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즐거운 미란다 원칙 고지 (1)
사업상 매너를 모를 것 같지도 않은 사람이 악수를 청하지도 명함을 내밀지도
않았다. 심지어 내 이름을 들어놓고도 자기는 소속만 밝혔다.
HL 중공업에서 허민회의 배임 관련 사건 담당 검사를 찾아왔으니 본능적으로
자신을 감추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달까?
“네. 맞습니다. HL 중공업에서 무슨 일로 저를 찾아오셨을까요?”
그렇게 되물으며 민원실을 둘러보니 너무 많은 사람이 오가고 있는 게 보였
다. 검찰청 직원들부터 민원 접수자들까지.
“제가 맞게 왔군요! 그러니까 제가 찾아온 용건은, 그게......”
남자의 시선이 나를 따라 민원실을 한 바퀴 둘러보고 있었다. 역시 이렇게 사
람 많은 장소에서 이야기하는 건 불편한가 보다.
아직 정확한 방문 사유가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나에게 나쁜 일은 아닐 거라
는 직감이 들었다.
만약 자신이 속해 있는 HL 중공업에 이익이 되는 일이라면 저렇게 진심으로
긴장하고 있지는 않을 테니까.
어쩌면 이 남자가 내가 고민하던 허민회의 배임 혐의 입증을 위한 열쇠를 쥐
고 있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일단은 저 우물쭈물거리는 입부터 틔워 줘야겠다는 생각에 나는 민원실 문을
향해 손을 내밀어 보였다.
“꼭 여기서 말씀 안 하셔도 괜찮습니다. 근처에 조용한 원테이블 카페가 있는
데 같이 가시겠습니까?”
“그래도 되나요?”
“그럼요. 검사라고 꼭 검찰청에만 있으란 법은 없거든요.”
잠시 후, 카페에서 마주앉은 남자가 드디어 자기 이름을 밝혔다.
“제 소개가 늦었습니다. HL 중공업에서 일하고 있는 신은석이라고 합니다. 직
급은 부장입니다. 주로 인사 관리 자동화 프로세스 담당하고 있습니다.”
검찰청에는 없는 신기한 업무였다. 몇 년 뒤에 나올 개념으로 치자면 인사 관
리 AI 프로그램을 만든다는 얘기인가 보다.
“어떤 인력을 어디에 배치할지 자동으로 결정하는 프로그램을 만든다는 말씀
이신가요?”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훨씬 복잡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그렇게 이해하셔도 됩
니다. 조선업이라는 게 새로 들어오는 프로젝트, 끝나는 프로젝트가 항상 있
어서 인력 배치 효율성이 중요하거든요. 저희 회사 규모 정도 되면 인원이 워
낙 많아서 사람 손으로 일일이 배정하기도 어렵고요.”
자기 일이라 그런지 설명이 긴데, 어쨌든 커다란 업무 분류로 따졌을 때는 인
사팀이나 HR 직원으로 불릴 만한 사람인가 보다.
최수연의 부당 승진을 입증해야 하는 나로서는 이 사람이 할 말에 더욱 관심
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최수연 전 상무 승진에 대해서도 아는 게 있으시겠네요?”
“네. 그걸 말씀드리려고 오늘 연가 내고 회사 모르게 검사님 찾아뵈었습니다.
제가 운영하는 인사 관리 시스템에 이상한 일이 몇 번 있었거든요.”
“이상한 일이라뇨?”
슥삭-.
긴장한 신은석이 또 한 번 바지에 자기 손바닥을 비비는 동안 커피가 나왔고,
한 모금을 마신 뒤에야 용기를 낸 그가 대답을 이었다.
“저 몰래 시스템 전체 시간이 몇 번 과거로 옮겨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실까요? 제가 기술 쪽으로는 비전문가라 조금만 풀어서 설
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당연히 모든 인사 데이터는 현재 시점에서만 기록이 될 수 있어
요. 과거에 행해졌던 인사고과를 수정하지 못하게 하려고 그렇게 디자인한 건
데, 만약에 시스템 전체 시간을 과거로 돌리면 그 돌아간 시점에 올라왔던 인
사고과도 변경이 가능해지는 거죠.”
내가 한 번 더 풀어보자면, 일종의 시스템상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
특정인에 대한 평가를 조작했다는 소리인가 보다.
“그런 일이 자주 있나요?”
