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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 검사는 재벌을 사냥한다-26화 (26/51)

26화. 내부의 적을 역이용하다 (1)

김휘한 노인과의 조사를 마치고 나서 바로 옆 조사실에서 대기하고 있던 허민

회의 비서를 만나러 들어왔다.

“박재철 씨? 맞습니까?”

따닥-.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자 비서가 안경을 벗어 탁자에 내려놓으며 나를 노려보

았다.

“아침 댓바람부터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검사면 마음대로 사람 막 잡아 와

도 되는 거예요? 네?”

“제 마음대로 잡아 온 건 아니었고요, 이미 법원에서 정식으로 체포영장과 구

속영장까지 발부되었습니다.”

“무슨 이유로요? 지금 출근해야 하는 사람을 이렇게 잡아놓는 게 말이 됩니까?”

이 사람한텐 출근이 되게 중요한 가치인가 보다. 이유는 체포 당시에 경찰들

한테 이미 들었을 텐데 자기가 잘못한 짓 또 듣고 싶다면 이야기해 줘야지.

“살인 교사 혐의로 체포되셔서 이 자리에 앉아 계십니다. 저는 담당 검사이고

요, 그렇게 저를 윽박지르실 처지가 아니십니다.”

“살인 교사요? 제가 누굴 죽이라고 지시했다는 건가요?”

검찰청에 자주 안 와 본 잡범들이 쓰는 스킬이다. 당황해서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보려 일단 잡아떼고 보는 것이다.

“저를 죽이려고 하셨더라고요. 실행범 김휘한 씨께서는 이미 죄 인정하셨고,

살해 지시하신 녹음 파일까지 있습니다. 이런 게 있으니까 법원에서 영장이

나온 거죠.”

“그런 게 있을 리가요?”

내가 들고 온 태블릿 PC에서 어젯밤 녹음 파일을 재생하자 내 앞에 앉은 박재

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이 정도면 범행 자체는 인정하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이 작자가 범죄 경험이 없긴 한가 보네. 이렇게 빼박 증거가 나왔는데도 잡범

들이 쓰는 두 번째 스킬을 들이밀었다.

“됐고, 전화 한 통만 합시다. 이거 원, 오는 길에 핸드폰까지 뺏어가는 법이

어딨습니까?”

“누구랑 통화하시려고요?”

“그건 댁이 알 거 없고요!”

당장 감옥에 처박혀서 인생 끝날 처지가 되어서도 이렇게 기세등등한 걸 보니

믿는 구석이 있나 보다. 누군지는 뻔하지.

“허민회 씨입니까?”

“그 이름 어디서 함부로...”

이 작자는 쪽팔리지도 않은지 자신의 범죄 증거인 녹음에 나온 말을 그대로

반복하네.

“입에 올리냐고요? 저는 이 사건을 맡은 검사고요, 박재철 씨 외에 살인을 교

사한 사람이 한 명 더 있다는 정황을 이미 파악했습니다. 지금 전화하시려는

사람과 제 살해를 사주한 사람, 둘 다 허민회 전 HL 중공업 대표 이사 맞죠?”

끄응-.

내가 정곡을 쿡쿡 쑤셔대자 박재철은 한참 신음만 흘리더니 내려두었던 안경

을 쓰고서 나를 향해 소리를 버럭 질렀다.

“내가 이렇게 잡혀 와 있는 거 허민회 대표 이사님이 아시면 가만히 안 계실

겁니다. 당신 후회할 줄 아세요.”

하긴, 이름도 함부로 못 부르게 하니 박재철한테는 허민회가 하늘 같은 존재

겠지. 자기를 빼내 줄 힘도 있다고 믿을 테고.

“제가 허민회 씨를 후회하게 만들어 드릴 겁니다. 박재철 씨한테는 제가 따로

제안드릴 게 있는데 한번 들어 보시겠습니까?”

허민회 외에도 빠져나갈 구멍이 있다는 희망 때문인지 더러운 안경알 뒤에서

그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뭔데요?”

“제가 의심하고 있는 이번 범죄의 흐름은 이렇습니다. 허민회가 김휘한을 통

해 저를 죽이려고 했고, 박재철 씨는 허민회 씨의 비서로서 중간에서 그 말을

전달하신 거죠.”

“그랬다고 치면, 뭐가 달라집니까?”

달라질 게 아주 많지. 여기부터가 박재철을 꼬드겨 허민회의 범죄 사실을 실

토하게 만들 분수령이다.

