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검사님 인방하신다 (1)
* * *
한번 인터넷 개인 방송을 활용할 수 있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다음 수순은
쾌속으로 진행되었다.
그 뒤로 며칠 동안 퇴근 후에는 어느 정도 영향력 있으면서도 내가 던져주는
소스를 적절한 논조로 터뜨려 줄 채널을 찾는 데에 몰두했다.
그러면서 연락이 닿은 사람들과는 통화를 하기도 하고, 그중 몇몇은 직접 만
날 기회도 가졌다.
한 가지 다행이었던 건, 내가 이미 언론을 통해 얼굴과 이름을 알렸고 검사라
는 직책도 갖고 있어서 인터넷 방송인들이 생각보다 쉽게 마음의 문을 열어
주었다.
그 작업을 일주일 넘게 반복하던 중, 드디어 내 레이더에 딱 맞는 사람이 들
어왔다. BJ 초향이라는 이름을 쓰는 방송인이었다.
인터넷 게시판을 돌아다니며 검색해 보니 이 시기 방송인치고는 눈에 확 띄는
이력을 보유하고 있더라.
HL 엔터테인먼트 연습생으로 오래 있다가 데뷔에 성공하여 1집까지 낸 가수였
으나, 요즘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룹을 탈퇴하고 개인 방송에 매진하는 중이
라고 했다.
초창기 인터넷 개인 방송인들이 대부분 콘텐츠보다는 비쥬얼에 집중했던 컨셉
은 그대로 따라가고 있나 보다.
BJ 초향 역시 몸매를 강조하는 옷을 입고 웹캠을 켜 둔 채 시청자들이 라이브
채팅창에 올리는 내용으로 대화를 이어나가는 방식으로 방송을 진행했다.
그러면서도 특이하게 HL 그룹 이야기만 나오면 시청자가 떨어져 나가는 것도
개의치 않고 강경한 어조로 까대는 것으로 유명했다.
나랑 이야기가 아주 잘 통할 것 같아 그녀기 진행하는 라이브 방송에 슬쩍 들
어가 보니 동시 시청자가 무려 1만 명을 넘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너튜브에 올라간 편집본 중에는 무려 조회수 10만이 넘는 것
들이 심심치 않게 확인되었다.
몇 년 후에 찾아올 대 BJ 시대에는 별거 아닌 숫자이지만, 시청자 풀 자체가
작은 현재 시점에서는 탑급 영향력을 가진 인터넷 방송인이라 볼 만했다.
이 정도면 이미 BJ 초향이 가진 파급력은 어지간한 작은 언론사 하나를 가뿐
히 뛰어넘는다고도 할 수 있다.
뚜르릉, 뚜르릉-.
나는 지금 온라인으로 내 신분과 대략적인 용건을 밝힌 뒤에 받은 BJ 초향의
번호로 전화를 거는 중이다.
- 네. 안녕하세요.
“DM으로 말씀 나누었던 백동준 검사입니다. 통화 괜찮으시죠?”
- 당연하죠. 제가 이 시간에 전화해 달라고 말씀드렸는걸요. HL 중공업에서
파업이 있었다고요? 제가 그쪽 뉴스는 챙겨보는 편인데도 전혀 모르고 있었어
요. 열심히 검색해 보니까 검사님이 인터뷰에서 언급하신 기사 딱 하나 있더
라고요.
역시 이야기가 잘 통할 것 같다는 내 직감이 딱 들어맞았다. 이제 겨우 인사
를 나누었을 뿐인데 저쪽에서 내가 하려던 이야기를 저렇게 적극적으로 물어
봐 주다니.
“말이 안 되죠. HL 중공업 정도 되는 대기업에서 노조원 전체가 참여하는 파
업이 일어났는데 언론이 이렇게 조용하다뇨.”
- 설마 HL 그룹에서 손을 써서 막은 건가요?
“저도 그렇게 됐다는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어서 수사까지 진행하지는 못했
어요. 그래도 알려야 할 내용인 것 같아서 초향님께 연락드렸습니다.”
이어지는 그녀의 대답 역시 시원했다.
- 제 방송이 그렇게라도 도움이 될 수 있으면 대박 환영이죠. 그럼 혹시 검사
님이 직접 출연해 주실 수도 있나요? 제 생각엔 그래야 파급력이 확 올라갈
것 같거든요. 저도 요즘 핫하신 검사님이랑 합방한다고 광고해서 시청자 좀
땡기고요. 헤헷.
“네. 그렇게 할게요. HL 중공업 노조위원장님이 파업 일지랑 최종 협상 결과
넘겨준 사람이 저니까, 제가 직접 말씀드리는 게 맞을 것 같아요.”
- 그럼 방송 전에 미팅 한번 따로 하시겠어요? 대략적인 콘티도 짜고 서로 자
세한 이야기도 듣고요.
