.”
처음부터 말을 안 해 줬으면 모르겠으나, 이제와서 어떻게 흘릴 수 있단 말인
가? 흰 곰을 생각하지 말라고 한다고 해서 곰이 생각 안 나는 게 아니지 않은가?
잠시 후, 차진명은 간단한 인사를 남기고 돌아갔고 홀로 남은 박재철은 더욱
깊은 패닉에 빠져들었다.
* * *
곽한성이 밀어 넣고 간 업무 때문에 나는 밤늦게까지 검사실에 남아 이 서류
저 서류 사이를 종횡무진 오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문자메시지 한 통이 도착했다. 오늘 점심에 만나서 번호를 튼 송민
지 사무관의 남자친구 차진명이었다.
- 말씀하신 대로 처리 잘 된 것 같습니다. 박재철 그 친구 상당히 불안해하는
눈치였어요.
오케이. 인간이 가장 견디기 힘든 감정이 불안함이라고 하지 않던가? 더군다
나 그게 자신의 생명에 관한 것이라면 박재철은 어떤 식으로든 반응할 수밖에
없다.
- 감사합니다. 다음에 더 비싼 밥 살게요.
- 밥은 한 번 얻어먹었으니까 다음엔 제가 사기로 하고요, 이걸로 허민회 그
자식 확실히 보낼 수 있는 거죠?
- 박재철 씨가 저한테 넘길 수 있는 살인 교사 증거가 뭐냐에 따라 다른데,
유죄 입증만 되면 형량은 최소 10년입니다.
- 기대할게요.
오늘 점심에 차진명을 만났을 때 말이 상당히 잘 통하더라. 나보다 큰 건 아
니었어도, 그 역시 허민회에 대해 상당한 반감을 갖고 있었으니까.
이유는, 몇 달 전에 회사 앞에서 남자친구를 기다리던 송민지 사무관에게 허
민회가 이성으로서 접근했고 그때 차진명의 눈앞에서 선을 넘었나 보더라.
자신의 여자친구가 회사 대표에게 성희롱과 성추행에 가까운 대우를 받는 걸
눈앞에서 봤으니 꼭지가 안 돌 수 없었겠지.
이 얘기 듣고 송민지 사무관과 그저 일터의 동료일 뿐인 나도 화가 나던데 당
시 차진명의 심정은 오죽했겠는가?
그래도 전화위복이라고 그 덕분에 차진명은 내 계획을 순순히 받아들였고, 오
히려 자신이 나서서 시나리오를 변경하기까지 했다.
결과적으로 꽤 마음에 드는 최종안이 뽑혔고, 그 시나리오가 방금 박재철을
강타했다니 이제 기다릴 일만 남았다.
그리고 그 기다림조차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보던 서류를 마무리할 때쯤이었
다. 나 때문에 덩달아 퇴근하지 못하고 있던 송민지 사무관이 급히 검사실 문
을 열고 들어왔다.
“검사님!”
“네. 사무관님.”
“울산구치소에서 검사님 급하게 들어와 보셔야 할 것 같다는데요? 용의자 박
재철이 검사님한테 자백할 게 있는데 지금 아니면 안 할 거라고 난동을 부리
고 있나 봐요.”
후훗-.
미끼가 물에 들어가자마자 아주 야무지게 물어주네. 이제 손맛 살려서 제대로
한번 당겨 볼까나?
“네. 지금 제가 바로 간다고 전해 주세요. 혹시 모르니까 박재철 씨한테 교도
관 한 명 딱 붙어서 신변보호하라고 해 주시고요.”
“알겠습니다.”
부우우웅-.
나는 즉각 자동차에 시동을 걸고 박재철이 있는 울산 구치소로 향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파랗게 질린 그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자백할 게 있으시다고요?”
“네, 네. 검사님. 아까 아침에는 제가 무례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검사님이
하신 말씀 맞습니다. 검사님 죽이라고 허민회 대표 이사가 시켰습니다.”
“박재철 씨는 중간에서 메시지만 전달하신 거고요?”
사무적인 투의 내 질문에 박재철은 뭐가 그리 급한지 속사포 랩을 하듯 우다
다다 자신의 할 말을 쏟아내었다.
“네, 네. 그렇습니다. 제발 부탁이 하나 있는데, 허민회 대표 이사가 아무 짓
못 하게 지금 당장, 안 되더라도 최대한 빨리 구속시켜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안 돼요.”
박재철, 이 사람 허민회한테 죽을까 봐 되게 무서운가 보다. 지금쯤 범죄 영
화나 드라마에서 한 장면씩 꼭 나오는 감옥 내 죄수간 살해 사건을 떠올리고
있겠지.
