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또 죽이려고? (2)
조금 전까지 나를 죽이려고 했던 사람한테 내가 왜 이런 호의를 베풀어 주느
냐? 이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법정 불구속으로 빠져나가 버린 허민회를 잡을 절호의 기회로 만들 수 있으니
까. 내가 이 노인 하나를 감옥에 넣어서 뭐 한단 말인가?
허민회는 처음부터 자기가 빠져나갈 생각으로 이런 무기력감에 빠진 노인에게
살인 사주를 넣었을 것이다.
이 노인이 처벌받더라도 자기는 빠져나갈 수 있다는 판단이었겠지. 하지만 나
는 허민회의 목에 걸려 있는 이 줄을 놓치지 않을 생각이다.
나는 방금 죽임을 당할 뻔했다. 이 말은, 이번에 허민회에게 적용할 수 있는
죄목은 살인 교사, 즉 타인에게 살인을 지시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동정을 살 만한 동기 없이 자신의 수사 및 재판 결과에 따른 보복 살
해 지시이다. 이건 도저히 빠져나갈 여지가 없다.
아무리 재벌이어도, 우리나라 법이 봐 주는 건 배임, 횡령, 뇌물 공여 같은
경제 영역에 한정한다.
살인 같은 사회의 근본적인 질서를 흔드는 중범죄에 대해서는 재벌이고
‘5-3-3 법칙이고’ 간에 재판부에서도 봐 주는 일 따위는 없다.
이 경우에 예상되는 형량은 최소 10년 (교사범에게는 원칙적으로 실행범과 동
일하거나 더 높은 형량이 부과된다).
그러니 이 노인을 잘 붙잡고 들어가 방금 자수 받은 대로 그 몸통을 콱 쥐기
만 하면 나는 그토록 염원했던 대로 허민회를 오래오래 감옥에 처박아 둘 수
있다.
따 딱 따 닥-.
내가 보여준 호의에 그제야 긴장이 풀리는지 노인이 자기 이를 부딪치며 물었다.
“검사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한다는 게 뭔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큰일을 해 주셔야 하니 제 목적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를 죽이라고 허민
회가 시켰다고 하셨죠?”
“네. 그렇습니다.”
이것만 확실히 인정해 주면 이 김휘한 노인과의 대화는 쉽게 풀리지.
“그 말씀 믿고 저는 허민회를 살인 교사죄로 법정에 세울 생각입니다.”
“네? 그렇게 되면 저 또한 살인범으로 감옥에 가게 되는 거 아닙니까?”
내가 김휘한의 마음을 미리 읽은 게 진가를 발휘할 타이밍이었다. 결국, 그가
최종적으로 원하는 건 손녀딸의 정상적인 양육이었다.
자신이 감옥에 갈 걸 두려워하는 것도 아직 열 살도 채 되지 않았다는 그 아
이를 돌봐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으니까.
“그럴 수도 있습니다만, 할아버님 일이 잘못되더라도 제가 이거 하나는 약속
드리겠습니다. 손녀딸한테 5천만 원은 제 사비로라도 드리겠습니다.”
“검사님한테 그런 큰돈이 어디 있으시다고요?”
“혹시 최근에 검사 한 명이 주식으로 수십억 대박을 냈다는 뉴스 못 보셨습니
까?”
김휘한은 잠시 눈을 껌벅이더니 이내 생각이 났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이야기를 친구한테 듣긴 했습니다만, 그게 저희 지역 검사님이라는 것
도 알고 있고요. 설마...?”
저번 생과 이번 생을 통틀어서 돈이 많아 본 적이 처음인데, 이렇게 편하구나.
“네. 그게 바로 접니다. 그러니 손녀딸 양육비 걱정은 저한테 맡겨 두셔도 되
겠습니다.”
“아이고, 검사님. 그러면 제가 칼이 아니라 저희 아이를 데리고 검사님을 찾
아뵀어야 했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라도 정말 죄송하옵고, 제가 할 수
있는 일 말씀만 해 주시면 어디까지든 돕겠습니다.”
좋다. 실행범이 이렇게 내게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이상 교사범 역시 반쯤은
잡았다고 볼 수 있다.
나는 본격적인 이야기로 들어가기에 앞서 카페 내에 우리 이야기를 들을 만한
사람이 없다는 걸 한 번 더 확인한 후 질문을 이어갔다.
“허민회가 김휘한 씨한테 언제, 어디에서, 어떤 방식으로 제 살인을 지시했는
지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것만 명확하게 진술되고 그걸 뒷받침할 직접적인 증거가 하나라도 나오면
끝나는 게임이었는데, 김휘한이 말끝을 흐렸다.
