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 검사는 재벌을 사냥한다-14화 (14/51)

14화. 대표 이사를 잘라 보겠습니다 (2)

* * *

그렇게 여세린과의 대화를 마친 나는 잠시 짬을 내어 주식 거래 프로그램을

켜 내 돈이 아주 잘 굴러가고 있는 걸 확인하고 잠들었다.

지이이잉, 징징징-.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출근 준비를 하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리며 전화가 걸려

왔다. 발신인은 너무 반가운 이름, 여세린이었다.

- 오빠, 일어나 있었네? 자는데 내가 깨운 거 아니지?

“아니야. 출근 준비하고 있었어. 내가 어제 부탁했던 거 벌써 결과 나왔어?”

- 응. 그런데 이게 검사랑 검찰청 직원끼리 공유하기에 완전히 떳떳한 내용은

아닌 것 같아서 전화로 얘기할까 하고.

그렇지. 아무래도 공식적인 절차를 거친 수사가 아니다 보니, 여세린이 말한

대로 이 정도 조심은 하는 게 맞다.

이번 일에서 내 상대는 무려 HL 그룹의 허민회이니 책 잡힐 일은 최대한 조심

하는 게 좋기도 하고.

“내가 챙겼어야 했는데, 그런 것까지 신경 써 줘서 고마워. 결과는 어때?”

- 오빠가 말한 그대로야. 붕가붕가 영상이라길래, 큭, 기간 맞춰서 자동 삭제

된 파일은 냅두고 일부러 삭제한 파일들부터 쭉 복원해 봤거든? 그랬더니 정

말 HL 중공업 허민회 대표 이사 얼굴이 나온 거 있지?

와, 나는 삭제된 모든 파일 복원하려면 시간이 꽤 걸리겠다고 생각하고 있었

는데 역시 내 후배 똑똑하다.

“얼굴 잘 보여? 그게 중요한데.”

- 어. 완전 잘 보여. 허민회 대표 이사, 이 사람 언론에는 아주 점잖은 척하

고 나오더니 의외로 변태인가 봐. 일부러 카메라 보면서 하고 있던데?

사무실에서만 할 때부터 뭔가 쎄하더라니, 취향 진짜 이상하다. 뭐, 나로서는

덕분에 따로 화질 개선 같은 후속 보정 작업 안 해도 되니 개이득인 셈이지만.

“허민회 말고 최수연은?”

- 오빠도 파일 직접 보면 알 텐데, 중간에 허민회가 카메라 보라고 하는 바람

에 같이 있던 여자 얼굴도 완벽하게 찍혔어. AV 배우가 꿈이었나 봐, 어떡해.

오케이. 저 별난 개인 취향은 그냥 존중해 주는 거로 하고, 두 사람 다 제대

로 나왔으면 그걸로 됐다.

“그 파일 성해지청 말고 나한테 개인적으로 보내줄 수 있어?”

- 어, 나도 그것 때문에 전화했잖아. 어제 퇴근하면서 내가 복원 작업한 로그

는 다 삭제했거든? 아무래도 공식 기록 안 남기는 게 좋을 것 같아서. 파일은

지금 오빠 이메일로 보내줄게. 법적인 건 오빠가 더 잘 알겠지만, 조심은 해

서 쓰는 게 좋을 것 같아.

일은 검찰청에서 하고 있어도 역시 해커란 건가? 이런 조심성 가득한 태도 마

음에 드네.

“당연하지. 고마워. 서울 가면 밥 진짜 비싼 거 사 줄게.”

- 그래. 나 많이 먹는 거 알지?

“그럼. 내가 한두 번 본 게 아닌데.”

잠시 후, 도착한 파일을 받아 보니 여세린이 말한 그대로였다. 자, 이제 재료

는 확보됐으니 본격적인 요리에 들어가야겠다.

출근 준비를 계속하며 생각해 보니, 역시 배임죄 적용은 무리였다. 죄가 성립

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증명 과정이 너무 험난하다.

이 영상으로 허민회와 최수연이 내연관계인 건 확실해졌지만, 그 관계가 최수

연의 승진에 영향을 미쳤다는 증거를 찾을 방법이 마땅치 않다.

HL 중공업의 내부 자료를 싹 다 털면 가능할 수는 있어도, 그러려면 성해지청

선에서는 어림도 없다.

검찰 중에서도 저 위에 계신 분들이 움직여야 하는데 아무리 검찰총장에 VIP

가 관심을 가졌다고 해도 도저히 무리다.

