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 검사는 재벌을 사냥한다-16화 (16/51)

16화. 검사님 인방하신다 (2)

불안한 느낌이 엄습해 왔다. 이걸 단순 방송사고라고 하기에는 타이밍이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하필이면 이번 방송의 하이라이트였던 허민회의 개인 치부가 드러나자마자 방

송이 딱 꺼지다니.

걱정되는 건 비단 방송뿐만은 아니었다. 내 예감대로 HL 그룹이 개입한 거라

면, BJ 초향의 안전이 위협받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재빨리 방송을 보던 의자에서 일어나 충전 중이던 핸드폰을 집어 들고

BJ 초향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르릉, 뚝-.

통화 연결음이 채 두 번 지나가기도 전에 전화가 끊기고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 고객께서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삐 소리 후...

초향이 일부러 전화를 거절한 것 같았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래

도 자기 핸드폰을 쓸 수 있는 상황이니 안심해도 되는 걸까?

파밧-.

멍하게 전화가 끊어진 화면을 보고 있는데 뒤에서 다시 방송이 켜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화면에는 다시 초향의 모습이 나타나 있었다.

- 여러분 죄송해요. 제 데스크톱 컴퓨터가 갑자기 꺼져서 급하게 노트북 가져

왔습니다. 그런데요, 이게 단순 고장은 아닌가 보네요? 컴퓨터 꺼지면서 이런

문자가 왔지 뭐예요? 잘 보이시나요?

후다닥 의자로 돌아가 방송 화면을 보니 BJ 초향이 화면에 자신의 얼굴과 함

께 핸드폰 화면을 보여주고 있었다. 휴, 일단 정체 모를 곳으로 끌려가지는

않았으니 다행이다.

그와 함께 채팅창에 올라오는 시청자들의 반응도 방송이 꺼지기 전보다 더욱

폭발적으로 변해 있었다.

- 롸? 딱 그때 컴퓨터가 꺼진다고? 이거 빼박 HL 그룹에서 초향 컴퓨터 해킹

한 거잖아. 노트북 있어서 다행이네. 아니었으면 지금 생사 걱정하고 있을 뻔.

- 나도 경찰에 신고해야 되나 했다. 아까 그 검사님이랑 같이 있는 건 아닌가

보네?

ㄴ 아까 검사님 나온 분량은 녹방이었음.

- 문자 뭐라고 써 있는지 안 보임. 읽어 보려다가 눈알 튀어나올 뻔.

마지막 채팅대로 구형 노트북의 낮은 카메라 화질 때문에 핸드폰 화면에 적힌

문자 메시지를 읽을 수는 없었다.

BJ 초향 역시 채팅창을 보고 있었기에 대응은 빠르게 이루어졌다.

- 안 보이나 보네. 제가 읽어 드릴게요. ‘또 그런 헛소리 하면 다음에는 컴퓨

터가 아니라 네 목숨이 꺼질 줄 알아라’ 이렇게 보냈네요. 누가 보냈는지는

제가 말씀 안 드려도 다 아실 것 같은데, 제가 쫄 줄 알고요?

- 롸? 진짜 HL 그룹이 방송 끈 거였어? 근데 초향 안 쫀다고? 개멋지네.

- 이거 보내신 분? 저도 경고합니다. 한 번만 더 이딴 짓 하면 아까 제가 말

했던 동영상 다 풉니다. 제 컴퓨터 해킹하셨으면 거기 있는 동영상 사본도 보

셨죠? 제 너튜브 구독자만 2만 명이에요. 힘은 당신들만 있는 줄 아나? 깝치

지 마세요.

그러고 나자 BJ 초향에게 찬사를 보내는 채팅이 줄줄이 올라왔다.

- 이거시 걸크러쉬인가?

- 초향이 HL 그룹을 찢었다.

- 동영상 궁금한데 지금 안 올리는 거 대인배적 관점에서 찬성. 그거라도 갖

고 있어야 초향 얼굴 계속 볼 수 있겠다.

그 뒤로 간단한 인사말을 남긴 BJ 초향이 이번에는 자발적으로 방송을 종료했

고, 곧장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 검사님, 전화 주셨더라고요. 제가 방송 중이라 못 받았어요. 죄송해요.

이 여자 진짜 대범하네. 방금 목숨을 위협받아 놓고 그걸 ‘방송 중’이라는 말

로 퉁친다고?

어쩌면 이 정도 배짱이 되니까 그동안 HL 그룹을 공개적으로 비판할 수 있었

던 걸지도 모르겠다.

