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 검사는 재벌을 사냥한다-17화 (17/51)

17화. 역공을 분쇄하다 (1)

조금 전까지만 해도 투덜투덜 일색이었던 허민회가 관심이 간다는 듯 눈을 번

쩍 떴다.

“그 검사장이랑은 무슨 얘기 했는데?”

“제가 직접 전화해서 듣기로는 퇴직하고 갈 곳 있나 알아보는 중이라고 합니

다. 일 힘든 로펌보다는 기업 고문 변호사 자리 정도 원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희 HL 그룹 본사 법무 고문 자리 어떻냐고 한번 떠보니까 아주 좋아 죽던데

요?”

“그렇단 말이지. 차 돌려서 성해로. 내가 그 검사장 직접 만나서 백동준인가

하는 그 새끼 검사 놈 찍어 내고 만다.”

* * *

요즘 내가 집중하고 있는 사건은 최수연을 상무이사로 승진시킨 허민회에 대

한 배임 혐의이다.

검찰총장님 지시가 있어도 안 될 것 같던 이 수사가 여론의 지지를 받으니 단

박에 이루어지더라.

내가 BJ 초향의 입을 빌려 허민회와 최수연의 관계를 폭로하고 나자 각지의

검찰청으로 이 사건의 진실을 밝히라는 민원이 쏟아져 들어왔다고 한다.

전화로 항의하는 사람도 있었고, 몇몇은 변호사까지 끼고 정식으로 고발장을

제출해 수사를 의뢰하기도 했다.

그중에는 한 입김 하는 시민단체들도 꽤 됐던지라 검찰로서도 도저히 수사 개

시를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대검찰청에서는 당연히 이 사건의 관할 지역에 있는 이곳, 성해지청에

배당했고 지금은 내 손에 들어와 있다.

일단은 HL 중공업에 최수연의 인사고과 기록을 제출해 달라는 공문을 보냈고,

피의자인 허민회와 최수연에게 소환 통보를 해 놓고 기다리는 중이다.

그런데 조금 전 무슨 일인지 곽한성 검사장이 이 사건 관련해서 나를 보자고

하길래 지금은 지청장실에 와 있다.

“그래, 그 HL 중공업 배임 건도 사건 배당이 자네한테로 갔다면서?”

“네. 제가 시작한 일이니 끝까지 잘 마무리해 보겠습니다.”

“그렇지. 마무리는 해야지. 그런데 그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 않겠나?”

이건 무슨 소리래? 범죄자 처벌하는 게 검사가 해야 할 유일한 마무리지, 무

슨 방법이 여러 개가 있어?

“검사장님은 제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처리를 염두에 두고 계신가요?”

“자네가 생각하는 건 허민회 전 대표 이사를 기어이 잡아넣겠다는 거지?”

“실형이 가능할지는 아직 확신이 안 섭니다만, 일단 기소해서 법정에는 꼭 세

우려고 합니다.”

그 말에 곽한성 검사장이 미간을 찡그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꼭 그렇게 곧이곧대로 가는 게 능사는 아니잖나? 자네도 기사 봤는지 모르겠

지만, 허민회 대표 이사 이미 회사에 사직서까지 제출했다더군. 그 최수연이

라는 여자는 더 일찍 자리 떴고. 이쯤이면 잘했어. 오늘 자네 칭찬하려고 부

른 거야.”

이 양반 말 참 이상하게 하시네? 그러니까 칭찬은 해 주는데 이만큼 잘했으면

나머지는 그냥 덮으라고?

“사기업에서 이루어진 인사 조치와 형사적 처벌은 별도라고 배웠습니다.”

“그래. 그 말도 맞는데, 이번 한 번은 내 얼굴 봐서 그냥 덮고 갈 생각 없나?

내가 자네 위해서 준비한 것도 있는데 말이야.”

내가 알던 곽한성 검사장이 아니었다. 고작 한 달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무

슨 일이 있었던 건지 사람이 꼭 양경동처럼 변했네?

“검사장님, 이건 아니잖습니까?”

“아니긴, 뭐가? 자네 손으로 무혐의 처분 내리기 어려우면 다른 검사한테 재

배당해서 처리하도록 하겠네. 이만 돌아가 봐도 좋아.”

끄응-.

이럴 때 마음 침투 능력이 딱 발휘되면 좋으련만, 저번에도 안 읽히더니 오늘

도 곽한성 검사장의 마음은 콱 닫혀 있었다.

[(......)]