자기 목숨 이렇게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 아무리 위에서 시켰다고는 해도 남
의 목숨은 왜 그렇게 막 다뤘는지 참 의문이다.
턱의 떨림이 관자놀이를 타고 안경까지 전달돼 눈에서 동공 대지진을 일으키
고 있는 박재철이 급하게 되물었다.
“네?”
“허민회 즉시 구속, 안 된다고요. 지금으로서는 제 능력 밖이에요.”
“뭐가 부족하시단 겁니까?”
옳지, 옳지. 이렇게 자기 애간장 다 녹이며 다급하게 나와 줘야지.
“증거요. 박재철 씨 진술만 갖고 허민회의 범죄 사실 소명이 안 돼요. 제가
구속영장 쳐도 판사가 바로 기각할 거예요.”
“무슨 증거가 있어야 됩니까? 제가 갖고 있는 건 다 드리겠습니다.”
“허민회 씨가 살인을 지시했다는 걸 객관적으로 입증할 증거가 있어야죠. 예
를 들면, 육성 녹음이라든가, 문자메시지 기록이라든가요. 갖고 계십니까?”
푸욱-.
박제철의 고개가 떨궈지면 좌우로 움직였다.
“아뇨. 허민회가 녹음은 절대 허락 안 했고요, 그런 지시를 문자메시지로 할
리는 없지 않겠습니까?”
“꼭 그 두 가지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뭐든 허민회가 한 제 살해 지시를 기록
해 둔 게 있으면 돼요.”
그 순간 그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기록이요? 그거라면 있습니다. 제 업무 수첩이요. 허민회가 자기 지시 빠뜨
리는 걸 하도 싫어해서 하달받은 사항 꼼꼼하게 기록해 두면서 일 처리했거든
요. 거기 이번 업무 지시도 적어 뒀습니다.”
오케이. 내가 바라던 게 바로 이거였다.
“그 업무 수첩 어디 있습니까?”
“원래는 항상 제 몸에 지니고 다니는데 오늘 아침에 갑자기 체포되는 바람에
집에서 못 갖고 나왔습니다. 그거 어떻게 드리면 되나요?”
“자택에 있으시다는 거죠? 그럼 제가 지금 가서 가져오겠습니다. 박재철 씨
주소는 제가 이미 알고 있고, 집안 어디에 있습니까?”
희망을 찾자 박재철의 속사포 랩이 다시 이어졌다.
“출근 준비 중이어서 거실 테이블에 올려두었습니다. 아시는 주소로 가셔서
초인종 누르시면 저희 안사람이 문 열어줄 겁니다. 너무 놀래키지는 마시고,
전화 한 통화면 허락해 주시면 제가 미리 언질 넣어 놓을 테니 그 수첩 달라
고 하시면 알아들을 겁니다.”
이렇게까지 적극적인 협조를 받아낼 수 있을 줄이야. 나는 주머니에서 핸드폰
을 꺼내 박재철에게 내밀었다.
“지금 이걸로 전화하시죠.”
“네. 감사합니다.”
* * *
다시, 부아아아앙-.
울산구치소에서 박재철의 자택으로 급히 달려간 나는 그 업무 수첩을 받아내
는 데에 성공했다. 그리고 지금은 짧았지만, 소득은 컸던 여정 끝에 내 검사
실로 돌아와 있다.
“사무관님.”
“네! 검사님. 가셨던 일은 잘되셨어요?”
“네. 박재철이 허민회 전 HL 중공업 대표 이사가 저 살해 지시했다고 자백했
어요. 그리고 증거도 받아왔고요.”
자신도 이 쾌거에 일조했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야근에 지쳐 있던 송민지
사무관의 얼굴이 금세 밝아졌다.
“잘됐네요!”
“송 사무관님이랑 남자친구 분 도움이 컸어요. 울산구치소 쪽에 전화 한 통만
더 넣어 주실래요? 박재철한테 수첩 지금 제 손에 있다고만 전해 주세요.”
“수첩이요?”
나는 방금 받아온 증거물을 송민지 사무관을 향해 흔들어 보였다.
“네. 이 수첩인데, 저희가 나눈 이야기가 있어서 그렇게만 말하면 무슨 소리
인지 알 거예요.”
“네. 알겠습니다.”
자, 이제 허민회를 옴짝달싹하지도 못하게 옭아맬 증거를 열어볼 시간이었다.
최근에 나온 지시인 걸 감안하여 맨 뒷장을 펼쳤다.
끄응-.
이 사람 메모를 되게 암호처럼 하는 습관이 있네? 대부분 내용은 당사자가 아
니면 알아볼 수 없게 대단히 축약해서 적혀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나는 박재철이 허민회의 살해 지시 기록이라고 말했던 메모를
찾아낼 수 있었다.
- Kill p.p. W5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