“그게 말씀입니다. 검사님.”
지금까지 일이 너무 쉽게만 풀렸던 걸까?
“네. 말씀하십시오.”
“제가 허민회 HL 중공업 사장을 직접 만난 적은 없고, 얼마 전에 그 비서라는
사람이 저를 찾아와서 부탁했습니다. 백동준 검사님을 만나게 해 줄 테니까,
그, 그런 일을 저지르라고요. 그럼 보상은 HL 그룹에서 해 줄 거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허민회가 지시한 일이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어휴, 보상을 HL 그룹에서 해 준다는 이야기가 뭐겠습니까? 저 옛날에 조폭
생활할 때부터 허민회가 비서 시켜서 그런 일 한다는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었
습니다. 제가 거짓말 한 건 아닙니다. 정말입니다.”
끄응-.
이 말을 해석해 보면 허민회가 그동안 저지른 비열한 짓이 이거 한 건이 아니
라는 소리가 되는데?
그나저나 김휘한 역시 허민회가 뒤에 있다는 건 나랑 똑같이 심증만 갖고 있
을 뿐이라는 거지?
“그럼 그 비서라는 사람이 김휘한 씨한테 그런 지시를 했다는 녹음이나 문자
메시지 기록 같은 건 있으신가요?”
“아뇨. 차 안에서 둘만 나눈 이야기라 그 비서 차 블랙박스를 떼 보면 모를
까, 제가 갖고 있는 건 없습니다.”
“지금으로서는 법정에 서시더라도 지시를 받고 움직이셨다는 걸 보여주실만한
증거가 아무것도 없다는 말씀이시죠?”
내 캐물음에 김휘한은 금세 울상이 되고 말았다.
“그, 그렇습니다만, 그렇게 되면 제가 다 뒤집어쓰고 혼자 감옥에 가게 되는
건가요? 검사님께서 말씀하셨던 저희 딸아이 양육비는요?”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김휘한에게 한 가지 제안을 내놓았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시죠.”
그물을 들어봤더니 그 안에 걸린 고기가 없다고 낙담만 하고 말 내가 아니다.
목표했던 물고기가 있고, 낚싯대가 내 손에 쥐어진 이상 나는 낚고야 만다.
* * *
그날 밤, 곽한성이 쏟아붓고 간 잡무를 대략 마무리한 나는 퇴근하지 않고 검
찰청에서 사용하는 감청장치의 수신기를 책상에 둔 채 거기에 연결된 이어폰
을 귀에 꽂고 있었다.
이 수신기와 연결되어 있는 송신기는 지금 김휘한의 품에 들어 있다. 나는 김
휘한을 허민회와 그의 비서에게 다시 보냄으로써 살인을 지시했다는 녹음 기
록을 확보할 생각이다.
이 계획을 듣고 여러 번의 전과로 나름 형사 절차에 익숙한 김휘한이 위법 증
거 수집이 아니냐고 묻길래 확실해 답해 줬다.
대화 참여자가 그 대화를 녹음하는 건 절대 불법이 아니고, 따라서 법정에서
증거능력도 부정당하지 않는다고.
그 말에 용기를 얻은 김휘한은 내 제안을 수락했고, 지금은 문제의 그 비서를
만나는 중이다. 수신기를 통해 김휘한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 저 도저히 못 하겠습니다.
그리고 곧장 당황스러워하는 허민회 비서의 대답도 따라왔다.
- 아니, 대체 왜요? 원하셨던 만큼 돈 드린다니까요? 금액이 부족해요?
- 그런 게 아니옵고, 제가 아무리 조폭 생활을 했어도 사람을 죽인다는 게 참
생각해 보니 그렇습니다. 그것도 현직 검사라뇨. 그냥 없던 일로 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제가 선금받은 것도 없잖습니까?
- 아, 원하는 게 선금이었어요?
여기서 김휘한이 연기를 잘해 주어야 한다. 정말 원하는 게 돈인 것처럼. 나
와의 거래는 없었던 것처럼.
- 선금도 그렇고요, 총액수도 조금 더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오케이. 이 정도면 내가 가르쳐준 대로 잘 하고 있다.
- 더요? 얼마나요?
- 비서님께 드릴 말씀은 아닌 것 같고요, 허민회 사장님이랑 직접 만나서 이
야기하고 싶습니다. 저도 의뢰인 얼굴은 봐야 일을 믿고 하죠.
