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즐거운 미란다 원칙 고지 (2)
얼라리요? 그러지 말라고 했는데도 허민회는 속에서 목을 통해 쭉 뽑아 올린
화를 기어이 입 밖으로 뿜어내고 말았다.
탁-.
나를 잡아먹기라도 할 기세로 양손으로 책상까지 짚고 일어선 그가 침까지 튀
겨가며 오리마냥 입을 쭉 내밀고 꽥 소리를 질렀다.
“야! 네가 검사면 어쩌라고? 검사씩이나 돼서 내가 누군지 몰라?”
쯧쯧. 15년 후의 그래도 성숙해진 허민회를 상대하던 기억 때문인지, 눈앞에
이 남자는 너무 어리게만 보였다.
내 기억 속의 허민회가 온갖 비열하고 나쁜 짓을 다 하고 다니기는 했어도 이
렇게 자기 감정 하나 조절 못 하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얘는 완전 애송이네.
“누군지 알죠. 말씀드렸잖습니까? 배임 혐의를 받고 계신 피의자입니다. 곧
기소될 테니 피고인으로 신분 전환 되시겠지만요. 계속 지금처럼 소란피우셔
서는 곤란합니다.”
“내가 내 할 말 하겠다는데, 네가 어쩔 건데? 어? 기소? 할 거면 해 봐. 법정
가서 박살 내줄 테니까.”
“기소 전에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조치도 있습니다.”
그러자 허민회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침을 한 번 더 튀겼다.
“뭔데?”
“원활한 조사를 위해 수갑을 채워 드릴 수 있죠.”
덥석-.
결국, 자기 분을 참지 못한 허민회는 내 멱살을 잡고야 말았다. 이랬다가는
정말 수갑을 차게 될 상황이었기에 옆에 앉아 있던 초로의 변호인이 급히 일
어나 말렸다.
“아이고, 도련님. 그만하십시오. 검사 패서 좋을 게 없습니다. 그리고 검사님.”
변호사가 의뢰인한테 도련님이란다. HL 그룹의 가문에서 머슴 노릇 하는 걸
저렇게 티 내야 하나? 법조인 가오가 있지.
탁탁-.
나는 허민회의 더러운 손길이 닿았던 셔츠를 털며 대답했다.
“네. 변호사님.”
“제가 잠시 도련님이랑 나눌 말씀이 있는데 자리 좀 비켜 주십시오. 부탁드립
니다.”
하이고, 내가 콕 집어서 자기 신분이 변호사라고 가르쳐줘도 끝까지 머슴 근
성 못 버리고 도련님이라네.
그 말을 들으며 허민회의 표정이 더욱 의기양양해지는 것으로 보아, 주인이
노예를 만드는 게 아니고 그 반대로 노예가 주인을 만든다는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변호인과 피의자 사이의 면담에 검사가 개입할 수 없는 건 우리나라
형사소송법상 너무 확고하게 규정된 피의자의 권리라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시죠.”
어차피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는 너무 뻔하다. 검찰청에서 난폭하게 굴어
서 좋을 게 없다는 충고를 나 대신 잘 전해 주겠지.
잠시 조사실에서 나와 내 검사실로 돌아와 있는데 송민지 사무관이 노크하고
들어왔다.
“검사님, 찾아오신 분이 계시는데요. 박동출 변호사님이라고 하십니다.”
박동출이면, 조금 전에 조사실에서 나를 쫓아낸 변호사인데 그래놓고 따로 찾
아왔다고? 이러나 저러나 내가 꿇릴 건 하나도 없지만.
“일단 들어오라고 하세요.”
달칵-.
소심한 문소리를 내며 들어온 박동출 변호사가 내 검사실의 소파에 앉아 물었다.
“검사님, 저 모르시겠습니까? 저도 검사님처럼 검찰청에서 꽤 오래 있었고요,
여기 성해지청 곽한성 검사장님이랑은 연수원 한 기수 차이 후배입니다. 그뿐
인가요? 제가 우리 백동준 검사님처럼 초임일 때 많은 조언해 주셨던 분이 곽
한성 검사장님이기도 하시고요.”
뭘 하려는 건지 알겠다. 나한테 전관예우 해 달라고? 에라이. 그런 거 별로
안 좋아하기도 했거니와, 지금은 허민회를 앞에 두고 있는데 이런 어줍잖은
수가 나한테 통할 리가 없다.
“선배 대우를 원하시는 거라면 밖에서 충분히 해 드리겠습니다만, 지금 이 검
찰청에는 허민회 피의자의 법률대리인으로 와 계신 것으로 아는데요?”