그럼 이건 어떨까? 지금까지의 경험을 통해 볼 때, 상대의 마음을 여는 방법

은 두 가지가 있더라.

하나는 나에 대한 호감을통해 자연스럽게 하고 있는 생각이 나한테까지 노출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당황스러워서 자신도 모르게 어쩔 수 없이 생각을

흘리는 것이다.

지금으로서 첫 번째 방법은 땡이다. 곽한성 검사장이 나한테 호감을 갖고 이

자리를 마련했으면 처음부터 마음이 읽혔겠지.

그렇다면 어디 이 양반 당황해하는 모습 구경해 볼까?

“검사장님?”

“뭔가?”

“저는 이 사건 불기소 처분은 물론 재배당도 반대합니다.”

오오, 반응이 온다. 저 팔자 주름 팍 찌그러진 거 봐라.

“뭐야? 언제부터 부장도 못 단 평검사가 검사장이 하는 사건 배당에 이래라저

래라 하는 곳이 됐어? 우리 검찰이!”

“합리적인 이유가 있어서 재배당하시는 게 아니니까요. 피의자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해 사건 담당 검사를 바꾸시겠다면, 지금 변호사 개업도 못 하고 있는

양경동 부장이랑 뭐가 다릅니까? 이러면 검찰 전체가 욕먹는다고 하지 않으셨

습니까?”

언젠가 자기가 한 말을 그대로 돌려받는 게 상당한 심적 타격이었나 보다. 결

국, 곽한성의 마음이 열리며 관련된 기억이 영상의 형태로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성해에서 가장 비싸다고 소문난 한정식 술집에서 곽한성이 허민회와 마주 앉

아 있다. 허민회의 입에서 뱀같은 말이 뿜어져 나온다.]

[“저희 그룹 고문 변호사 자리에 관심이 있으시다고요?”]

[“허허, 평생 법 만지던 제가 퇴직해서 편안하게 일할 곳으로는 딱인 것 같아

서요.”]

뭐야, 고작 이거였어? 검찰 조직을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던 양반이 자기 취직

자리 앞에서 무릎 꿇는 꼴이 되게 사납네.

[“제가 아버지께 잘 말씀드려서 저희 그룹이 검사장님 모실 수 있도록 해 보

겠습니다. 그런데요, 그 전에 처리해 주셔야 할 일이 있어요.”]

[허민회가 따라 주는 술을 받아 마신 곽한성 검사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네.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요.”]

[“백동준 검사라고 아시죠? 그 새끼 법복을 벗겼으면 합니다.”]

[“그 친구가 대표님께 큰 죄를 저질렀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그래도 법복은

제가 마음대로 벗길 수는 없고요, 혹시 이렇게 하시면 어떻겠습니까?”]

[오히려 역제안을 하겠다는 곽한성의 태도에 허민회가 술잔을 다시 채워주며

신기하다는 듯 되묻는다.]

[“검사장님의 복안이 있으시면 듣겠습니다.”]

[“두 분 이쯤에서 화해를 제가 한번 주선했으면 하는데요. 백동준 그 친구가

정의감이 넘쳐서 이런 일을 한 것 같습니다만, 할 만큼 했으니 자기도 본인

앞길에 HL 그룹이랑 척 져서 좋을 게 없다는 건 알겠죠.”]

얼씨구? 내가 법복을 골백번 벗는 한이 있어도 허민회랑은 화해 따위 할 생각

은 추호도 없다.

[허민회 역시 곤란하다는 듯 고개를 한 번 갸웃하더니 자신은 곽한성 따위 보

다 윗사람이라는 걸 분명히 하듯 고개를 뒤로 꺾으며 웃음을 터뜨린다.]

[“재밌는 생각이십니다만, 저는 백동준이가 입고 있는 그 법복 갈갈이 찢어버

리고 싶은 사람이고요, 당장은 검사장님으로서도 그게 어려우시다니까 한 가

지 미션을 드리죠. 지금 검찰청에 들어가 있는 제 배임 혐의 고발 건, 없던

일로 해 주십시오.]

[그러자 곽한성도 자신이 한 끗발 하는 사람이라는 걸 주장하듯 물러서지 않

는다.]

[”그걸 해 드리면 HL 그룹 고문 변호사 자리에는 제가 가는 거로 알고 있어도

되겠습니까? 대략적인 연봉은 얼마나 될런지요?“]

[허민회가 가소롭다는 것처럼 건배도 없이 술잔을 비운다.]

