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이 여고생은 친구를 팝니다 (1)
가장 먼저 착수한 일은 새로 들어온 정보 확인, 즉 양경동한테서 받아온 탄원
서 뭉치를 읽는 것이었다.
하암-.
분량은 많은데 마치 한 사람이 쓰기라도 한 것마냥 다 거기서 거기인 내용이
어서 하품이 나올 지경이었다.
- 우지현 학생은 우수한 성적으로 지난 중간고사에서는 전교 3등을 차지하기
도 했습니다.
- 지현이는 정말 성실해요. 야자 한 번 안 빠지면서 공부해서 그런지 성적도
되게 좋아요. 친구지만 닮고 싶을 정도로요.
양경동이 요약해 줬던 대로, 담임 교사가 썼든 같은 반 학생들이 보냈든 죄다
우지현이 공부 잘한다는 이야기 일색이다.
참나, 공부를 잘해 봤자 나보다 잘했겠는가? 나는 서울대, 그것도 내 학번에
서 입학 성적이 가장 높았던 경제학과를 나왔는데.
그리고 사법고시까지 패스하여, 나 자신이 공부라면 어디 가서 안 꿇리기도
하고 주변에 나만큼 잘했던 사람들 숱하게 봤다.
그런 관점에서, 이건 정말 무의미한 탄원이다. 성적 잘 뽑는다고 인성이 좋으
리라는 보장을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공부 잘해서 얻은 높은 사회적 지위에서 죄의식 없이 범죄를 저지르면
잡범들이랑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피해 규모가 커지기 마련이다.
그러니, 검사로서 이 탄원서를 읽고 나서 드는 생각은 우지현을 더욱 확실히
응징해야겠다는 것일 수밖에 없다.
양경동한테 5천만이나 원 찔러 준 우지현의 어머니는 이 탄원서 받아내는 데
에도 돈 좀 썼으련만, 오히려 역효과만 일으킨 꼴이다.
가끔, 우지현이 아니라 피해자인 김선미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는데 이것도 천
편일률적이기는 매한가지다.
- 김선미 학생은 지각과 결석이 잦고 다른 교과 과목 선생님들로부터도 수업
에 집중하지 않는다는 말씀이 많습니다.
- 선미는 학교를 왜 다니는지 모르겠어요. 공부도 안 하고, 친구들이랑 잘 어
울리지도 않는데 그럴 거면 집에 있지 왜 꼽사리 껴 있나 모르겠어요.
등의 소극적인 성격을 비판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이것도 대체 무슨 목적으로 이런 내용을 써낸 건지 모르겠는데, 소심하면 범
죄를 당해도 된다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이라도 하고 싶었던 건가?
이걸 쓴 교사든 학생이든, 정말 그런 생각 하면서 학교 다니고 있을까 봐 소
름이 다 끼치려고 하네.
그렇게 하품에서 소름까지의 신체 반응을 겪으며 그 두꺼운 서류를 다 읽었는
데, 끝내 내가 찾던 글은 나오지 않았다.
이렇게 범죄 사실과 그 증거가 명확한 사건의 경우 범죄자는 반성문을 제출하
기 마련이다. 인정에 호소할 수 있는 미성년자라면 더욱 그렇다.
그래야 우지현의 어머니가 그토록 좋아하는 기소유예를 받을 가능성도 커지
고, 기소되어 법정까지 가더라도 판사가 형량을 깎아 줄 여지가 생긴다.
그런데 죄를 면해 보겠다고 수천만 원을 뿌리면서도 그 흔한 반성문 한 장을
안 썼다는 건, 우지현 본인은 요식 행위로도 절대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겠
다는 의미이다.
아직 성인도 안 된 게 어떻게 이런 빻은 인성을 갖고 있나 싶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니까 그 정도 중범죄를 저질렀겠거니 하는 생각도 드네.
* * *
마음 같아서는 당장 우지현을 만나서 잘못했다는 말을 듣고 구속해야 성에 차
겠건만, 일의 순서상 이건 조금 미뤄야 한다.
내가 우지현을 부른다고 바로 튀어오지도 않겠거니와, 통상의 수사 절차상 피
고소인 우지현보다 고소인 김선미를 먼저 보게 되어 있다.
그리하여 지금 나는 김선미가 입원해 있는 병원에 와 있다. 안내 데스크에 물
어 병실로 들어와 보니 김선미는 꼴이 말이 아니었다.