상무 이사 인선 하나 갖고 HL 중공업, 나아가 HL 그룹의 둘째 아들을 타게팅

한 수사를 벌이겠다고 하면 당장 불호령이 떨어질 게 뻔하다.

이 내연관계만 갖고도 성립되는 죄는 물론 있다. 허민회가 기혼이니 둘은 아

직 폐지되지 않은 간통죄에 걸리게 된다.

여기에도 문제는 있는데, 간통죄는 피해자가 직접 고소해야 처벌할 수 있다.

즉 이번 경우엔 허민회의 아내가 고소장을 써 줘야 하는데, 이건 총장님 설득

보다 더 힘든 일이 될 것이다.

심지어 허민회의 아내가 간통죄로 고소장을 쓰려면 법적으로 이혼 절차를 밟

겠다는 의사 표시가 되니 이쪽은 아예 가능성이 없다고 봐도 좋다.

그렇다고 내가 이 신선한 재료를 그냥 버릴쏘냐? 나한테는 검사로서의 힘 말

고도 우승식 사건을 처리하며 다져 둔 언론 권력이 있다.

여론 재판은 되게 특이해서 법정 재판처럼 모든 사실을 증거로 완벽하게 증명

할 필요가 없다. 그저 그럴 것 같다는 개연성만 대중에게 던져 줘도 충분하다.

* * *

그로부터 며칠 뒤, 나는 한 인터넷 신문사에서 내보낸 최수연의 인터뷰가 실

린 기사를 읽고 있다.

나랑 짠 기자의 말을 들어보니 인터뷰 요청이 들어가자마자 허영심에 가득 차

서는 바로 수락했다고 한다. 이게 내가 파 놓은 함정이라는 건 꿈에도 모르겠지.

- 기자: 오늘은 HL 중공업의 최수연 상무님을 모셨습니다. 실례지만 올해 나

이가 어떻게 되시나요?

- 최수연: 서른셋입니다.

- 기: 정말 대단하세요. 30대에 그것도 여성의 몸으로 그런 큰 기업에서 임원

직을 수행하고 계시다니요.

사실 이 인터뷰는 컨셉까지 내가 기획한 작품이다. 최수연을 왜 이렇게 띄워

주냐고? 간단하다. 높은 곳에서 떨어뜨려야 더욱 큰 타격을 입힐 수 있으니까.

- 최: 어휴, 말씀은 감사한데 제가 별로 안 좋아하는 말이에요. 회사에서 일

만 잘하면 되지, 나이랑 성별이 무슨 상관이 있겠어요? 저는 회사에 제 능력

을 보여줬고, 회사는 그걸 알아봐 줬다는 게 전부입니다.

얼씨구? 회사에 능력을 보여주긴 개뿔. 허민회한테 다른 걸 보여줘서 승진해

놓고 말을 저렇게까지 뻔뻔하게 할 줄은 또 몰랐네.

- 기: 능력을 보여주면 된다! 나이와 성별은 중요한 게 아니다! 정말 많은 분

께 귀감이 되는 말씀, 감사합니다. (......) 끝으로 이제 막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청년들에게 먼저 성공하신 분으로서 조언을 한 말씀 해 주신다면요?

- 최: 나이, 성별, 학력, 집안 배경, 이런 자신이 처한 조건에 너무 신경 쓰

지 마세요. 사실은 눈앞에 있는 일을 해내는 데에 큰 관련이 없는데 오히려

일보다 그런 조건을 더 많이 걱정하시다가 정작 해야 할 일을 못 하는 것만큼

바보 같은 짓도 없다고 생각해요.

절레절레-.

말이야 맞는 말인데, 과연 최수연의 나이가 훨씬 많았거나 성별이 달랐어도

허민회한테 안겨서 상무 딱지를 달 수 있었을까? 아니올시다.

이 기사는 내 의도대로 사람들에게 아주 잘 퍼지고 있었다. 포털 메인에도 하

루 동안 올라가 있었고, ‘이 주의 인물’이라는 코너에 별도로 소개되기도 했다.

다른 언론사들에서도 이 흐름에 편승하고 싶었는지 최수연의 이력을 담은 기

사를 연이어 내고 있었다.

이쯤 되면 최수연과 허민회를 엮어서 동시에 골로 보내 버리겠다는 내 계획의

절반 정도는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제 오늘 저녁에 내 영상 제보를 받고 확신을 가진 기자들이 저 둘의 내연관

계를 폭로하는 기사만 내주면 모든 게 완성된다.

이미 최수연이 뭔가 특별한 방법으로 HL 중공업의 상무를 달았다는 사실은 대

중에게 콱 각인돼 있다.

