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또 죽이려고? (1)
곽한성은 검찰청을 떠나면서 나한테 온갖 잡범 사건들을 잔뜩 배당해 놓았다.
이건 뭐, 거의 검사 두세 명이 할 일을 나한테 떠넘긴 꼴이다.
곽한성이 속마음으로 외쳤던 ‘이 새끼, 어디 한번 죽어 봐라’라는 말이 업무
로 깔아뭉개서 죽이겠다는 뜻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처음에는 검사장인 곽한성이 없으니 사건의 재배당 권한을 넘겨받은 차장검사
한테라도 찾아가 볼까 하다가 관뒀다.
내가 직속 상사인 양경동에 성해지청의 우두머리인 곽한성까지 날렸으니 차장
이라고 해서 나를 곱게 볼 리는 없었다.
뭐, 내가 검사 두 명 날렸으니 세 명분의 사건을 맡아서 해결하면 다른 동료
들한테 폐는 안 가겠다 싶은 생각도 있었다.
음주 난동에 폭행, 절도, 인터넷 악플 등 쉬운 사건들이었기에 잠 조금 줄이
고 시간만 들이면 처리하는 데에 큰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하여 며칠 동안 집에도 잘 못 들어가고 쪽잠을 자며 서류에 파묻혀 살고
있을 때, 내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 백동준 검사님이십니까?
늙고 힘없는 데다가 너무 떨리기까지 해서 그냥 끊기가 미안해지는 목소리였다.
“네. 그렇습니다만.”
- 안녕하십니까. 제 사건 담당 검사님이라고 들었습니다. 제가 꼭 뵙고 드릴
말씀이 있는데 잠시만 시간 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제가 요즘 맡은 일이 많아서, 어떤 사건 말씀하시는 거죠? 사건 번호 알고
있으십니까?”
꿀꺽-.
핸드폰 너머의 노인은 긴장한 듯 침까지 삼키고서야 대답했다.
- 아뇨. 제가 번호까지는 못 외웠고요, 저희 집 앞 슈퍼에서 라면 두 봉지 훔
친 사람입니다.
마침 딱 그때 보고 있던 사건 파일이었다. 피의자 72세 김휘한, 죄명 절도,
슈퍼 CCTV 기록 증거로 제출됨. 피해자와 합의하지 못함. 동종 절도 전과 2
범, 폭행 3범, 상해 1범.
“네. 어떤 사건인지 확인했습니다. 저한테 하실 말씀이 뭘까요?”
- 그게 말씀입니다, 검사님 꼭 한 번 뵙고 말씀 나누고 싶습니다. 백동준 검
사님이 잘 만나 주신다는 이야기도 들어서 염치없지만, 꼭 좀 부탁드립니다.
“피의자 조사 일정 통지해 드릴 테니까 맞춰서 검찰청으로 오시면 됩니다. 그
때 저 보실 수 있어요.”
이 정도면 검사 개인에게 걸려온 민원 전화에 대해 충분히 공손하게 응대했
고, 딱히 문제가 될 만한 것도 없었다. 그런데 그 노인 쪽에서 먼저 선을 넘
었다.
- 아이고 검사님, 검찰청 말고 밖에서 뵐 수는 없겠습니까? 제가 거기만 가면
팔다리에 혀까지 떨려서 말이 도통 안 나오더라고요. 부디 이 늙은이 딱한 사
정 한 번만 들어주십시오.
“지금 말씀 되게 잘하시는데요, 사정 이야기해 주시면 듣겠습니다.”
- 꼭 뵙고 드려야 할 말씀입니다. 부탁드립니다. 보여드려야 할 것도 있고요.
일도 많은 데다가 약식 기소될 작은 사건인데 이렇게까지 시간을 써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먼저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다가, 내 생각을 확 잡아채는 장면이 하나 떠올랐다. 갓 성인이 되었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이런 부탁을 참 많이도 하고 돌아다니셨다.
경찰이고 검찰이고 신문사고, 심지어는 HL 중공업 본사까지 찾아가서 제발 자
기 좀 만나 달라고 사정하셨지만, 그때 나와주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그때 한 검사가 어머니한테 그랬다더라. 자기가 맡은 사건이 몇 갠데 이거 하
나 때문에 쓸 시간이 있는 줄 아느냐고.
휴-.
내가 그런 검사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법조인이라고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
하는 듯한 모양새는 더욱 보이기 싫었다. 까짓거, 잠 한 시간 덜 자면 되지.