“저도 환영입니다.”
그렇게 첫 통화를 마치고 나서 이틀이 지나 나는 BJ 초향의 스튜디오를 방문
하게 되었다. 통화와 마찬가지로 가벼운 인사 뒤에 이야기는 술술 풀려나갔다.
내가 스튜디오에 들어온 지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아 합방을 어떻게 진행할지
얼개가 뚝딱 완성되었고, 우리는 조금씩 사적인 이야기로 들어갔다.
“검사님도 HL 그룹에 관심이 많으신가 봐요? 엊그제 통화하고 나서 검사님 기
사 쭉 찾아봤거든요. 은연중에 그쪽 언급을 많이 하시더라고요.”
“맞아요. 저한테서 부모님을 빼앗아간 곳이거든요.”
“정말요? 무슨 일이 있으셨길래요?”
이제는 많이 무뎌지기도 했고 비밀은 더더욱 아니었기에 나는 HL 중공업에서
일어난 크레인 충돌 사고와 그 결과를 요약해서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는 중간에 나를 방송 파트너로만 보던 BJ 초향의 마음이 살짝이나마 열렸
는지 그녀가 말하지 않은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 HL 그룹 X새끼들, 진짜 (......)]
앞뒤가 잘리는 바람에 여전히 그녀가 HL 엔터테인먼트에 있을 때 무슨 일이
있었겠거니 하는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었지만, 감정만큼은 확실히 전달됐다.
BJ 초향이 이렇게까지 HL 그룹에 반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내가
성해에서 서울까지 올라온 용건을 꺼내 봐도 괜찮을 것 같았다.
“사실 초향님 방송에서 언급해 주셨으면 하는 게 HL 중공업 파업 말고도 하나
더 있는데요.”
“그것도 HL 그룹이랑 관련된 일이에요?”
“네. 이건 제가 못 해서 부탁드리는 거라 거절하셔도 괜찮은데 잠깐 영상 하
나 보여드려도 될까요? 조금 충격적이실 수도 있어요.”
잠시 갸우뚱한 BJ 초향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가져운 노트북에서 허민
화와 최수연의 사무실 정사 장면이 담긴 동영상을 재생했다.
허민회과 최수연의 턱을 확 움켜쥐는 장면이 나왔을 때였다. 순간 BJ 초향의
마음이 완전히 열리며 내 눈에만 보이는 영상이 떠올랐다.
[한 고급스러운 한옥의 커다란 방에 HL 그룹 중역들이 줄지어 앉아있고, 그
상석에는 허민회가 있다. 이곳에 방금 들어온 BJ 초향은 지배인으로 보이는
남자의 안내를 받아 허민회의 옆에 앉는다.]
뜨악! 허민회 이 자식은 양파도 아니고 까도까도 끝이 없네. HL 엔터테인먼트
가수와 연습생들을 접대부로 쓰기까지 했나 보다.
[억지로 싫은 표정을 숨기며 술을 따라가며 분위기를 맞추던 BJ 초향에게 술
기운이 오른 허민회가 손을 쫙 뻗는다. 그러더니 턱을 콱 쥐고는 입술을 훅
들이민다. 너무 놀란 BJ 초향은 이성적으로 판단할 틈도 없이 허민회를 상 쪽
으로 확 밀치고 만다. 그 바람에 술자리는 아수라장이 됐고 허민회는 깨진 술
잔에 얼굴이 긁혀 피가 난다.]
이어서 BJ 초향이 마음으로 하는 말 역시 들려왔다.
[내가 안 간댔는데 억지로 끌고 가 놓고 고작 생채기 좀 났다고 나를 그렇게
만들어? 그룹 강제 탈퇴에 연습생 기간 먹여주고 재워준 값을 다 토해내라고?]
아아, 이게 BJ 초향이 걸그룹을 관두고 개인 방송으로 전향하게 된 계기였나
보다. 이러니 HL 그룹을 그토록 증오할 수밖에.
그러는 사이 내 노트북에서 재생되던 영상도 끝이 났고, 나는 아주 조심스럽
게 초향에게 물었다.
“허민회 대표 이사는 초향님도 아실 것 같고요, 여기 이 최수연이라는 여자는
이 내연관계 빽으로 HL 중공업 상무가 된 것 같아요. 방송에서 톤 조금 낮춰
서 이런 영상이 있다, 최수연이라는 여자가 최근에 성공한 커리어 우먼이라고
신문 인터뷰까지 했더라는 정도만 언급해 주실 수 있을까요?”
허민회에 대한 증오로 눈을 불태우던 BJ 초향이 굳은 얼굴로 입술까지 깨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네. 대신 조건이 있어요.”
“뭐든 말씀해 주세요.”
