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 검사는 재벌을 사냥한다-8화 (8/51)

8화. 스타 검사가 되련다 (1)

꽈악-.

절대로 선심 따위 배풀어 줄 생각이 없다는 나의 최후 통첩이 떨어지자 내 바

지 밑단을 붙든 우승식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산만한 덩치에 회귀 전 나이로 쳐도 나보다 많은 사람이 무릎까지 꿇고 저러

고 있으니까 되게 비참해 보이네.

“검사 나으리, 제발 한 번만 자비를 보여주십시오. 두 가지 부탁 다 들어달라

고도 안 하겠습니다. 저희 딸만이라도 구속은 면하게 해 주십시오.”

“우지현 양은 우승식 씨보다 구속 사유가 더 중대합니다. 추가 피해가 이미

발생해서 도저히 구속영장 청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따님의 죄를

조금이라도 덜고 싶은 마음이 있으시다면 제가 제안 드릴 수 있는 건 있는데요.”

그 말에 우승식의 고개가 번쩍 들려 나를 올려 보았다.

“뭐든 말씀만 해 주십시오. 제가 무슨 짓을 해서라도 꼭 그 말씀대로 하겠습

니다.”

참나, 여기서도 저 썩은 사고방식이 드러나는구나. ‘무슨 짓을 해서라도’라

니? 그럼 또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다는 말인가?

“우승식 씨한테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닐 겁니다. 가해자의 보호자로서 우지

현 양의 피해 회복을 위한 노력을 하십시오.”

“피해 회복 노력이라고 하시면, 합의금 말씀이십니까? 저희 쪽에서는 여러 번

변호사 통해서 제안했는데 그 아이가 합의는 안 하겠다고 하던데요?”

“처벌불원서에 사인해 줘야 준다고 한 거 아닙니까?”

내 말을 이해 못 하겠다는 듯 우승식이 눈을 깜박이며 되물었다.

“합의를 안 하는데도 돈을 줄 수가 있나요?”

내 기억 속에서 부모님의 목숨값으로 받았던 2천만 원과 함께 그때 사인했던

서류에 적혀 있었던 단어가 떠올랐다.

“그럼요. ‘위로금’ 형식으로 지급하시면 됩니다. 지금 피해자가 입원해 있으

니 병원비는 당연히 지급하시는 게 좋을 거고요, 추가 금액 역시 액수가 클수

록 좋습니다.”

“아이고, 검사님 감사합니다. 그런 방법이 있었네요. 제가 그 돈을 내기만 하

면 저희 딸은 무죄가 되는 겁니까?”

꿈도 크네. 지금 우지현이 저지른 짓은 법정 형량이 최소 징역 3년으로 정해

져 있는 엄청난 중죄다.

게다가 이 사건에 적용되는 성폭력 특례법 제14조는 합의가 된다고 처벌이 이

루어지지 않는 반의사불벌죄도 아니다. 고작 위로금 따위로 무죄가 될 리가

있나?

“아뇨. 이 사건에서 무죄는 절대로 안 나옵니다. 실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

았으니 그 효과는 제한적이겠지만, 위로금 지급만으로도 형량이 조금 줄어들

긴 할 겁니다. 그리고 우승식 씨가 따님을 위해서 하셔야 할 일이 하나 더 있

습니다.”

“네, 네. 뭐든 말씀만 해 주십시오.”

“우지현 양이 끝까지 반성문이랑 사과문을 안 쓴다고 버티고 있던데요, 이것

도 양형 기준 생각하면 아버지로서 쓰도록 설득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이걸

말씀드리는 게 제가 검사로서 해 드릴 수 있는 최선의 배려입니다.”

내 말이 끝나자 우승식의 고개가 푹 떨어졌다.

“...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가 구속되면 방금 말씀해 주신 것들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어쭈? 기껏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호의를 보여줬더니 그걸 갖고 자기 구

속을 면해 보시겠다?

“맞습니다. 구치소로 이감되시면 핸드폰 사용은 물론 외부와의 연락도 제한되

실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아내분한테 전화해서 제가 말씀드린 조치 신속하게

이행되도록 하시죠.”

“네. 알겠습니다.”

스르륵-.

내 앞에서 썼던 온갖 꼼수가 통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는지, 우승식의 손에

서 힘이 풀어지며 내 바지 밑단이 자유로워졌다.

* * *

조사실에서 나온 나는 엉망진창이 됐던 민원실에 들러 잘 정리된 걸 확인하고

내 검사실로 돌아왔다.

