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검사장을 털다
허민회에게 떨어진 판결은 집행 유예도 없는 깔끔한 실형이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완벽한 내 승리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런데 문제는 1심 재판이 끝났을 때 허민회가 법정 구속되지 않았다는 것이
다. 법적으로 이게 불가능한 건 아니다.
1심이 끝났더라도 판결은 확정된 게 아니며 2심과 3심에서 여전히 다툴 여지
는 남아 있기에 실형이 선고됐더라도 법정 구속 여부는 판사가 결정할 수 있다.
물론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그 자리에서 감옥으로 끌려간
다. 아예 초임 판사 교육 매뉴얼에 법정 구속하라고 적혀 있을 정도니까.
그렇다면 왜 허민회는 그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 해당했는가? 이건 꼭 법 전반
이 아니라 재벌 형사 사건만 눈여겨 봤으면 알 수 있는 ‘5-3-3 법칙’이다.
재벌이 기소당해 법정에 서면 엄청난 대중의 이목이 집중된다. 이에 따라 1심
판사도 같이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다.
그 아래에서 재벌 봐주기 판결을 한 판사라는 꼬리표를 달기는 여간 부담스러
운 일이 아니니 실형 5년이라는 중형을 선고한다.
단, 대중은 크게 관심 갖지 않는 법정 불구속이라는 특혜를 줌으로써 ‘5-3-3
법칙’이 발동하기 시작한다.
중형을 받았으니 재벌은 당연히 항소하고, 그럼 2심 재판부에서는 적정 형량
의 절반까지 재량으로 형을 줄여줄 수 있는 작량감경 제도를 통해 3년 이하의
형량을 때린다.
이쯤 되면 재벌의 죄에 대한 대중과 언론의 관심이 식을 타이밍이니 2심 재판
부는 훨씬 적은 부담을 느끼며 이 짓을 할 수 있다.
형사 법정에서는 이 징역 3년이 마법의 숫자인데, 이 이하의 형량에 대해서만
집행 유예를 같이 선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게임은 끝이다. 3심 대법원에서는 징역 10년 이하의 형량에 대해
서는 양형을 다툴 수 없으므로 이 징역 3년 이하에 집행 유예 판결은 그대로
확정된다.
이로써 검찰과 모든 심급의 법원이 재벌의 죄를 인정했으되, 그 재벌은 단 하
루도 감옥에 가지 않게 되는 기적의 결과가 완성된다.
그러니 허민회가 이번 1심 판결에서 징역 5년에 법정 불구속 판결을 받았다는
건 이 마법의 트랙에 올라탔다는 의미이다.
이기긴 이겼으되 상대가 직접적인 패배의 타격을 받지 않게 된 꼴이다. 뒷맛
이 씁쓸한 승리랄까?
뭐, HL 그룹의 둘째 아들 같은 강대한 적을 상대하면서 첫술에 배부르리라는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이번 재판에서 허민회가 사실상의 면죄부를 받더라도 내가 그를 옭아맬 카드
는 앞으로도 얼마든지 남아 있으니까.
지난 생에서는 그 사건들이 어디로 튈지 몰라 따라가기에 바빴지만, 이제는
다르다. 무슨 사건이 어떻게 흘러갈지 훤히 꿰고 있는 이상 허민회는 내 손에
끝장난다.
이번 승리가 그 시발점을 알리는 축포라고 생각한다면 일단 허민회를 전과자
로 만들었다는 상징성을 취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으라차차! 허민회와의 첫 대결은 이렇게 내 판정승으로 정리하고, 지금은 털
어야 할 다른 사람이 있다.
내가 허민회의 배임 사건을 기소하지 못하게 막으려고 회유에 사건 재배당,
징계위원회 회부까지 별짓을 다 하며 누렇고 늙은 이빨을 드러낸 곽한성 검사
장이다.
똑똑-.
지금 나는 그 이빨을 뽑아 버리려 허민회의 1심 판결문을 들고 지청장실 문
앞에 서 있다. 내 노크 소리에 안에서는 느릿한 반응이 들려왔다.
“누구야? 들어와.”
“백동준입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소파에 반쯤 누운 채로 뭔가 잘 안 풀려서 고통스럽다는
듯 손으로 이마를 짚고 있는 곽한성의 모습이 보였다.
내가 이번에 허민회한테서 유죄 판결을 받아냄으로써 은퇴하고 HL 그룹의 법
무 고문으로 가겠다는 야망이 깨졌으니 그럴 만도 하겠지.