역시나, 박동출 변호사의 얼굴이 팍 찌그러졌다.
“선배 대우를 검찰청 안에서 해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제가 뭐 대단한 걸 말
씀드리고자 하는 것도 아닙니다. 법대로 처리하시되, 그냥 잠시만 저희 도련
님 비위 좀 맞춰 주십시오.”
“검사한테 피의자의 비위를 맞춰 달라고요? 검찰에 오래 계셨다면서 그렇게
수사하셨습니까?”
“제가 뭐 대단한 걸 요청드리는 게 아니라, 피의자라고 눈앞에서 적시한다든
지 수갑을 채우겠다든지 하는 말씀만 말아 달라고 부탁드리는 겁니다. 법리적
인 논쟁은 저랑 얼마든지 하셔도 좋으니 저희 도련님께는 꼭 부탁드립니다.”
아하, 그러니까 비위를 맞춰야 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본인인데 내가 거기
에 방해가 되고 있으니 검찰 선배로서 권력을 행사하겠다?
“저는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네? 네에?”
“변호사님.”
이 박동출이라는 사람, 허민회를 털기 전에 아주 갖고 놀기 좋아 보였다.
“네?”
“이번 사건 수임료 못해도 억은 받으셨을 겁니다. 맞죠?”
“네. 그렇... 네? 아뇨. 수임료는 변호사와 도련님, 아니 의뢰인 사이의 극비
사안으로 밝힐 수 없습니다.”
이 인간은 이렇게 어벙해서 호랑이굴 같은 검찰청에서 어떻게 오래 버텼나 모
르겠다.
“네. 무슨 말씀 하려고 여기까지 올라오셨는지 잘 알겠고요, 다만 제가 받아
들일 수 있는 점은 없습니다. 같이 조사실로 돌아가셔서 나누던 말씀 계속하
시죠.”
“네. 알겠습니다.”
다시 조사실에서 마주한 허민회는 자기 변호인한테 쿠사리를 제대로 먹었는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허민회씨, 무슨 일로 여기에 오셨는지 알고 계십니까?”
내 물음에 대답한 건 박동출 변호사였다.
“HL 중공업에서 발생한 배임 사건이 있다는 소환통지서 받고 이렇게 출석해
있습니다.”
“그럼 피의자는 자신에게 부여된 혐의를 인정하나요?”
법리적인 다툼은 자기랑 하자던 박동출 변호사는 그제야 자기 역할을 힘껏 수
행했다.
“이미 저희 측 인사고과 내부 자료까지 다 보내드렸던 것으로 아는데요, 정당
한 사내 승진 절차였을 뿐, 일부 언론에서 말하는 것과는 다르게 저희 도련님
이 대표 이사로 재직하시던 당시 배임의 우를 범하신 건 아닙니다. 이에 대해
저희 회사에 압수수개까지 이루어진 건 공권력의 남용으로 심히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머슴 역할 톡톡히 수행하다가 이럴 때만 법조인이랍시고 혓바닥 한번 기네.
“그 압수수색을 통해 저희 검찰이 뭘 찾아냈는지는 모르시나 보네요?”
“이미 여러번 공유 요청을 드렸습니다만, 백동준 검사님께서 거부하신 것으로
압니다.”
암. 내가 거부했지. 바로 이 순간 허민회의 똥 제대로 씹은 표정을 보려고.
“지금 보여드립니다. 여기 보시면 HL 그룹 인사 관리 시스템의 시간이 과거로
변경된 기록이 있습니다. 그리고 변경되기 전과 후의 기록을 비교해 본 결과
딱 한 사람, 최수연 전 상무의 인사 기록만이 조작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조작이라죠! 단어 선택을 신중히 하십시오.”
“아무 근거 없이 인사 평가에 변동이 생겼는데 이걸 어떻게 조작이 아니라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심지어 입사 전에 제출했던 토익 점수까지 675점에서
985점으로 수정되었습니다. 이 점은 시험 주관사와 연락해서 최수연 씨의 최
근 점수가 675점이라는 확인을 받았습니다.”
그때 이미 쭈구리가 된 허민회가 자기도 한마디 해 보겠답시고 불쑥 끼어들었다.
“그 조작을 내가 했다는 증거 있어? 그 시스템 관리하는 건 신은석 부장이라
고, 따로 있단 말이야.”
“이 제보를 저한테 해 주신 분이 누군지 아십니까?”
“누군데?”