“네. 알겠습니다. 제가 멀리는 못 나가서 검찰청 옆에 있는 조용한 카페 주소
하나 찍어드릴 테니까 거기로 와 주세요. 시간 맞춰서 와 주세요.”
- 감사합니다, 네, 그럼요. 만나주신다는데 시간은 당연히 제가 맞춰서 가야
죠. 감사합니다. 나으리.
이렇게 일단 나가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는데, 이 노인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대체 검사실 번호도 아니고, 내 개인 번호를 어떻게 알고 전화했단 말인가?
또, 내가 피의자를 잘 만나준다는 소문은 또 어디에서 듣는단 말인가?
* * *
다음 날, 카페에서 마주 앉은 노인의 모습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불쌍해 보
였다. 제대로 먹지도 못했는지 양 볼은 물론 눈 밑까지 움푹움푹 패여 있었다.
“하실 말씀이란 게 어떤 걸까요?”
“이렇게 나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제가 왜 그 라면을 훔칠 수밖에 없었는지
말씀을 드려야 해서요. 손녀딸이 집에서 배고프다고 우는데 부양의무자 기준
인지 뭔지 연락 끊긴 아들놈 때문에 최저생계비 지원도 못 받고, 그렇다고 이
늙은이가 어디서 취직을 하기도 어려워서 그때 정말 돈이 한 푼도 없었습니다.”
안타깝지만 흔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미 경찰에서 올라온 조서에 적혀 있던
내용이기도 했다.
“사정이 딱하시네요.”
“경찰에서는 제가 전과 기록이 있어서 처벌을 못 피할 거라고 하던데, 저번
두 번의 절도도 다 같은 이유였습니다. 아직 열 살도 안 된 아이 키도 커야
하는데 굶길 수는 없잖습니까? 부디 선처 부탁드립니다.”
끄응-.
이쯤 되니 인간으로서 갖게 되는 연민과는 별개로,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검사는 피의자의 말도 귀 기울여 들어야 하지만, 이런 이야기라면 전화
로 해도 되고 대면 조사 기일에 해도 되는 거 아닌가? 대체 왜 나를 밖으로
불러낸단 말인가?
“생계 문제는 살고 계신 지역 동사무소 가시면 거기 계신 사회 복지사분께서
해결해 주실 방법이 있을 겁니다. 말씀해 주신 사정은 처분에 참고하겠습니
다. 더 긴 이야기는 검찰청에서 듣겠습니다.”
그 말을 마치고 이만 일어나려는데 노인이 측은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그리고 말씀입니다. 제가 백동준 검사님께 꼭 보여드려야 할 것도 있다
고 했잖습니까?”
그래. 내가 나온 이유 중에 이것도 있었지.
“네. 보여주세요.”
“잠시만요. 제가 커피를 너무 오랜만에 마셔서 한 번에 쏟아붓다 보니 화장실
이 급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그렇게 말한 노인은 내 대답을 들을 새도 없이 카페 화장실로 후다닥 달려갔다.
휴우-.
내가 이 사람을 배려해서 밖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저쪽도 나를 배려해
줄 거라고 믿었던 게 지나친 기대였을까? 내가 요즘 바쁘다는 이야기는 이미
했는데.
어쩔 수 없이 핸드폰으로 처리 가능한 업무를 보며 노인을 기다리는데, 10분
이 지나고 20분, 30분이 지나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내가 체포하러 나온 것도 아니고 가방을 놓고 간 걸 보니 내뺀 것 같지는 않
은데, 이 정도면 변비라고 쳐도 아주 악성이다.
하지만 만약 변비가 아니라면, 혹시 화장실에서 무슨 일이 생긴 거라면? 워낙
흉흉한 사건을 많이 봐서 생긴 불안감이었을까?
확인은 해 보자는 생각에 나는 조금 전 노인이 들어갔던 카페 화장실로 향했
다. 그런데 문이 열렸을 때 그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싶어 고개를 휘휘 둘러 보니 딱 하나 있는 좌변기 칸
아래로 노인이 신고 있던 신발이 보였다.
다행히 변비 이상의 일은 아니겠거니 생각하며 그래도 확인차 왔으니 문은 두
드려봐야겠다는 생각으로 그 앞에 섰을 때였다.
고뇌에 차 활짝 열린 남자의 마음이 고스란히 들려왔다.
[조폭 생활했다고 아들놈이 떠나서 조폭 일을 관뒀더니 이제는 먹을 게 없구
나. 나 하나 굶는 건 괜찮아도, 이 아들놈인지 원수 놈인지가 죽은 제 누나
딸이라도 거둬갔으면 좋으련만, 이게 다 내 업보다.]