“저도 방송 보고 있었어요. 지금 괜찮으신 거 맞죠?”

- 네. 제 스튜디오로 누가 찾아오거나 하지는 않았어요. 검사님이 주신 동영

상 제가 꽉 쥐고 있으니까 앞으로도 저 못 건들 거예요. 오히려 예전에 저 혼

자 HL 그룹 깔 때보다 더 안전하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어째 자기 목숨이 달린 일인데 나보다 걱정을 덜 하는 것 같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저랑 통화 끝나는 대로 경찰에 신변 보호 요청하세요.

그 문자 메시지 보여주고 개인 컴퓨터까지 해킹당했다고 말씀하시면 바로 조

치 이루어질 거예요.”

- 알았어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런데 그 해킹범 법적으로 잡을 수는

없어요? 이렇게 당하기만 하면 억울한데.

“일단 확실히 안전해지고 나서요.”

큭-.

핸드폰 너머의 BJ 초향이 이번에는 웃음소리까지 내어 보였다.

- 저 안전하다니까요? 이런 일 처음도 아니에요. 개인 방송하다 보면 스토커

들 많이 붙거든요. 살해 협박 메시지 받은 게 지금까지 열 건도 넘을걸요?

“그래도 이번에는 상대가 HL 그룹이잖아요. 정말 조심하셔요. 그 해킹범 처벌

이 법적으로는 어렵지 않아요.”

- 그래요? 어떻게 하면 돼요?

이 여자 여전히 자기를 지키려는 생각보다 상대를 조지려는 마음이 더 큰가

보다.

“명백하게 형법 314조2항 컴퓨터 등을 이용한 업무방해죄에 해당하는 사안이

라 검찰청에 이 조항 들어서 고소장 제출하시면 돼요. 범인 찾기만 하면 법적

으로는 깔끔하게 처벌할 수 있어요.”

- 314조2항. 외웠어요. 불쑥 법률 상담 드렸는데 답변해 주셔서 감사해요.

“제가 드린 부탁 들어주시다가 큰일 당할 뻔하셨는데, 제가 더 감사드리죠.

앞으로도 방송에서 계속 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구독할게요.”

* * *

백동준 검사와 BJ 초향의 방송 이후 성해 조선소 사건은 급물살을 탔다. 최초

보도 책임에 얽매일 필요가 없어진 언론사는 HL 그룹의 압력에서 벗어나 보도

를 쏟아냈다.

- [르포] 성해 조선소 파업은 살고자 하는 울부짖음이었다.

- 더 확대하지는 못할망정 이미 있던 안전장치를 없애려 했던 ‘커리어 우먼’.

- 성해 조선소 파업으로 되돌아보는 우리 일터의 안전.

등등의 기사가 쏟아져 나왔고, 노조위원장 정규석의 인터뷰를 특집으로 싣는

곳도 있었다.

그 덕분에 말할 기회가 생긴 정규석은 자신이 최수연에게 당했던 폭행 무고

사건을 세상에 까발렸다.

이쯤 되니 철야 작업 지시와 안전감독관 제도 폐지로 이미 악마가 되어 있었

던 최수연은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

자기가 스스로 사직서를 제출한 뒤 요즘은 찾아오는 기자들을 피하려 집 밖으

로 한 걸음도 못 나오는 셀프 감금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타격을 입은 건 최수연 한 명뿐이 아니었다. 백동준 검사가 처음에 목표했던

대로 허민회 대표 이사 역시 책임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이곳은 HL 그룹 본사 사옥의 맨 꼭대기 층, 회장실이다. 이 방은 물론 건물을

넘어 HL 그룹 전체를 지배하는 허창수 회장이 얼굴을 잔뜩 구긴 채 의자에 앉

아 있다.

그리고 그 앞에는 허창수 회장의 둘째 아들, 허민회가 손을 앞으로 공손히 모

은 채 서서 고개를 조아리고 있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정말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허민회의 사죄에도 허창수 회장의 얼굴에 노기는 점점 짙어졌다.

“뭐? 할 말이 없어? 입 열었다가는 쥐어 터질 것 같으니까 아예 닫기로 한 거

냐? 네놈이 할 말이 없으면 내가 물어나 보자. 대체 그 동영상은 정체가 뭐

냐? 여직원이랑 놀아나면서 그걸 촬영을 했어?”