“아뇨. 절대로 아닙니다. 변경 사안이 엄청나게 중요할 때만 임원 회의 거쳐
서 대표 이사 승인받아서 과거로 돌릴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작
업은 제가 하게 돼 있는데, 이번 건 달랐어요.”
“그런 공식적인 절차가 없었던 거군요?”
신은석이 이제부터가 본론이라 더욱 긴장된다는 듯 커피를 한 모금 크게 들이
켰다.
“네. 그렇습니다. 임원 회의에서 그런 일이 논의됐다는 얘기를 들은 적도 없
고요, 무엇보다 담당자인 저 몰래 행해졌습니다. 이 트레이스 아, 그러니까,
프로그램 조작이 행해졌다는 흔적을 보고 나니까 너무 어이가 없더라고요.”
“그럼 누구의 인사 기록이 조작됐는지도 확인하셨습니까?”
휴우-.
깊은 한숨에 그의 되물음이 뒤따랐다.
“그 전에 이거 하나만 확인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네? 어떤 건가요?”
“만약에 제가 검사님 질문에 대답을 해 드렸다가 회사가 저를 고소할 수도 있
지 않을까 해서요. 위증죄라는 것도 있다면서요?”
엔지니어라 그런가, 이 사람 되게 꼼꼼하네.
“아뇨. 위증죄는 법정에서 증인 선서하고 거짓말하셨을 때만 적용되고요, 수
사기관에 진술하는 건 어떤 말씀을 하시더라도 아무런 죄가 되지 않아요. 위
증죄 외에도 혹여나 법적 문제 겪게 되시면 제가 손 닿는 데까지 돕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누구의 인사 기록이 조작됐냐면요, 딱 한 명이었습니다.”
“제가 짐작하는 그 사람인가요?”
신은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최수연 전 상무입니다. 입사 당시부터, 아니 입사 전에 제출했던 서류부
터 5년 간 인사 평가 기록이 몽땅 다 새로 쓰였어요. 제가 이거 찾아내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오케이. 이 말이 사실이라면 게임은 끝났다. 허민회의 배임죄는 당연히 성립
되고 인사 기록을 조작했으니 사문서 위조죄까지 들어간다.
게다가 조작된 서류를 검찰청에 제출하여 무혐의 처분을 받으려고 했으니 위
조 사문서 행사죄까지 먹일 수 있다.
그런 와중에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신은석이라는 이 사람이 나타
나자마자 일이 너무 쉽게 풀리고 있는데?
보통의 검사라면 이 사람의 저의나 목적, 제보 이유에 더해 진술의 신빙성까
지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지금 이 귀찮은 일을 해야 하느냐? 물론 아니다. 커피잔을 마
저 비우는 신은석의 마음이 고스란히 내게 읽혀 들어왔으니까.
[허민회고 최수연이고 어디 한 번 제대로 좃 돼 봐라. 상무 이사 직함도, 성
해 조선소 소장 자리도 다 내 거였다고. 최수연이 그 년이 비서나 하던 주제
에 조선소 인사 관리를 뭘 안다고 거길 기어들어 가?]
[그러니까 크레인 충돌사고 난 뒤로 빠그라진 성해 조선소 인력 배치 효율성
올려보겠답시고 철야로 작업시키고, 멀쩡하게 일하는 안전감독관 해임하다가
그 꼬라지가 난 거 아니야? 내가 했어 봐라. 지금 파업 때문에 지연된 원양어
선 두 척 벌써 건조 끝났지.]
오호, 최수연 때문에 자기 승진이 골로 갔으니 제대로 복수해 주겠다? 이러면
진술의 동기가 충분하고, 신빙성은 아주 차고 넘치네.
나 역시 신은석을 따라 커피를 비운 뒤에 한 걸음을 더 나아가 보았다.
“보셨다는 그 증거를 저희가 입수해야 허민회 전 대표를 처벌할 수 있거든요.
혹시 내부에서 협조 가능하시겠습니까?”
내가 이걸 묻는 이유는 HL 중공업이 너무 큰 회사였기 때문이다.
원래 압수수색은 포괄적으로 하게 되어 있고 원칙적으로는 그 안에 있는 컴퓨
터를 다 들고나와야겠으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를테면, 인사고과 위조 자료 찾는다고 어군탐지기 컴퓨터까지 죄다 압수해
서 검찰청으로 들고 올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내부에서 정확히 그 정보가 담긴 컴퓨터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 대목이었다.