“따로 부른 적은 없는데, 무슨 일이야? 일단 앉아.”
“네. 보고 드릴 사건이 몇 가지 있습니다. 저번에 저한테 기소 유예로 마무리
하라고 하셨던 허민회 HL 중공업 전 대표 이사 배임 사건 기억하십니까?”
그 말에 곽한성은 얼굴에서 손을 스르륵 내리더니 상당히 불쾌하다는 듯 나를
향해 이빨만큼이나 누런 눈빛을 번뜩였다.
“내 말 안 듣고 결국 기소했다면서? 항명한 거 자랑하려고 여기까지 쫓아 올
라온 건가?”
“방금 그 사건 선고 공판 다녀오는 길입니다.”
“하, 그래. 결과가 어떻게 나왔는데?”
나는 들고 온 판결문을 곽한성에게 내밀어 보였다.
“피고인 징역 5년 실형입니다.”
“그래. 잘했어. 이 말이 듣고 싶은 겐가? 기소 유예 주라는 내 판단이 틀렸
고, 기어이 HL 그룹 아들내미 멱살 잡아채서 법정 끌고 간 자네가 맞았다고?”
굳이 이걸로 크게 자극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저렇게 발끈해 주니까 재밌긴
하네.
“이 판결문 하나만 보여드릴 거였으면 제가 여기까지 올라오지는 않았겠죠.”
“그럼 뭔데?”
“들어오면서 보고 드릴 사건이 여러 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배임 건 수사
중에 입수한 정보가 있는데, 이게 곽한성 검사장님 개인에 관련된 일이라서요.”
하-.
곽한성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코웃음을 한 번 친 뒤 나를 향해 와다다다 쏘아
붙였다.
“자기 직속 부장검사 날리고 재벌 아들 실형 때린 거로는 성에 안 차나? 이제
는 나한테까지 그 대단하신 칼 들이밀려고? 대단하신 백동준 검사님께서?”
저렇게 말해 주면 내가 대답하기가 쉬워서 좋네.
“네. 맞습니다.”
“뭐야?”
“저번에 칭찬도 해 주셨고 방금도 언급하신 양경동 부장의 뇌물수수 사건 말
입니다, 알고 보니 관련자가 더 있었더라고요?”
* * *
내가 이걸 알게 된 건 허민회의 변호인으로 나선 박동출 변호사의 전관예우
요청을 거절했을 때였다.
너무 당연하게 먹힐 거라고 믿었던 요청이 내 단호함에 싹둑 잘려나가자 당황
한 그의 마음이 열리며 의외의 이름이 읽혔다.
[아이 씨, 양경동이 있을 때가 일 편했는데 얘는 자기 직속 상사 날려버린 새
끼라더니 선배 말 더럽게 안 쳐 듣네.]
그러면서 영상이 같이 떠올랐다.
[박동출이 운영하는 법무법인 엑소더스 사무실. 언젠가 우승식이 자기 딸 변
론을 맡겼듯 성해에서 일어나는 굵직한 사건은 모두 쓸어 담는 곳이다.]
[이곳에서 박동출이 전화를 받는다.]
[“어, 경동아, 우리 하던 대로 사건 하나만 기소 유예 때려줘야겠다. 별거 아
니고, 학교 폭력이야. 애들 장난. 사례는 그쪽 애 엄마가 너한테 따로 하기로
했고, 나는 다리만 놔 주는 거로 얘기 다 됐어.”]
[핸드폰 너머로 양경동의 목소리도 들려온다.]
[“아이고, 박동출 선배님. 매번 감사합니다. 제가 찾아뵙고 따로 성의 표시라
도 해야 하는 건데 언제 한 번 시간 내주십시오.”]
[“됐다. 성의 표시는 무슨. 네 덕분에 우리 엑소더스로 성해지청 일감은 다
몰리는데 감사는 내가 해야지.”]
[“어휴, 선배님께서 후배한테 감사라뇨. 그건 그렇고, 제가 하나 걱정되는 게
있어서 말입니다. 기소 유예 결재 반려될 일은 없겠죠? 지금까지 몇 번은 그
냥 넘어갔는데 이게 언제까지고 이렇게 되리라는 보장은 없는 것 같아서 말입
니다.”]
[끙차-.]
[기합 소리까지 넣으며 자세를 고쳐앉은 박동준이 자신감에 가득찬 목소리로
대답한다.]