“박재철 씨가 살인 교사 혐의를 다 뒤집어쓰느냐 그냥 말만 전달한 것뿐이냐

의 차이죠. 법적으로 이 둘은 상당히 다릅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법리적으로 설명하자면, 허민회가 살인 교사범이 되어쓸 때 박재철은 그에 협

력한 종범으로만 처벌받는다.

반면, 박재철이 자신의 의지로 김휘한에게 내 살해를 지시한 게 된다면 이 사

람 본인이 살인교사범이 된다.

후자의 경우 박재철은 내가 지금 허민회한테 때리려고 하는 최소 징역 10년

형을 자신이 고스란히 받아내야 할 수도 있다.

물론 지금 박재철에게는 이런 딱딱한 접근보다는 훨씬 간단한 버전의 설명이

와닿을 것이 분명했다.

“배후를 대지 않으면 저를 죽이려 한 책임을 박재철 씨가 다 지고서 감옥에서

평생 못 나올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역시 내 전략이 먹혔는지 그는 한참을 고민했다. 이제 저 입에서 허민회의 이

름만 나오면 게임이 끝나는데.

안타깝게도 박재철은 내 희망을 배신했다. 안경을 도로 내려놓더니 나를 향해

눈을 부라렸던 것이다.

“그거야 검사님 당신 이야기 아닙니까? 전화 쓰게 해 주십시오. 변호사 부르

겠습니다.”

휴-.

박재철이랑 나 모두에게 쉽게 갈 수 있는 길을 알려줘도 한사코 거부하네.

“변호사가 와도 크게 달라질 건 없을 겁니다.”

“변호사를 불러주실 분께서 움직이시면 많은 게 바뀌겠죠.”

아하, 그러니까 끝까지 내 말 대신 허민회를 믿어 보시겠다? 저러다 뒤통수

맞으면 무지하게 아플 텐데.

* * *

김휘한과 박재철의 대면 조사 모두 안타깝게도 당장은 큰 소득 없이 끝나고

말았다. 이제 내부의 적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검사실로 들어가고 있

었다.

누굴까? 일단 김휘한의 절도 사건은 내 선에서 위로 보고가 올라가지 않았으

니 결재 라인에 있는 검사일 가능성은 적다.

그렇다면 아주 가까이에서 나를 항상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라는 건데. 설마

우리 검사실 식구들일까? 아니면 그날 갔던 카페 주인?

마음 침투 능력이 있으니 의심가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 보며 김휘한과

박재철, 허민회에 대해 이야기하며 떠보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찾을 수 있

을 것 같기도?

그런 생각에 잠겨 검사실에 거의 다 도착했을 때 안쪽에서 먼저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나타났다.

“검사님, 아침부터 바쁘셨다고요. 어제는 큰일도 당할 뻔하셨고요.”

다른 사건 현장으로 출동하는 길에 마주친 유재형 수사관이었다.

“일이 계속 꼬이네요. 그래도 좋은 아침 되십시오.”

“네. 검사님도 힘내시고 꼭 조심하세요.”

“감사합니다.”

그 정도의 간단한 인사만 마치고 검사실로 들어왔다. 자기가 먼저 내가 당한

일을 언급하면서도 딱히 읽히는 게 없었던 것으로 보아 유재형 수사관은 내부

의 적이 아닌가 보다.

그런데 어째 송민지 사무관의 표정이 굉장히 안 좋아 보였다. 뭔가 마려운 걸

억지로 참고 있는 것 같았달까?

“송 사무관님?”

내 부름에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네? 네! 검사님.”

“어디 편찮으세요?”

“아, 티 났나요? 몸이 안 좋은 건 아니고요, 마음이 조금 불편하네요.”

“왜요? 남자친구가 속 썩여요?”

나는 그냥 해 본 말이었는데 송민지 사무관이 대단히 진지한 투로 나왔다.

“어? 어떻게 아셨어요?”

“잘 달래 봐요.”

내가 남의 연애사까지 개입할 생각은 아니었기에, 이 정도의 우스갯소리로 넘

어가려는데 도리어 송민지 사무관이 나에게 다가왔다.

“검사님.”

“네. 사무관님.”

“사실은 제 남자친구 이야기가 검사님이랑도 상관이 없지는 않은데요.”

나는 정말 정말 남의 연애사에 휘말리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을 하며 조심스럽

게 되물었다.

“저는 사무관님 남자친구 분 얼굴이랑 이름도 모르는데요? 무슨 일이실까요?”