“그렇게 되면 제가 너무 적극적으로 회사를 배신하는 게 되는데요?”
“회사가 아니라 허민회 전 대표 이사와 최수연 전 상무를 응징하는 거라고 생
각해 주실 수는 없을까요?”
이렇게 찌르면 두 사람에 대한 원한 관계 때문에 훅 넘어올 줄 알았는데, 신
은석이 의외의 질문을 던졌다.
“그 응징 확실하게 이루어진다고 보장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허민회가 절대
로 회사에 돌아오지 못하게요.”
이건 무슨 의도로 하는 질문인가 했는데, 그의 마음이 한 번 더 읽혔다.
[이러고 나면 새로 오실 대표 이사 라인 제대로 탈 수 있겠지? 그러면 중공업
에만 안 있고 그룹 본사로 가는 것도 가능할지도?]
그리고 한 얼굴이 떠올랐다. 허민화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나이가 조금 더 들
어보이는 그의 형 허규회였다.
허민회와의 관계는 이미 틀어졌으니 그를 제물로 삼아서 HL 그룹의 또 다른
후계자 후보인 허규회의 라인을 타겠다? 이게 신은석의 진짜 의도였구나.
허민회를 끝장내겠다는 나랑 생각이 딱딱 맞아떨어져서 아주 좋네. 나는 신은
석의 눈을 바라보며 확신의 웃음을 지었다.
“말씀해 주신 자료만 넘겨 주시면 벌금형으로는 절대 안 끝날 겁니다. 유죄
판결 떨어지면 피해를 입힌 기업인 HL 중공업에는 취업 제한 명령까지 걸릴
거니까 허민회 전 대표 이사가 회사로 돌아갈 수가 없죠.”
빈말은 아니었다. 배임 혐의만 갖고는 자신 없었지만, 사문서 위조죄와 위조
사문서 행사죄까지 추가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으니까.
그제야 신은석 역시 더 이상 바지에 손바닥을 문지르지 않고 활짝 웃어 보였다.
“법이라는 게 그렇게 되는군요. 제가 오늘 검사님 찾아뵙길 잘한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첫 만남에 하지 못했던 악수까지 청하더라.
* * *
그 뒤로 2주간의 시간이 더 흘렀다. 그사이 나는 신은석의 진술을 토대로 압
수수색 영장을 받아내는 데에 성공했고, 집행까지 완료했다.
신은석이 회사 몰래 적극 협조해 주었는데도, 자료의 양이 워낙 방대하고 전
문적이라 대검에서 디지털 포렌식 팀이 출장을 오고 나서야 분석이 끝났다.
그리고 지금 내 앞에는 그 분석 끝에 서류의 형태로 뽑아낸 최수연의 인사고
과 위조 증거가 놓여 있다.
그리고 사람도 앉아 있는데, 다름 아닌 내 부모님은 물론 나까지 죽였던 허민
회였다. 회귀하고 나서는 처음인데, 반갑네.
회귀 전이든 후든, 허민회한테 이 말 해 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드디어 이룰
수 있게 됐다.
“허민회 씨, 당신은 배임 혐의로 이 자리에 와 있습니다. 당신은 모든 진술을
거부할 수 있고, 당신이 한 진술은 법정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습니다.
또한, 변호인을 선임할 권리를 가집니다. 이해하셨습니까?”
원래는 용의자를 보호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절차지만, 최근에는 이걸 듣는 게
범죄자의 상징처럼 되어 버린 미란다 원칙 고지였다.
“... 어.”
“여기 서명하십시오.”
“이게 뭔데?”
“벌써 그렇게 날 세우실 필요 없습니다. 그저 조금 전에 제가 드린 말씀을 알
아들으셨다는 확인 서류일 뿐입니다. 못 알아들으셨으면 한 번 더 말씀해 드
릴 수도 있습니다. 원하십니까?”
“됐어.”
쓱쓱-.
꼴에 부자라고 품에서 만년필까지 꺼내서 서명하네.
“좋습니다. 본격적인 조사에 들어가기에 앞서서 한 가지 충고를 드리죠. 여기
는 검찰청이고 저는 당신을 수사하는 검사입니다. 제 앞에서 무례하게 말씀하
시지는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어지간해서는 들을 일이 없던 반말 지적을 당하자 허민회의 목에서 턱을 향해
붉은 기운이 쭉 뻗쳐 올라왔다. 화내면 어쩔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