[”저는 그 자리에 앉혀 드릴 수 있는 사람이고, 회사 내규상 검사장 출신이면

연봉 8억부터 시작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그 배임 건 불기소처분 제가 받아오죠.“]

나한테 자기 마음이 읽혔다는 걸 알 리 없는 곽한성은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사건을 재배당해야 하는 합리적인 이유? 이거면 되겠나?“

그러더니 내 앞에 신문이 휙 날아들었다.

- 요즘 ‘뜨는 검사’ 백동준, 주식 거래로 차익 수십억 챙겨. 능력자인가, 주

가 조작범인가?

제목 한 번 웃기게도 뽑았네. 굳이 저 둘 중에 고르라면 미래에서 오를 종목

을 미리 보고 왔으니 능력자라고 할 수 있겠다.

”제가 개인적으로 투자해서 얻은 수익까지 문제 삼으시겠다는 겁니까?“

솔직히 내가 미래에서 보고 온 폭등 종목에 신용 대출까지 왕창 땡겨서 돈 넣

어 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는 검사의 주식 투자에 대해 아무런 규정이 없다. 지금으

로부터 대략 8년쯤 뒤에야 경제 관련 부서 검사들에 한정해서만 내부 금지 지

침이 생길 뿐이다.

그런데도 곽한성은 나름 준비해 둔 말을 거침없이 내뱉었다.

”아니, 내가 투자 자체를 문제 삼는 게 아니라 이거 검사로서 품위유지 의무

위반이란 말일세! 검사가 주가 조작했다고 이렇게 신문에까지 나와서야 우리

검찰 조직이 꼴이 뭐가 되겠냐는 말이야?“

”주가 조작한 적 없습니다.“

”그거야 징계위원회 가서 애기하게나. 지금은 맡은 모든 사건에서 손 떼고 근

신하고 있어.“

하아, 이 양반 뒤통수 쎄게 때리네? 이런 식으로 나한테서 사건을 뺏어다가

자기 말 잘 들을 검사한테 재배당하겠다?

그렇게 해서 허민회가 준 미션인지 뭔지 배임 혐의 불기소 처분으로 완수하고

퇴직 후에 HL 그룹으로 빠져 보시겠다?

와, 저 속이 너무 보이는데 내가 뭐라고 반박할 수가 없는 게 너무 한스러웠

다. 이건 능력이 아니라 권한의 문제다.

검사장이 징계위원회까지 언급하면서 내 손에 쥐어진 모든 사건을 재배당하겠

다고 가져가면 평검사인 나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그래도 이 말 한 마디는 확실히 해야겠다.

”제가 그 주가 조작에 가담한 게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검사장님도 무사

하지 못하실 겁니다.“

* * *

나는 너무 당당했다. 진짜로 주가 조작 따위에 가담한 적이 없으니까. 그저

미래에서 오를 종목이 뭔지 보고 왔을 뿐.

그리고 그 종목이 어째서 그렇게까지 폭등했는지 그 이후의 수사 결과까지 다

알고 왔다는 건 덤이다.

그리하여 나는 이제부터 허민회에 앞서 나한테 떨어진 징계를 벗어던지고 곽

한성 검사장을 쳐낼 목적으로 이 주가 조작 사건 수사에 들어가기로 했다.

원래는 몇 개월 더 있다가 터져야 하는 사건이지만, 맡고 있던 사건도 다 뺏

겨서 시간도 넘치는 마당에 내가 이걸 캐지 못할 이유는 또 뭐란 말인가?

지청장실에서 나와 내 검사실로 돌아와 보니 이미 재배당 명령이 떨어진 사건

의 서류들이 수레에 얹혀져 다른 방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송민지 사무관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에게 물었다.

”이거 검사장님 지시로 다 재배당되는 거라는데, 검사님 괜찮으신 거 맞죠?“

”걱정하지 마세요. 곧 되찾아 올 테니까.“

마침 외근을 마치고 들어온 유재형 수사관도 같은 질문을 하더라.

”이게 무슨 일이에요? 저희 사건 다 뺏겼어요?“

그 물음에 나는 오히려 웃음을 지어 보였다.

”수사관님, 저희 사건 하나 해결하러 가시죠.“

”네? 지금 저희 사건들 다 저렇게 줄줄이 실려 나가는데요?“

”새로운 사건 하나 캐야 될 게 있거든요.“

유재형 수사관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지금 있는 사건도 가져가는데 그게 가능해요?“

”그럼요. 각각의 검사는 한 명 한 명이 국가기관으로서 독립된 수사권을 갖는

걸요. 도와주실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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