지이이잉, 징징징-.

그러고 나서 서류를 정리하며 한 시간 정도가 흘렀을 때였다. 내 핸드폰이 울

리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네. 백동준입니다.”

전화를 받아 보니 한 여학생의 울먹이면서도 굉장히 기뻐하는 목소리가 들려

왔다.

- 검사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냅다 감사하다는 말부터 하니 조금 당황스럽긴 했는데, 누군지 충분히 짐작할

수는 있었다.

“김선미 양이신가요?”

- 네. 맞아요. 저 선미에요. 핸드폰이 없어서 지금 엄마 전화 빌려서 연락드

리고 있어요.

그렇지. 내가 김선미의 핸드폰을 증거물로 가져왔으니 자기 번호로는 전화할

수가 없는 게 맞다.

“일이 잘 해결되셨나 봐요.”

- 이게 그냥 잘 해결된 것도 아니고요, 병원 원무과에서는 제 병원비 우지현

어머니가 다 내기로 하셨다고 알려줬고요, 제 통장에는 4천만 원이나 들어왔

어요. 합의해 주면 받기로 했던 액수에 두 배예요. 이 돈이면 저희 엄마도 쉬

면서 일하다 다친 발목 치료받으실 수 있어요.

김선미의 밝은 목소리를 들으니 어깃장 놓고 싶지는 않은데, 이와중에 저 액

수 무지하게 마음에 안 드네.

양경동한테 뇌물로는 5천만 원 꽂아주면서 피해자한테는 4천만 원만 줬어? 거

기다 처음에 주려고 했던 액수는 그 절반이었고?

이 우승식 & 우지현 패밀리 사람 급 나눠서 무시하는 건 도저히 고쳐지지 않

는 천성인가 보다.

“잘됐네요. 어머니랑 같이 치료 잘 받고 푹 쉬어요. 힘든 일 있었다고 학업

놓지 말고 졸업은 꼭 하시고요.”

- 네. 이게 다 검사님이 신경 써 주신 덕분이라고 우지현 어머니가 그러시던

데, 정말 큰 도움 받았는데 제가 검사님한테 뭐 하나 해 드릴 수 있는 게 없

네요.

“원래 검사가 그런 일 하는 사람이에요. 저 나라에서 월급 따박따박 나오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시고, 몸조리 잘하세요.”

내가 전화를 끊으려는 기색을 보였기 때문일까? 핸드폰 너머의 김선미가 다급

하게 나를 불렀다.

- 검사님!

“네. 선미양.”

- 꼭 여쭤볼 게 있었는데요, 제가 이 4천만 원 받으면 합의한 거로 처리되는

건 아니죠? 그게 제가 우지현을 용서해 준다는 뜻이라더라고요. 그건 정말 싫

어서요.

이렇게 안 되게 하려고 내가 얼마나 애를 썼는데.

“아니에요. 위로금은 합의랑 아무 상관 없어요. 합의는 나중에 정말 용서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드시면 그때 하셔도 되고요, 안 하셔도 상관없습니다.”

- 아, 그렇군요!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검사님. 이제 학교 가도 괴롭히는

사람 없을 테니까 지각, 결석 안 하고 공부도 열심히 할게요.

통화가 이어질수록 김선미의 목소리에서 물기가 걷혀 가는 걸 들으니, 오늘

헛고생한 건 아닌 것 같아 뿌듯하네.

* * *

다음 날, 점심시간에는 출동해야 할 곳이 있어서 검찰청 옆 편의점에서 빵과

음료를 사 오는데 뒤에서 나를 따라잡는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검사님, 검사님.”

돌아보니 나랑 같은 검사실에서 근무하는 유재형 수사관이었다.

“네. 수사관님.”

“그 소식 들으셨습니까?”

“무슨 소식이요? 재밌는 일 있나 봐요?”

유재형 수사관이 아주 흥미진진한 이야기라는 듯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게 말입니다, 양경동 부장검사님 사표 내셨대요.”

푸핫-.

난 또 뭐라고. 대충 예상은 하고 있었다. 최대한 빨리 자기 발로 검찰청 뜨는

게 본인한테도 이익일 테니까.

뇌물 받았다가 감찰 당하고 형사 조치까지 이루어진 다음에 쫓겨나면 변호사

개업 허가가 안 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건이 본격적으로 불거지기 전에 얼른 나가서 변호사 사무실 차리고

변호사 사무실 차려서 돈 바짝 땡길 생각인 게 너무 투명하게 보이네.