“이 영상 파일 저한테도 주세요. 사실 저도 허민회가 더러운 짓거리 하는 거
알고 있는데 증거가 없어서 못 터뜨리고 있거든요. 방송에서 언급은 검사님이
말씀하신 대로 조심스럽게 하더라도 증거, 저도 갖고 있고 싶어요.”
그럴 줄 알고 미리 준비해 뒀다. 나는 가방에 다시 손을 넣어 USB 저장장치
하나를 꺼내 BJ 초향에게 내밀었다.
“여기 들어있어요.”
“감사합니다. 검사님 뵙게 돼서 너무 다행이에요. 제 평생에 허민회한테 복수
할 기회가 올 줄은 몰랐거든요.”
“이번 방송하고 나면 HL 그룹에서 초향님한테 압박 들어올지도 모르는데 그때
대비해서라도 이거 꼭 갖고 계시는 게 좋을 거예요. 그럼 그쪽도 함부로 건들
지는 못할 테니까.”
* * *
BJ 초향과의 미팅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고 일주일이 지난 오늘은 방송이 올
라오기로 한 날이다.
내가 출연하는 분량은 녹화 방송을 라이브 스트리밍으로 재생하기로 해서 지
금은 여유롭게 성해 오피스텔에서 방송을 시청하고 있다.
조금 전 1만을 돌파했던 동시 시청자 수가 어느새 2만을 목전에 두고 있는 걸
보니 아주 뿌듯하다.
라이브 방송 속 내가 HL 중공업 파업에 관한 설명을 이어갔다.
- (......) 얼마 전에 젊은이들에게 나이, 성별, 학력 같은 거 신경 쓰지 말
라고 일침 인터뷰해서 유명해진 최수연 상무님 계시잖아요. 그분이 이번 파업
일어난 성해 조선소 소장이시거든요. 그렇게 일 잘하는 척하면서 뒤로는 원래
있던 안전 수칙도 없애서 자기 성과 내려고 했던 거죠. (......)
그러자 채팅창은 방송 기획 의도대로 최수연에 대한 욕으로 도배되었다.
- 와 거머리 같은 년.
- 조선소 작업 중에 사고 한 번 터지면 사람 죽어나는 거 일도 아닌데 철야
작업을 하라고 했다고? 철회돼서 ㅈㄴ 다행
- 저런 주제에 누구한테 일침을 날려?
ㄴ ㄹㅇㅋㅋ 저 여자 인터뷰 보고 뜨끔했던 내가 다 쪽팔린다.
좋다. 내가 최수연을 띄워 놓은 효과가 조금 늦었지만, 제대로 발현되고 있었
다. 그런 와중에 개인적인 메시지도 도착했다.
- 오빠 지금 방송해? 이 기사 그 붕가붕가 영상에 나오는 여자 맞지?
해커 후배 여세린이 보낸 문자를 확인해 보니 가장 무례한 말로 내 제보를 거
절했던 언론사에서 라이브 방송에 나온 내 얼굴을 캡쳐해서 기사를 냈더라.
- 최수연 상무, 커리어 우먼인가? 악마인가?
푸핫-.
기사는 내고 싶은데 HL 그룹에 찍힐까 봐 최초 보도 총대는 메기 싫었다는 거
지? 얘네도 진짜 비겁하네.
내가 기사를 읽는 사이 방송은 더 진행되어 녹화본 송출이 끝나고 BJ 초향이
단독 진행하는 라이브로 넘어갔다.
- 합방해 주신 백동준 검사님 감사드리고요, 오늘 라이브 시청자 수가 평소에
두 배네요. 앞으로 더 열심히 하는 초향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따로 제
보받은 HL 그룹 관련 동영상이 있는데요.
- 아, 초향이 HL 그룹 까는 건 너무 많이 들어서 별론데. 검사님 다시 나오라
하면 안 되나?
ㄴ 또 같은 얘기 할 거 뻔하지 않음?
시청자 채팅창의 반발에도 BJ 초향은 꿋꿋하게 나와의 약속을 지켜 갔다.
- 아니에요. 진짜 새로운 얘기에요. 조금 전에 백동준 검사님이 말씀해 주셨
던 최수연 상무 있죠? 그분이 HL 그룹 둘째 아들인 허민회 씨랑 붕가붕가하는
영상을 제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 마자 올라오는 채팅의 속도가 곱절로 늘어났다.
- What????
- 이거 사실이면 최수연 그 여자 상무까지 올라간 것도 몸 팔아서였던 거네?
- 아니 잠깐만 이거 사실이면 그렇고, 만약에 사실이 아니면 초향 이제 어떻
게 되는 거임? 앞으로 방송에서 볼 수 있는 거야?
여기까지는 나와 BJ 초향이 사전 미팅에서 계획한 그대로 진행되고 있었는데,
그 순간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파밧-.
갑자기 라이브 방송이 꺼지며 초향의 얼굴이 나오던 화면은 검게 변했고 목소
리도 지직거리다가 이내 들리지 않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