정신적 충격에 시선은 초점 없이 천장과 벽 어딘가를 향한 채 둥둥 떠다니고
있었고, 손목에는 피가 배어 나오다가 그대로 굳은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다.
게다가 사람을 만나는 것 자체가 꺼려지는지 나를 보고도 잔뜩 경계하는 눈초
리였다.
“누구세요?”
“안녕하세요. 백동준 검사라고 합니다. 고소하신 진화여고 학교폭력 사건 담
당하고 있습니다. 김선미 양 맞으시죠?”
“... 네. 그런데 검사님이면 뭐 하는 분이신가요? 혹시 조금 전에 왔다 가셨
던 변호사님처럼 처벌불원서인가? 그런 거 사인하라고 하실 거면 그냥 가세요.”
아이고, 골이야. 양경동한테 작업 들어간 거 보고 어느정도 예상은 했다만,
우지선의 어머니는 벌써 변호사를 선임해서 피해자인 김선미까지 압박하고 있
나 보다.
처벌불원서란, 피해자가 가해자의 형사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밝히
는 서류이다. 이게 있으면 처벌 수위가 낮아지기도 하고, 일부 범죄는 아예
기소가 불가능해지기도 한다.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인 건, 김선미가 우지현을 처벌해야겠다는 의지가 확고해
서 그 서류에 사인을 해 주지는 않았나 보다.
나는 그녀가 누워 있는 병상에 걸터앉으며 안심하라는 의미로 미소를 지어 보
였다.
“아뇨. 그 반대예요.”
“네?”
“검사는 김선미 양한테 나쁜 짓 한 가해자를 처벌하고, 추가 피해가 발생하지
않게 막는 사람이에요. 그 처벌불원서에 사인하셨으면 제가 곤란해질 뻔했는
데, 안 하신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스르륵-.
내 말에 김선미가 멍하게 부유하던 시선을 고정하고 몸을 반쯤 일으켜 앉았다.
“그럼 제 편이라는 말씀이시죠?”
“맞아요. 어떤 피해를 당하셨는지 상세히 알아보러 왔어요. 그래야 가해자를
더 잘 처벌할 수 있거든요.”
“아아, 감사합니다.”
이다음 김선미의 반응은 정말 의외였는데, 조금 전까지 보이던 경계의 눈초리
가 녹아내리더니 눈물을 글썽였다.
“많이 힘드셨나 봐요.”
“제 편이 아무도 없었거든요. 친구들이나 선생님이나, 심지어 저희 어머니도
빨리 합의해 주고 병원비라도 받으라고만 하셨어요. 제가 조각칼로 제 손목
이렇게 만들고 나서 저한테 잘했다고 해 주신 분 검사님이 처음이세요.”
“앞으로도 힘든 일 있으면 여기로 연락하세요.”
내가 내민 명함을 받아든 김선미가 후다닥 눈물을 훔쳐내며 나를 바라보았다.
“앞으로 말고요, 지금 제 얘기 좀 들어 주시면 안 돼요? 아까 가해자 처벌하
고, 추가 피해도 막는 분이라고 하셨잖아요. 제 생각엔 그 추가 피해를 제가
지금 당하고 있는 것 같아요.”
“가해자 쪽 변호사가 찾아온 거 말고 또 무슨 일이 있으셨어요?”
“... 네. 우지현이 저한테 협박하던 일을 실제로 벌이고 있어요.”
순간, 머릿속에 굉장히 안 좋은 예감이 스쳐 지나갔다. 우지현은 김선미의 반
나체 사진을 갖고 성매매를 강요했다.
그리고 김선미가 자신을 고소했다면, 그 사진들은 이제 성매매가 아니라 자신
의 처벌을 면하려는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고소장에 적으셨던 그 사진을 우지현이 정말로 유포했나요?”
“그냥 유포만 한 게 아니라 인터넷에서 문화상품권을 받고 팔고 있어요. 그리
고 제가 처벌불원서에 사인 안 하면 계속 이렇게 할 거라고 저한테 팔면서 한
채팅 기록을 자꾸 보내는데, 이거 어떻게 해야 돼요? 검사님이시니까, 제 편
이시라면서요. 못 하게 해 주실 수는 없어요?”
이 미친년이?
“가해자가 보냈다는 그 메시지 저도 볼 수 있을까요?”
“꼭 보여드려야 하나요?”
김선미가 왜 갑자기 한 발 빼는지는 금세 이해됐다. 그 메시지에 필시 자신의
나체 사진이 같이 들어가 있으리라.
