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벗겨진 누명 (1)
한참 사무실을 뒤지다 보니 웃음이 나오는 포인트가 하나 있었다. 바로 KU 그
룹이라는 너무 거창한 명칭이었다.
보통 ‘그룹’이라고 하면 수십 개의 계열사를 거느리고 거대한 빌딩 하나를 통
째로 사옥으로 쓰는 HL 그룹이나 그 경쟁사인 WB 그룹 같은 곳이 떠오르기 마
련이다.
그런데 KU 그룹의 사무실은 고작 작은 건물의 한 칸을 빌려 쓰는 게 전부였
고, 심지어 우리가 도착했을 때 일하고 있는 직원은 다섯 명에 불과했다.
아무리 다단계 기업의 일은 사무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고 해도,
열 명도 안 되는 상근 인원 갖고 그룹이라니.
이쯤 되면 이름과 실제의 괴리가 너무 커서 상호를 마음대로 정하게 해 둔 우
리나라 상법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게다가 사무실 꼴도 말이 아니었는데, 전체 면적 중 반 넘는 공간에 옥 장판
과 허가 받지 않은 게 확실해 보이는 약병들이 쌓여 있었다.
굳이 이곳의 명칭을 정확하게 부르자면 절반의 창고와 절반의 사무실이라고
하는 게 맞을 것 같았달까?
덕분에 좋은 점도 있었다. 몇 시간씩 걸리곤 하는 여타의 압수수색과는 다르
게 이제 겨우 30분이 지났는데도 슬슬 끝이 보이고 있었다.
종이로 출력된 자료는 거의 다 파란 박스에 담았고, 이제는 우리 수사관님의
소중한 공인인증서가 들어 있을 저 컴퓨터들만 떼어 가면 된다.
그런데 그때, 사무실 문이 벌컥 열리며 흰색 정장을 빼입은 한 남자가 뒤에
직원보다 더 많은 깍두기 형님들을 이끌고 나타났다.
“내 그룹에서 뭐 하는 짓거리야!”
방금 나한테 소리를 꽥 지른 이 노인, 상당히 익숙한 얼굴이었다. 실물은 처
음이지만, 회귀 전 생에서 너무 유명한 범죄자였던지라 사진을 자주 봤기 때
문이다.
일부러 흰색으로 탈색한 게 아닌가 싶은 백발을 자로 잰 듯 정확히 8:2로 빗
어넘긴 이 사람이 바로 (자칭) 구주태 회장님 되시겠다.
동시에 KU 그룹이라는 허세 가득한 회사 이름을 지으시고 다단계 판매업을 하
시다가, 최근에는 누보 사태를 일으킨 장본인이가도 하다.
“공무 집행 중입니다.”
내 담담한 대답에 구주태가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누구 허락받고 내 그룹에 들어와? 당장 못 꺼져?”
푸흡-.
‘내 회사’도 아니고 ‘내 그룹’이란다. 이러면서 자기가 HL 그룹의 허창수 회
장이랑 동급인 기분이라도 느끼려는 건가?
방금 지적받은 허락이라면 정말 받고 온 게 맞았기에 나는 양복 안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압수수색 영장을 꺼내 구주태에게 내밀었다.
“법원 압수수색 허락받고 검찰청에서 나왔습니다. 여기 영장 확인하시고요,
저 컴퓨터들만 담으면 압수수색 끝나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저건 절대 못 줘! 거기 뒤에 있는 자네들, 당장 손에 든 거 놓고 나가란 말
이야.”
애초에 점잖은 말이 안 통할 상대였던 걸까, 구주태가 손짓하자 뒤에 서 있던
깍두기 형님들이 나에게 크게 한 걸음 다가섰다.
그 모습을 본 유재형 수사관과 경찰들 역시 나에게 바짝 다가서며 순식간에
사무실에는 당장 물리적 충돌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흉흉한 분위
기가 조성되었다.
그러면서 구주태 회장의 눈이 조금 전까지 유재형 수사관의 손에 들려 있던
컴퓨터 본체에 딱 고정돼 있는 걸 보니 저게 정말 중요한 건가 보다.
여기서 실제로 몸과 몸이 부딪치는 일이 일어났다가는 저쪽의 쪽수 때문에 우
리가 완전히 제압하기 힘들어 보였다.
이럴 때 공식적인 수사 메뉴얼은 경찰 병력 충원을 요청해서 이 사람들 싹 다
공무집행 방해로 체포하는 건데, 나니까 쓸 수 있는 훨씬 간단한 방법이 있었다.