그러니 대표 이사, 그것도 총수 아들과의 내연관계만 폭로되면 사람들은 자연

스럽게 그 둘을 연결지을 것이다.

이러면 내가 힘들게 배임 혐의를 수사해서 그걸 발표할 필요도 없다. 여론의

힘에 떠밀린 최수연은 당연히 짤릴 것이고, 그 여파는 허민회한테까지 미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몇 시간 뒤, 내 계획과는 완전히 다른 일이 벌어졌다.

- 죄송한 말씀 드려요. 오늘 저녁에 나갈 거라고 말씀드렸던 HL 중공업 사내

불륜 관련 기사 있잖아요, 다른 기사로 대체될 것 같아요.

내 제보를 받고 허민회와 최수연의 불륜 관계를 폭로하기로 했던 기자 중 한

명이 보낸 메시지였다.

- 다른 기사로 대체된다고 하시면, HL 중공업 사내 불륜 사건 보도는 연기되

는 건가요?

다급한 마음에 얼른 답장을 해 보았는데, 더욱 절망적인 메시지가 올 뿐이었다.

- 아뇨. 아예 보도가 안 될 것 같습니다. 데스크에서 안 싣기로 했대요. 소중

한 제보해 주셨는데 다시 한번 정말 죄송합니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희망이 살아 있었다. 같은 내용을 동시에 보도하기로 한

신문사가 아직 두 곳 더 남아 있었으니까.

그 뒤로 채 30분이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내 핸드폰이 거칠게 울리더니 또

기자들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 편집국에서 기사 못 올려 주겠다네요. 저희 광고 문제도 조금 걸려 있는 것

같고요, 저로서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 오늘 저녁 기사 못 나갑니다. 관련해서는 따로 연락 주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하아. 결국, 세 곳 모두 빠그라졌다. 아직 불륜 동영상 파일은 내 손에 있으

니 다른 언론사에 더 접촉해 봐야 할까? 과연 그게 의미가 있을까?

보도가 확정적이라고 했던 세 곳 모두에서 이렇게 갑자기 입장을 뒤집었다는

건 HL 그룹에서 언론에 장악력을 발휘했다는 뜻이었다.

다른 곳에 계속 제보해 본들, 결과가 달라지지는 않을 것 같았다. 이 생각을

증명이라도 하듯 전화가 한 통 더 걸려왔다.

- 안녕하세요. 검사님.

일전에 우승식의 밀수 사건 때 나랑 안면을 텄던 KDS 울산 방송국의 주신영

기자였다.

“네. 주 기자님. HL 중공업 노사 협상 타결된 건 취재 잘 되고 있으시죠?”

- 저도 그것 때문에 전화 드렸는데요, 저도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HL 중공업

관련해서는 당분간 어떤 것도 보도하지 않을 거니까 취재 멈추라는 지시가 내

려왔어요. 보도국장님 선에서 나온 결정이라 도저히 제가 어떻게 할 방법이

없네요.

와, 그러니까 허민회 이 인간 내가 이번에는 법 대신 언론을 이용하려는 걸

미리 간파하고서 아예 모든 통로를 다 틀어 막아놨다?

“아니에요. 그간 애써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다음에 또 특종으로 다루실 만한

사건 있으면 주 기자님께 먼저 연락 드릴게요.”

- 일이 이렇게 됐는데 또 배려해 주신다고 하시니, 제가 더 감사드려요.

착잡한 마음으로 주신영 기자와의 통화를 마무리하고 나자, 너무 큰 허무감이

몰려왔다.

내가 그토록 공들여 준비한 보도가 어린아이 손목 꺾이듯 대기업의 입김 한

방에 무산되어 버렸다.

이렇게 끝나서야 결과적으로 내 손으로 최수연을 국민 커리어 우먼으로 만들

어 준 꼴밖에 안 되지 않는가? 이대로 포기해야 하나?

퇴근 후, 그렇게 한참을 좌절감에 빠져 있는데 문득 내가 너무 옛날 사람처럼

생각하고 있다는 반성이 들었다.

내가 경험하고 돌아온 15년 뒤의 미래에서는 대기업이든 정부 권력이든 이런

식으로 언론을 통제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개인 방송에서 SNS로 이어지는 이른바 뉴미디어가 기성 언론에 못지않은 커다

란 언론 세력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개인 방송에서 화제를 불러일으킨 이슈가 기성 언론을 통해 재보도되

는 일도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그리고 지금은 그런 뉴미디어가 막 이 사회에 나타나기 시작한 시점이다. 그

렇다면 내가 이걸 이용하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