얘는 불쌍하게도 짤린 주제에 아직도 자기가 회사를 꽉 틀어쥐고 있다고 믿나
보다.
“바로 말씀하신 그 신은석 부장님이십니다. 게다가 인사 시스템을 과거로 돌
리는 일은 대표 이사의 결재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라는 증언 역시 나왔고요,
그 일을 실제로 수행한 인사팀 직원 역시 허민회 전 대표 이사님의 비밀스러
운 지령을 받았다고 진술했습니다. 이제 그만 자기 죄를 인정하시죠.”
나와 허민회의 대화 사이에 박동출 변호사가 급하게 개입했다.
“검사님은 지금 자백을 강요하고 계십니다!”
“지금 제가 보여드린 증거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결론이 자백일 수밖에 없
습니다만. 이미 미란다 원칙 고지하면서 말씀드렸듯이 자백을 원치 않으신다
면 안 하셔도 괜찮습니다.”
그때, 겨우 진정돼 있던 허민회의 목에서 턱으로 그리고 볼과 관자놀이로 다
시 한번 붉은 기운이 뻗쳐오르더니 소리를 꽥 질렀다. 이번에는 내가 아니라
박동출 변호사를 항한 것이었다.
“그 압수수색 의례적으로 하는 거라고, 별거 아니라고 했잖습니까? 그런데 이
게 뭡니까?”
“그, 그거야 도련님께서 회사 내부에서 배신자가 나올 리 없다고 하셨으니까
저도 그렇게 전망을 했습니다만...”
“그럼 배신자가 나왔으니까 저는 이제 끝이란 말씀이십니까?”
저 질문에 대답은 내가 대신 해 줘야겠다.
“네. 허민회 전 HL 중공업 대표 이사님께서는 배임 및 사문서 위조, 위조 사
문서 행사 혐의를 피할 방법이 없으십니다.”
“야!” “검사님!”
허민회와 박동출 변호사가 동시에 나를 향해 소리쳤고, 나는 그나마 상대할
가치가 있어 보이는 쪽을 향해 대답했다.
“네. 변호사님.”
“기소 유예 가능성은 없겠습니까?”
또 나왔다. 저놈의 기소 유예.
“없습니다.”
“그렇다면 성해지청장에게 정식으로 담당 검사 변경 요청하겠습니다.”
이제와서 자기 한 기수 선배 빽을 다시 한번 써 보겠다? 어림도 없는 소리.
“이 사건은 이미 한 번 제 손을 떠났다가 지금 이렇게 다시 제가 맡고 있습니
다. 재배당될 일은 없습니다. 기소 유예는 없고, 저는 형사소송법상 다소 무
의미한 피의자의 자백과 관계없이 이 사건 법정에 올립니다.”
그러자 박동출 변호사가 마지막 발악을 시전해 보였다.
“검사님 잠시 녹화 끄고 말씀 나누시죠.”
이게 켜져 있으니 없으나 칼 자루는 나한테 쥐어져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나는 쿨하게 녹화 중지 버튼을 눌렀다.
“네. 껐습니다.”
“저도 여러 기록 검토해 봤습니다만, 검사님께서 저희 HL 중공업의 사내 하청
업체 대표와 그 딸아이까지 구속시키신 것으로 모자라 이제는 최수연 전 상무
에 이어 허민회 전 대표 이사님한테까지 칼자루를 겨누고 계십니다. 대체 이
러시는 이유가 뭡니까?”
그 썰을 다 풀어주려면 아주 먼 옛날의 우리 아버지 이야기까지 거슬러올라가
야겠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간단하다.
“모두들 죄를 지었으니까요.”
“죄지었다고 다 이렇게 수사하고 감옥에 보내십니까? 그거 아니잖습니까?”
하아, 박동출 변호사 이 양반도 검찰에 오래 있었다고 하지 않았나? 이런 썩
음썩음한 마인드가 쫙 깔려 있으니까 국민이 검찰을 신뢰 못 하지.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제 눈에 지은 죄가 파악된 사람은 사내 하청 업체 사
장이든 HL 중공업 대표 이사든 모두 법정에 세웁니다. 그게 이 까마득한 후배
검사가 하는 일입니다.”
“아니, 그거 말고 바라시는 게 있으니까 이러시는 거 아닙니까?”
“허민회 전 대표 이사의 실형. 그 외에는 바라는 거 없습니다.”
* * *
나의 단호한 대답으로 그날 조사는 마무리되었고, 그로부터 한 달여가 지나
허민회의 1심 판결 결과가 나왔다.
- 주문. 피고인에게 징역 5년을 선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