“구주태 회장님? 저랑 잠깐 따로 말씀 나누시죠.”
“뭐야? 할 말 있으면 여기서 해!”
정말 그래도 되려나? 나는 나름 구주태를 배려해서 조용히 이야기하자고 한
건데, 본인이 싫으면 어쩔 수 없지.
“오시면서 밖에 기자랑 카메라 있는 거 못 보셨습니까?”
실제로 지금 이 건물 밖에는 특종을 주기로 한 내 제보를 받고 KDS 울산 방송
국의 주신영 기자가 나와 있다.
“봤어. 왜?”
“그분들께 제가 구주태 회장님 이야기를 조금 해 드리면 어떨까요? 미국 대학
에서 경영학 공부한 적 없으시죠? 엄연한 학력위조입니다.”
그러자 구주태가 번데기가 되기 직전의 살이 오른 애벌레마냥 굵은 눈썹을 꿈
틀거렸다.
“네놈이 그걸 어떻게...가 아니고! 증거 있어?”
얼씨구, 많이 당황하셨나 보네. 어떻게 알긴? 미래에서 네티즌 수사대에 의해
탈탈 털린 구주태에 대한 방대한 신상 공개 자료에 쓰여 있었거든.
“밖에 오신 주신영 기자님이 저랑 구면이시거든요. 친한 기자님이랑 말씀 나
누는 데 증거까지 필요할까요? 제가 검사인데 원하면 찾아드릴 수도 있고요.
그런데 제가 한 번 입 열면 그걸로 안 끝날걸요?”
“안 끝나면?”
큼큼-.
나는 일부러 헛기침까지 해 가며 목소리를 한껏 끌어올려 보았다.
“내연녀가 있는 거로 알고 있는데요? 기혼이시니 상간녀라고 해야 할까요?”
이번에는 구주태의 당혹스러움이 시각적으로까지 표출되었다. 하얀 머리카락
몇 가닥이 포마드 떡칠을 이기고 일어서더니 내 눈앞에 상간녀의 사진이 떠올
랐다.
어? 그런데 이분 낯이 익다 싶어서 고래를 돌려보니 조금 전에 여기서 일하다
가 지금은 비켜 계신 저 여자분이시네.
으윽. 사진이 영상으로 전환되면서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굳이 둘이 모텔에
서 키스하는 장면까지는 안 보고 싶었는데, 내 눈 어쩌나?
방금 영상에 나왔던 여자와 눈을 한 번 마주친 구주태가 급기야 목소리를 낮
추더니 말을 더듬었다.
“자, 잠깐. 검사 나리. 나랏일 하시는 분이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니오?”
안 될 게 뭐가 있는가? 검사가 수사 중인 사안에 대해 피의자를 특정해서 혐
의 사실을 유출하면 안 되지만, 구주태의 학력위조와 불륜은 내가 수사하는
사안이 아니다.
구주태가 한 발 빼자, 유재형 수사관이 터뜨린 웃음을 시작으로 사무실의 흉
흉하던 분위기가 급반전되었다.
웃음이 전염된 건지 아니면 자기들도 웃고 싶은데 참았던 건지는 모르겠으나,
구주태가 데려온 깍두기 형님들 사이에서도 큭큭거리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네. 말씀드렸듯이 저 검사로서 나랏일 하고 있으니까 방해하지 말아 주시겠
습니까? 지금 안에 계신 분들 일 못 하셔서 압수수색 지연되고 있는 거 보이
시죠?”
결국, 구주태는 고개를 한 번 푹 수그렸다가 깍두기 형님들을 데리고 사무실
에서 철수했고 우리는 압수수색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가 영장을 청구한 검사로서 나의 일이다. 생각 같아서는 이 사건도
내가 맡고 싶지만, 엄연히 성해지청이 아니라 울산지검 관할이라 어쩔 수가
없네.
* * *
KU 그룹과 누보 사태를 울산지검으로 이첩하고 나니 워낙 전국민적 관심을 크
게 받는 사안인지라 수사는 상당히 빠르게 진행되었다.
내 압수수색 박스를 넘겨받은 지 채 2주가 지나지 않았는데, 지금 TV에서는
울산지검 공보담당 검사의 중간 수사 브리핑이 방영되고 있다.
주된 내용은 당연히 KU 그룹과 구주태가 불법적인 방법을 동원해 투자자를 모
집하여 누보의 주가를 조작했다는 것이었다.
곁다리로 그간 KU 그룹의 다단계 사업에도 불법적인 요소가 여러 건 확인되었
다고 한다. 그 결과, 구주태는 이미 구속되었다.