“그게 말씀입니다, 아버지. CCTV에 찍힌 영상이 어찌어찌해서 그 BJ한테까지

넘어간 모양입니다. 확실히 회수하도록 하겠습니다.”

“회수? 무슨 수로? 네놈은 컴퓨터 파일이라는 게 무한 복제될 수 있는 것도

모르더냐? 젊은 놈이 말이야. 그 BJ란 계집도 자기 목숨 걸고 지킬 기세던데,

복사본을 안 만들어 놓겠냐 이 말이야!”

푸욱-.

턱이 거의 가슴을 파고 들어갈 정도로 허민회가 깊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노력해 보겠습니다.”

“네놈이 노력한다고 될 일이 아니래두? 말귀를 못 알아듣는 거냐? 그리고 또

뭐야, 그 너랑 놀아난 여직원을 상무로 승진시키고 성해 조선소 소장으로 보

냈다는 건 참이더냐?”

“일이 이렇게 됐는데 제가 어떻게 아버지께 거짓말을 할 수 있겠어요. 죄송합

니다. 제가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꽈악-.

의자 팔걸이에 있던 허창수 회장의 주먹 쥔 손에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힘

이 너무 들어가 색이 하얗게 뜨고 있었다.

“너 당장 HL 중공업 대표 이사직에서 손 떼거라.”

이건 허창수 회장의 뒤를 이을 HL 그룹 후계 구도에서 허민회를 배제하겠다는

선언과 다름 없었기에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나 보다.

가슴팍에 벌건 자국을 남겼던 허민회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아버지?”

“뭐! 이놈아. 이제는 죄송하다는 말도 안 나오더냐? 네 발로 안 내려오면 내

손으로 끌어내릴 테니까 그런 줄 알거라.”

“...... 네. 이사회에 사직서 제출하겠습니다.”

백동준 검사가 목표했던 HL 중공업의 대표 이사 자르기가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말이야, 그 검사 놈은 도대체 뭐냐? 뭔데 그렇게 우리 회사를 못 잡

아먹어서 안달이야?”

허민회의 고개가 다시 푹 숙여지며 이번에는 좌우로 까닥거리기까지 했다.

“그게 말씀입니다, 아버지.”

“똑바로 얘기해라.”

“제가 HL 중공업에 처음 부임했을 때 터졌던 크레인 충돌 사고 있었잖습니까.

그때 사망한 직원 유가족이라고 합니다.”

결국, 화를 참지 못한 허창수 회장은 책상에 있던 서류철을 집어 허민회에게

집어던지고 말았다.

“그러니까 이게 죄다 네놈이 무능한 데다가 계집질이나 하고 다니는 바람에

벌어진 일이라고?”

“그 검사 놈도 제가 꼭 완벽하게 처리하겠습니다.”

“처리? 네놈이? 이렇게 당해놓고 퍽이나! 나가! 당장 내 눈앞에서 꺼져!”

휴우-.

거의 엉덩이를 걷어차이다시피 하며 회장실에서 쫓겨나 HL 그룹 본사 사옥에

서 나온 허민회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백동준이라는 녀석을 제대로 조지지 않으면 도저히 잠이 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앞으로 허민회가 하는 짓은 뭐든지 딴지를 걸고 볼 테니, 지금 제거

하는 편이 좋아 보였다.

턱-.

비서의 안내를 받아 자신의 자가용에 탑승한 허민회가 낮게 뇌까렸다.

“그 백동준이라는 새끼에 대해서 뭐 더 나온 거 없어?”

그러자 허민회를 쫄래쫄래 따라 차에 탄 비서가 얼른 펼쳐진 노트북 화면을

내밀었다.

“최근에 주가가 이상하게 움직이는 종목이 하나 있습니다.”

“주식 얘기 말고!”

“아아, 죄송합니다. 그렇지만은 제 얘기를 조금만 더 들어주십시오. 이 종목

이 주가 조작이 의심되는데 여기에 백동준 검사가 빚까지 끌어당겨서 돈을 때

려 부었다는 게 확인됐습니다.”

그제야 허민회의 눈이 번쩍 뜨였다.

“현직 검사가 주가 조작에 가담했다고?”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지금 상당한 수익을 내고 있는 것으로 보입

니다. 그리고 좋은 소식이 하나 더 있습니다.”

“뭔데?”

비서가 안경을 고쳐쓰며 허민회를 바라보았다.

“백동준 검사가 있는 검찰청에 검사장이요, 이름이 곽한성이라고 하던데 저희

쪽에서 접선하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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