양경동 이 인간은 어째 검사라는 사람이 모든 행동을 돈 따라서만 하냐? 그럴

거면 사법고시 보지 말고 사업을 할 것이지.

“그래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한 내 되물음에 유재형 수사관이 재빨리 자기 질문을

갖다 붙였다.

“검사님 모르셨구나. 그런데요, 소문이 이상하게 났어요. 양경동 부장님이 관

두신 게 검사님 때문이라는 말도 있고, 아예 검사님이 자르신 거라는 말도 도

는데요? 검사님 뭐라도 아는 거 있으시면 말 좀 해 주세요. 저 궁금해 죽겠어

요.”

회귀한 내 입장에서는 이 유재형 수사관을 10년도 더 지나서 다시 보는 셈인

데, 이 외모와 성격의 불균형은 여전하네.

이름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성별은 당연히 남자고, 덩치도 격투기로 치면 무

조건 헤비급으로 들어갈 정도로 장대하다.

게다가 합기도, 검도, 유도 다 합쳐서 총 무술 단수가 11단이라던가? 아마 곰

이랑 1:1로 싸워도 안 질 거다.

그런데 항상 이렇게 재잘거리고, 우리 검찰청 내에서는 모든 소문의 중심으로

통한다.

“제가 아는 거요? 없어요. 유 수사관님이 모르시는 소문을 제가 어떻게 알겠

어요.”

“이상하네. 그러면 왜 자꾸 백동준 검사님 이름이 들릴까요?”

“저도 궁금한데 알게 되면 말씀해 주세요. 그건 그렇고, 수사관님 점심 드셨

습니까?”

유재형 수사관이 재빨리 자기 손목시계를 확인한 뒤에 대답했다.

“지금 11시 조금 넘었는데 점심을 벌써 먹어요?”

“저랑 수사관님 이따 1시까지 출동해야 하거든요. 힘쓰시려면 빨리 드세요.”

“네? 그래서 검사님도 그 빵이랑 콜라 사 오신 거예요? 어딜 가는데요? 그보

다 이 시간에는 밥 같이 먹을 사람도 없는데요.”

결국, 나는 소중한 점심 빵을 유재형 수사관에게 나눠주며 점심을 해결한 뒤

지금 성해항에 와 있다.

목표는 당연히 어제 우승식을 조사하면서 마음 침투를 통해 알게 된 밀수품을

압수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하나 더, 우승식에게 협조해서 세관 공무원으로 자기 의무를 도외시하

고 밀수에 협조한 조성래 역시 체포할 것이다.

빵을 나눠 먹으며 나에게 오늘 할 일을 대략 전해 들은 유재형 수사관이 주변

을 둘러보더니 또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검사님, 저기 카메라랑 기자들 와 있는데요?”

“알아요. 제가 불렀어요. 오늘 저희가 압수할 물건 취재해 갈 분들이세요.”

“네? 수사 끝나기 전에 언론에 알려도 돼요? 부장님 아시면 가만히 안 있으실

텐데요.”

나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이며 대답했다.

“양경동 부장님 관두셨다면서요.”

“아, 그건 그런데요, 꼭 부장님 아니라도 차장님이나 그 위에 지청장님도 있

고요.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피의자 특정해서 혐의 공표하는 거 아니면 상관없어요. 기사도 압수된 짝퉁

물품 위주로 나가기로 이미 다 합의돼 있고요. 국민들이 명품인 줄 알고 짝퉁

사게 하는 일은 막아야죠.”

“그건 맞는 말씀이신데요, 그래도 저는 검사님 깨지실까 봐 참 걱정이 됩니다.”

유재형 수사관이 왜 이러는지는 아주 잘 알고 있다. 검찰 조직은 검사 개인이

언론에 노출되는 걸 극도로 꺼린다.

이유든 핑계든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에 가장 중요한 건 언론이 검찰의

수뇌부보다 힘이 세기 때문이다.

그러니 평검사 하나가 언론에 나가서 자기 이야기를 했다간 자칫 조직 전체의

명령 계통이 서지 않는다고 믿는다.

내가 굳이 이 자리에 기자들을 부른 건 바로 이걸 역이용하기 위해서이다. 나

는 스타 검사가 될 것이다.

그럼으로써 검찰 수뇌부는 물론 여러 정계와 재계 인사들까지 압박할 수 있는

힘을 내 손에 쥘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