“얼굴이랑 이름은 쭉 모르셔도 되는데, 걔가 어디서 일하는지는 제가 꼭 말씀

드려야 할 것 같아요.”

“네. 어딘데요?”

송민지 사무관은 자신이 정말 중죄를 저질렀다는 표정이 되어 한숨까지 내쉰

뒤에야 대답했다.

“HL 중공업에서 일해요.”

“혹시 성해 조선소요?”

“아뇨. 울산에 있는 HL 중공업 본사요. 경영지원팀에 있어요.”

그 뒤로 송민지 사무관이 쭉 풀어낸 썰은 내 어안을 벙벙하게 만들었다. 이렇

게도 내부의 적이 생길 수 있는 거였어?

내가 어제 쌓인 일거리를 두고 김휘한을 만나러 나가면서 송민지 사무관에게

대략적인 사정 설명을 했다.

그걸 들은 그녀는 저녁에 남자친구와 데이트를 하면서 별 뜻 없이 그런 진상

피의자도 있다는 투로 그 이야기를 전했다.

그랬다가 HL 중공업 본사에서 일하며 박재철과도 친분이 있는 그녀의 남자친

구를 통해 내가 김휘한을 만났다는 사실이 결국 허민회한테까지 전해지게 된

것이었다.

괜히 눈에 불을 켜고 내부의 적을 찾으려던 중 맥이 탁 풀릴 정도로 황당하게

밝혀진 정체였다.

“그렇게 된 거였군요. 앞으로 수사 중인 사안은 사담으로라도 밖으로 안 나가

게 주의해 주세요. 저희 검찰청에서 일하잖아요.”

“죄송합니다. 경위서 써서 올릴까요?”

“아뇨 솔직하게 말씀해 주셨으니까 괜찮아요.”

“용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정말 주의할게요.”

나한테 앙심을 품고 수사 정보를 허민회한테 넘긴 거라면 큰 문제였겠지만,

사정을 듣고 보니 크게 문책할만한 일은 또 아닌 것 같아서 이쯤 하고 넘어가

려고 했다.

송민지 사무관이 솔직히 털어놓지 않았다면 지금쯤 내부의 적 색출하겠다고

온갖 사람들을 다 의심하고 있을 텐데 그 에너지와 시간 아끼는 게 어디란 말

인가?

그런데 그때, 아주 좋은 생각이 났다. ‘내부의 적’이 알고 보니 완전한 내 편

이었다면 이걸 이용해서 박재철을 압박해서 배후를 털어놓게 할 수도 있는 일

아닌가?

나는 급히 자기 자리로 돌아가려는 송민지 사무관을 불러 세웠다.

“사무관님.”

“네?”

“남자친구 분이랑 식사 약속 한 번만 잡아 주실 수 있을까요?”

그 물음에 송민지 사무관은 도로 불안한 표정이 되어 되물었다.

“혹시 문제가 된다면 제가 책임질 수 있을까요? 남자친구한테는 제가 따로 잘

말할게요. 검사님께서 그이까지 만나실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어휴, 제가 뭐라고 사무관님 남자친구 분한테 책임을 묻겠어요? 그런 거 아

니고요.”

그 뒤로 쭉 이어진 내 작전 계획을 들은 송민지 사무관의 얼굴에 좋은 속죄

기회를 얻었다는 듯 다시 웃음이 돌아왔다.

“언제 만나실래요?”

“빠를수록 좋죠. 오늘 점심도 가능할까요? 밥값은 제가 낼게요.”

“검사님 돈 많으시니까, 그러세요. 비싼 거 얻어먹으라고 해야겠다.”

농담까지 하는 걸 보니 기분 많이 풀어졌나 보네.

* * *

백동준 검사가 송민지 사무관의 남자친구와 점심을 먹은 그날 저녁, 구치소의

박재철은 면회 온 친구를 만나고 있었다.

“진명아, 와 줘서 고마워. 회사 분위기는 어때?”

송민지 사무관의 남자친구인 차진명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도 마라. 아주 폭탄 맞았지. 허민회 사장 짤리고 그나마 네가 비서실에서

기본적인 업무는 하고 있었으니까 회사가 돌아갔던 건데, 너까지 오늘 이렇게

되는 바람에 오늘 업무 거의 올스톱. 분위기가 하수상해서 그런지, 이상한 말

도 돌던데?”

“뭔데? 자세히 얘기해 봐.”

큼큼-.

살짝 긴장한 듯 헛기침을 몇 번 한 차진명이 대답을 이었다.

“나는 네가 이 말 들어도 되는지 잘 모르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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