그래서 전과가 그렇게 많았던 거구나. 이 노인 사정은 들을수록 딱하긴 하네.
[그래. 이번 한 번만 눈 딱 감고 일 벌이는 거야. 그럼 최소한 내 손녀딸 굶
는 꼴은 안 보겠지. 이것만 성공하면 HL 그룹에서 그 아이 거둬먹여 준다고
했어. 좋은 집에서 라면 말고 고기도 먹고 살 수 있어. 나야 끝난 인생 감옥
한 번 더 간다고 달라지는 거 없잖아?]
벌컥-. 푸욱-.
그 생각이 끝나면서 좌변기 칸 문이 열리고 노인의 눈물 가득한 눈이 나와 딱
마주쳤다. 그다음 순간 내가 어찌할 틈도 없이 노인의 품에서 나온 사시미가
내 배를 향해 날아들었다.
하아, 곽한성이 했던 ‘어디 한번 죽어봐라’라는 말의 의미가 이거였구나? 그
래서 일부러 이 사건을 나한테 배당한 거였어.
허민회는 왜 나한테 그렇게 두들겨 맞고도 조용한가 했더니, HL 그룹에서 이
노인의 손녀딸을 거둬 주기로 했다고?
그 더러운 성품 어디 못 갖다 버리는지 법적으로 탈탈 털리고 나니까 또 이런
암수를 동원하는구나.
이해되는 건 또 있었다. 이 노인이 내 개인 번호를 알고 있었던 것도 곽한성
이나 허민회가 줬기 때문이었겠지.
껌벅-.
나는 내 배에 박힌 칼을 쥔 채 바들바들 손을 떨고 있는 노인을 내려보며 눈
을 한 번 크게 감았다 떴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칼이 박힌 배에서 피도 흐르지 않는 데다가 내가 멀쩡하게 서 있으니 노인은
심히 당황한 모양이었다.
입은 뻐끔거리기만 할 뿐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고, 대신 마음의 소리만 쩌
렁쩌렁 울려퍼질 뿐이었다.
[뭐, 뭐야? 불사신이야?]
물론 내가 회귀했다고 해서 불사신이 된 건 아니다. 아마 저 칼에 아무런 방
비 없이 찔렸으면 나는 또 한 번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내가 이토록 멀쩡한 이유는 단 하나, 오기 전에 유재형 수사관한테 부탁해 방
검복(防劍服)을 셔츠 아래에 챙겨 입고 나왔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미 피의자가 불러서 나갔다가 죽임을 당한 경험이 있다. 거기다 곽한
성이고 허민회고 이 노인이고 간에 하나같이 수상하게만 구니 대비를 안 할
수가 없었다.
상황이 너무 내 예상과 딱 맞춰 흘러갔기에 내 대응은 침착했다. 방검복에 박
힌 칼을 뽑아들고서 노인을 좌변기 칸 밖으로 안내했다.
“나가서 말씀 계속 나누시죠. 이 칼은 제가 증거물로 압수하겠습니다.”
“네, 네. 검사님.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화장실에서 나온 우리가 다시 카페에 마주 앉았을 때 너무나 당연하게도 분위
기는 완전히 뒤바뀌어 있었다.
딱한 사정 들어주던 청년이었던 나는 완전한 검사의 자세를 갖췄고, 그리고
불쌍한 척하던 노인은 완전한 범죄자의 모습이 되어 어깨를 움츠리고 고개를
떨궜다.
“지금부터 제가 묻는 말에 단 한 점의 거짓도 없이 답하셔야 할 겁니다.”
“그럼요. 검사님. 여부가 있겠습니까?”
“누가 시켰습니까? 허민회입니까?”
흠칫-.
노인이 크게 뜬 눈 안에서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어떻게 아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네. 맞습니다. 이제 저는 어떻게 되는 겁
니까?”
“이건 라면 두 봉 훔친 것과는 차원이 다른 범죄입니다. 살인미수로 10년 형
은 받을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어, 어떻게 방법이 없겠습니까?”
하, 지금 자기가 죽이려고 했던 사람 앞에서 자기가 감옥에 가지 않을 방법을
말해 달라고 하는 거야? 좋다.
“험한 인생 사셔서 잘 아시겠지만, 걸리지 않은 범죄는 처벌받지 않죠. 그리
고 이 사건은 저랑 김휘한 씨 둘만 아는 일입니다.”
“검사님께서 눈감아 주실 수도 있단 말씀이십니까?”
“제가 말씀드리는 대로 움직여 주신다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