[“너네 곽한성 지청장님이 내 연수원 한 기수 선배이신데 기각을 누가 해? 차
장이 중간에 태클 걸어도 검사장 결재 나면 끝나는 거 아니야?”]
[“그건 그렇습니다만, 지청장님이 갑자기 마음이 변하신다거나 하실 수도 있
을 것 같아서 제가 걱정이 아주 조금, 병아리 눈물만큼 들지 뭡니까?”]
[“어휴, 경동아, 설마 내가 너네 지청장님이랑 선후배 사이인 거 하나만 믿고
이러겠냐? 그쪽도 우리 엑소더스에서 다 약 쳐 놓고 있으니까 걱정 붙들어 매
고 너는 네 선에서 할 일 해 주면 돼. 곽 선배랑 사이는 안 틀어지게 깍듯이
대하고.”]
너무 많은 걸 이해하게 해 주는 영상이었다. 양경동을 끌어내리면서 그 무리
한 기소 유예 처분에 어떻게 결재를 받을 생각인지 궁금했는데, 다 믿는 구석
이 있었나 보다.
비단 양경동 뿐만 아니라, 곽한성에 대한 것도 이해됐다. 검찰 조직을 그렇게
끔찍하게 여긴다더니, 결국 그 조직을 지켜야 자기한테 떨어지는 떡고물이 있
기 때문이었다.
요컨대, 양경동의 뇌물수수 사건은 개인의 비리일 뿐만 아니라 박동출이라는
전관이 운영하는 법무법인을 중심으로 검사장까지 연루된 성해지청 전체의 문
제였다.
* * *
내 날카로운 지적에 곽한성이 관자놀이 힘줄까지 꿈틀거리며 되물었다.
“그 추가 관련자가 나라고?”
자기 딴에는 압박용으로 하는 질문 같은데, 압박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네. 그렇습니다. 법무법인 엑소더스에서 뭘 받으시고 양경동 부장님이 올리
신 기소 유예 처분들 결재해 주신 겁니까?”
흠칫-.
곽한성의 표정에 당혹스러움이 서리더니 소리를 빽 질렀다.
“이게 어디서 선배도 아니고 스승뻘 앞에서 범죄자 다루듯이 하는 거야! 나
가! 당장 안 꺼져?”
그러면서 두 장의 사진이 떠올랐다. 한 장은 곽한성보다 조금 젊어 보이는 여
자였고, 다른 하나는 나보다도 훨씬 어려 보이는 여자였다.
이거였구나. 곽한성이 부인과 딸을 미국에 보내 놓고 기러기 아빠 생활을 한
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회식 자리에서 술만 되면 그 이야기를 하는 통에 구태여 정보를 캐지 않아도
검찰청 내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으니까.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심 궁금해지긴 하더라. 딸이 아이비리그 대학 다닌다
던데, 그 학비에 생활비를 검사 월급으로 과연 충당할 수 있는지.
당시에는 빚을 냈을 수도 있고, 월급 외에 따로 돈 나올 구석이 있을지도 모
르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구석이 엑소더스였구나.
“네. 나가라고 하시니 지금은 나가 보겠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 제가 그냥 넘
어갈 거라고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언젠가 말씀하셨던 것처럼 검찰 조직 전체
의 위신이 걸린 일입니다.”
“그냥 안 넘어가면 네 놈이 어쩔 건데? 또 수사라도 하려고?”
“아뇨. 이번 건 제가 직접 안 할 생각입니다. 검사장이 뇌물을 수수한 사건인
데 대검 감찰부로 넘겨서 확실히 매듭지어야죠.”
꾸벅-.
곽한성에게 인사하고 뒤돌아서 나오는데 뒤에서 마음의 소리가 들려왔다.
[이 새끼, 어디 한번 죽어 봐라.]
그 자리에서 정확한 의미를 캐물을 수는 없었지만, 말을 딱 들으면 어감상 느
껴지는 게 있지 않은가?
단순히 괴롭히겠다는 걸 비유적으로 표현한 게 아닌, 정말 내 생명을 위협하
겠다는 다짐처럼 들렸달까?
* * *
그 후 며칠이 지나 곽한성은 양경동의 뒤를 따라 스스로 사표를 내고 검찰을
떠났는데, 이런 젠장. 꼭 이런 식으로 유치 찬란하게 똥을 투척하고 가야겠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