브리핑이 끝나갈 무렵게 공보 담당 검사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 끝으로 이 자리를 빌려 이 범죄를 조기에 발견하고 수사를 개시하여 더 큰
피해를 막아 주신 성해지청의 백동준 검사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러자 한 기자가 불쑥 손을 들었다. 화면에 비친 얼굴을 보니 내가 주식으로
큰 돈을 벌었다고 기사를 냈던 그 사람이네.
- 일각에서는 그 검사님이 누보 주가 조작 사태에 가담하셨다는 말이 있는데
요, 그건 확실히 아니라고 확인된 겁니까?
참 나, 일각에서 그런 말이 있는 건 맞는데 그 말 님이 만드셨잖수?
- 절대 아닙니다. 수사 과정에서 백동준 검사님께서 주가 조작에 개입하셨다
는 증거는 물론 그 어떤 정황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항간에 그런 소문이 있
다는 건 저도 들었습니다만, 그저 백 검사님의 개인적인 투자 성공이었던 것
으로 보입니다.
공보 담당 검사의 확고한 부정에도 기자가 한 번 더 꼬투리를 잡았다.
- 수익 금액만 해도 수십억이셨던 것으로 파악되는데요, 이게 직접 개입하지
않고 가능한 일이라고 보십니까?
- 차트 보니까 두 달쯤 전에 사셨다가 최근에 팔았으면 가능하셨을 것 같은데요?
너무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듯이 뚱하게 나온 공보 담당 검사의 답변에 그
기자가 손을 내리는 것으로 중간 수사 결과 브리핑이 마무리되었다.
이로써 곽한성 검사장이 나를 회부했던 징계위원회 역시 당연히 취소되었고,
빼앗겼던 사건 역시 모두 내 검사실로 돌아왔다.
검찰청 내에서의 일은 이렇게 착착 원래 자리로 돌아가고 있는데, 한 가지 찝
찝한 게 남아있긴 했다.
이번 KU 그룹과 누보 사태를 거치면서 기껏 만들어 놓은 내 스타 검사 이미지
에 균열이 갔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정서상 주식 투자에 성공한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은 항상 양분되어
있기 마련이니까.
하나는 시기와 질투를 보내며 그 사람을 백안시하는 것이고, 완전히 반대인
다른 하나는 그 사람을 우러러보는 것이다.
내 기사에 달린 댓글을 보니 정말 딱 이렇게 두 패로 의견이 갈려서 자기들끼
리 논쟁도 벌이고 있더라.
나로서는 너무나 후자의 이미지로 굳히고 싶은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데, 조
금 전에 메시지 한 통이 도착했다.
- 검사님, 저희 합방 한 번 더 안 하실래요? 저희 시청자들이 검사님 안 오시
냐고 계속 물어어보세요.
발신인은 BJ 초향이었다.
- 합방이요? 좋은 아이템 있어요?
내 답장에 그녀가 바로 반응했다.
- 그럼요. 요즘 검사님에 대해서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제
방송 나오셔서 주식 투자 성공 비법 공유해 주시면 안 돼요?
오호. 듣고 보니 상당히 괜찮은 제안이었다. 방송에 나가서 내 이력과 적당한
투자 상식을 이야기하며 그게 내 투자 성공의 비결이었던 것처럼 포장한다면?
시기와 질투의 대상에서 부러움과 우러름을 받는 큰 개미로 내 이미지를 완전
히 굳혀 놓을 절호의 기회 아닌가?
이번 사건에서 절실히 체감했듯, 여론은 무조건 내 편으로 만들어 두는 게 상
책이기에 나 역시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 그래요. 저는 최대한 빨리 뵀으면 하는데 언제가 괜찮으실까요?
- 저는 검사님만 나와주시면 언제라도 콜이죠. 저번에 검사님 왔다가신 뒤로
제 시청자가 얼마나 많이 늘었는데요. 검사님 계시는 성해로 제가 방송 장비
챙겨서 갈 수도 있어요.
그렇지 않아도 BJ 초향이 있는 서울까지 왔다갔다 하는 게 부담이었는데, 이
렇게 해 주면 나야 땡큐지.
- 그럼 스케쥴 잡히는 대로 한번 더 연락 주실래요?
- 네! 성해나 그 근처에 스튜디오 섭외되는 대로 바로 전화 드릴게요.
* * *
그리하여 바로 다음날, 성해 시내에서 나는 BJ 초향과의 두 번째 라이브 방송
을 진행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