- 그 이름 함부로 입에 올리셔도 된다고 안 했습니다! 잠깐 기다리십시오. 제
가 전화 드리고 올 테니까.
그러고 나서 잠시 시간이 지난 뒤, 차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 뒤에 김휘한
의 물음이 따라왔다.
- 뭐라고 하십니까?
- 그 전에, 오늘 백동준 검사 만나셨다면서요? 왜 일 처리하지 않으셨습니까?
뭐야? 허민회 비서가 이걸 어떻게 알고 있어?
- 말씀드렸잖습니까. 그 금액으로는 도저히 사람, 그것도 현직 검사 죽이는
일까지는 못 하겠다고요.
- 알겠습니다. 직접 보겠다고 하시니까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 뒤로 한참 말 대신 차가 도로를 달리는 소리만이 수신기를 통해 전해져 왔다.
후, 하-.
이거, 내가 다 긴장되네. 지금 김휘한은 허민회를 만나러 가는 길일 테니 그
가 나의 살해를 지시하는 육성 녹음만 따 주면 모든 게 완벽하게 끝난다.
그런데 허민회가 아닌 엉뚱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들어가시기 전에 잠시 수색이 있겠습니다. (......) 이건 뭐죠?
이런! 수신기를 통해 들리는 목소리가 순간 확 커진 것으로 보아 몸수색 중
들킨 게 분명했다.
- 놓고 들어가겠습니다.
그게 그날 밤 내가 들을 수 있는 마지막 녹음이었다. 이것만 갖고는 죽도 밥
도 안 된다. 허민회의 이름을 김휘한만 언급했을 뿐, 비서조차도 그의 개입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분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올리지 말라고? HL 그룹에 대단한 충신 나셨네.
* * *
그렇다고 포기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나는 다음날 낡이 밝자마자 김휘한과
허민회의 비서를 살인 공모죄로 입건했다.
어젯밤 수신기를 통해 받아 둔 녹음 파일이 있었으니 구속영장 청구 및 발부
까지 대단히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그리고 만 하루가 채 되지 않아 김휘한과는 조사실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녹음, 녹화 다 꺼져 있으니 편하게 말씀 나누시죠.”
“... 네. 검사님.”
“어제 허민회는 만나셨습니까?”
김휘한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전에 말씀입니다, 제가 오늘 아침에 급하게 경찰들한테 잡혀 오느라 저희
손녀딸 밥을 못 챙겨줬습니다. 그 아이 잘 있는지 전화 한 통화만이라도 하면
안 될까요?”
“손녀딸은 제가 따로 경찰한테 부탁해서 지금 아동 보호 시설에 가 있습니다.
앞으로 금전적 지원은 제가 확실하게 할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제가 묻는 말
씀에 대답해 주십시오. 허민회 만나셨습니까?”
“네. 만나긴 했습니다.”
으으, 이 뜨끈미지근한 대답은 뭐람?
“무슨 말씀을 나누셨습니까?”
“검사님도 들으셨겠지만, 들어가기 전에 검사님이 주신 그 감청장치가 걸리는
바람에 돈도 못 받고 말도 못 듣고 그저 뺨만 맞고 나왔습니다.”
김휘한의 왼쪽 뺨이 잔뜩 부어 있던 게 이거 때문이었구나. 이렇게 되면 김휘
한한테서 더 얻어낼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그래도 이거 하나는 확인해야지.
“어제 비서랑 말씀 나누실 때, 저한테 이상한 녹음이 들리던데요. 제가 김휘
한 씨를 사전에 만난 걸 비서가 미리 알고 있는 것 같더라고요?”
“저도 그게 이상했습니다.”
“김휘한 씨가 따로 말씀하신 적은 없으시고요?”
그가 나한테 배신자로 찍힐까 봐 두려웠는지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
“절대로 아닙니다. 그건 어떻게 된 건지 저도 정말 모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일단 어제 약속드린 대로 저를 직접 공격하셨던 증거는 저만 갖
고 있겠습니다만, 금전을 받고 살인을 공모하셨다는 점에 대해서는 처벌 이루
어질 겁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됐다고 해서 꼭 나쁜 건 아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내가 허민회의 목에
걸어둔 줄은 김휘한 하나였다. 하지만 지금 나는 최소한 두 개의 줄을 잡고
있다.
하나는 지금 살인 교사 혐의를 쓰고 감옥에 들어와 있는 허민회의 비서. 그리
고 다른 하나는 우리쪽 정보를 허민회에게 넘긴 내부의 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