“사진 말고, 내용만 조심해서 볼게요. 일단은 제가 봐야 막아드릴 수 있어요.”
잠시 후, 김선미는 굳은 결심을 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 핸드폰을 꺼내
나에게 내밀었다.
“... 알겠어요.”
그리고 그 내용은 방금 김선미가 말한 것 그대로였다. 심지어 내가 보고 있는
와중에 우지현의 메시지가 하나 더 도착했다.
- 거래 한 건 더 성공~! 자세한 건 아래 채팅 로그 참조. 네 덕분에 요즘 수
입 짭짤하다? 오늘도 우리 변호사님 빈손으로 돌려보냈다며? 계속 그렇게만
해라. 내가 가진 사진 10장 중에 아직 2장만 뿌리고 있는 거 기억하고. 너 이
러다 유명인사 되겠어.
나는 핸드폰을 돌려주며 참담한 심정에 고개를 가로저을 수밖에 없었다.
“잠시 나가서 통화 한 건만 하고 오겠습니다.”
정말 급한 일이었는데, 김선미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어디 가세요? 통화 여기서 하시면 안 돼요? 제가 들으면 안 되는 내용인가요?”
그러고 보니 아까 자기편 들어주는 사람이 나 하나라고 했으니 이렇게 불안해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네.
뭐, 지금 내가 할 통화가 피해자가 들어서는 안 될 내용은 전혀 아니다.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계셔 주셔서 감사해요.”
나는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 경찰에 전화를 걸었다.
- 네. 성해경찰서입니다.
“성해지청 백동준 검사입니다.”
- 네! 검사님.
“현행범 긴급체포할 일이 있어서 연락드렸습니다. 010-xxxx-xxxx 이 번호 위
치 추적하시고요, 현장에서 바로 체포하셔서 제 앞으로 송치해 주십시오. 죄
목은 성폭력 특례법 위반입니다. 급박한 사안이니 출동 서둘러 주십시오.”
- 네. 알겠습니다.
내가 경찰과의 통화를 마치자, 김선미가 동그래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방금 그 번호 우지현 거였잖아요. 긴급체포면, 우지현 이
제 감옥에 가는 거예요?”
“네. 맞습니다. 방금 저한테 메시지 보여주신 덕분에 긴급체포 가능해졌습니
다. 체포되고 나면 다시는 그런 짓 못 해요.”
“...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검사님.”
휴-.
이걸로 추가 피해는 막았는데, 계속 궁금하던 게 있었다.
“그런데 김미선 양, 가해자가 지금 그 사진들 팔고 있다는 사실 낮에 오셨다
는 변호사님한테도 말씀드렸나요?”
“아뇨. 그럴 수가 없었어요. 우지현이 자기 엄마나 변호사한테 말하면 파는
사진 종류 늘린다고 계속 협박해서요.”
어쩐지, 변호사든 부모든 알았으면 그짓을 그냥 둘 리는 없겠다 싶더라니.
나는 그 뒤로 김미선한테서 그간 있었던 피해에 대한 진술을 확보하고, 긴 설
득 끝에 그녀의 핸드폰을 증거로 넘겨받아 병원을 나왔다.
* * *
트릉-.
이제 검찰청으로 돌아가서 끌려온 우지현을 취조하면 되겠다고 생각하던 차였
다. 거치대에 꽂아 두었던 핸드폰이 울리며 전화가 걸려왔다.
“네. 백동준입니다.”
- 아, 네. 검사님. 성해 경찰서 박병호 경위입니다. 조금 전에 요청하셨던 긴
급 출동은 완료했는데, 체포에 애로 사항이 있어서 다시 연락 드렸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순간 우지현을 놓친 건가 싶어 가슴이 철렁했는데, 다행히 그런 건 아니더라.
- 그게 말입니다, 출동해 보니까 얘가 엄마랑 변호사까지 끼고 긴급체포 근거
를 대라고 도리어 저희를 윽박지르는데 저희가 검사님한테 말씀 들은 거 외에
는 알고 있는 게 없어서요. 변호사 껴 있으면 저희가 강제 연행하기도 영 찝
찝해서 전화 드렸습니다.
그 변호사님 낮에는 김선미 윽박질렀다가 밤에는 우지현 방패막이 됐다가 아
주 열일 하신다. 그래 봤자 아무런 보람은 없겠지만.
“제가 현장으로 가겠습니다. 문자로 주소 찍어 주십시오.”
- 네! 감사합니다. 검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