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초임이 부장을 잡다 (1)
온몸을 흠뻑 적셨던 땀이 식는 동안 다시 주어진 기회를 받아들이고 앞으로의
삶을 기획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막 깼을 때는 새벽 4시가 조금 넘었을 때였는데, 어느새 핸드폰 우상단에
6:00이라는 숫자가 찍혀 있었다. 무려 두 시간이나 이렇게 멍하게 앉아 있었
던 셈이다.
이전 삶의 모든 기억을 갖고 15년 전으로 돌아온다는 게 절대로 흔히 있는 일
은 아니니까, 이 정도면 오히려 빨리 적응한 건지도 모르겠다.
내 정신이 이제는 이 몸을 완전히 받아들인 건지, 슬슬 생리적 반응도 느껴졌
다. 방금 화장실에 갔다 왔고, 너무 배고파서 컵라면에 물을 부어놓고 익기를
기다리는 중이다.
* * *
지이이잉, 징징징-.
그때, 진동으로 설정해 둔 핸드폰이 울리며 전화가 걸려왔다. 화면에 찍힌 발
신인을 보니 ‘양경동 부장’이었다.
오랫동안 기억에 묻어두고 살았던 추억의 이름이었는데, 초년 검사로 돌아왔
으니 이제 이 악덕 상사와의 인연도 다시 내 현실이 되었구나.
이미 검찰청 경력 15년이 내 머릿속에 들어있다는 걸 최대한 티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최대한 공손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네. 부장님. 백동준입니다.”
- 야! 백동준, 너 왜 이제야 전화 받아?
휴-.
가는 말이 고우면 오는 말도 곱다는 속담이 당최 적용이 안 되네. 내 기억 속
에 저장된 이 인간의 인격과 100% 일치한다.
검사가 꼭 완벽한 인격을 갖춘 성인군자일 필요까지는 없었으나, 양경동 부장
은 저것 때문에 나중에 사고를 크게 친다.
자기가 맡은 사건에서 피의자한테 뇌물을 받고 기소유예를 내려 준 게 여러
건 발각되어 결국 법복을 벗게 된다.
기소유예란, 죄는 있으나 심각하지는 않다고 검사가 자체적으로 판단하여 재
판에 회부하지 않는 처분이다.
재판까지 가지 않으니 유죄 선고가 확정되지 않을 때까지는 무죄로 간주한다
는 무죄추정의 원칙에 따라 피의자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는다.
어찌 보면 수사권과 더불어 검사가 갖는 가장 강력한 권력 중 하나라고 볼 수
있기에, 정말 신중하게 사용해야 한다.
양경동은 그런 권한을 남용하여 있는 중죄를 자기 멋대로 사하여 준 쓰레기
검사라고 할 수 있겠다.
그래도 어쩌랴? 지금은 하늘 같은 상사인데 묻는 말에 대답은 해 드려야지.
“죄송합니다. 부장님. 제가 잠을 오래 잤습니다.”
- 뭐? 평일에 출근도 안 하고 어제 하루 내내 잤다고?
어쩐지 아까 핸드폰으로 달력 어플을 확인하기 전에 검찰청 사람들이 걸어온
부재중 전화가 잔뜩 찍혀 있더라니.
15년 전의 내 몸이 미래에서 회귀한 정신을 받아들이느라 상당히 오래 기절한
채로 있었나 보다.
“오늘은 정상 출근하겠습니다.”
- 야, 너 검사 됐다고 눈에 보이는 게 없어? 이 검찰청에서 사시 패스한 사람
이 너 하나인 줄 알아? 선배이자 부장으로서 충고하는데, 초년부터 그따구로
행동하면 너 검찰청 밥 오래 못 먹어.
끄응-.
내가 출근을 하루 거르는 바람에 민폐를 끼친 건 알겠다. 그렇다고 사정 따위
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저렇게 막말해 대는 게 무슨 도움이 된단 말인가?
그리고, 선배로서 충고? 어이가 없다. 지금이 15년 전이니까 양경동의 기수를
따져 계산해 보면 올해 12년 차다.
이미 15년을 검사로 살아온 경험이 있는 내가 이야기하건대, 후배 검사들한테
저렇게 꼽부터 주고 보는 거 절대 좋은 상사의 태도가 아니다.
“이따가 정시 출근해서 찾아뵙고 다시 한번 정식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끓어오르는 화를 꾹 눌러 참고 기껏 상사 대접을 해 줬건만, 양경동의 성깔은
좀처럼 누그러들지 않았다.
- 출근하자마자 내 방으로 당장 튀어와. 너 무단결근 말고도, 내가 기소유예
처분하라고 한 사건 왜 아직도 들고 있는지 똑바로 얘기해야 할 거야.
하아, 그러니까 이렇게 새벽같이 전화한 게, 후배 검사한테 무슨 일 생겼는지
걱정돼서가 절대 아니었구나?
이 인간은 그저 나한테 배당된 사건 중에 자기 멋대로 처리하고 싶은 게 하나
있었는데, 그게 늦어지니 나를 닦달할 생각밖에 없었나 보다.
“네.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뚝-.
자기 할 말을 다 했으니 됐다는 듯 양경동은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어휴, 결
국 별 의미 없는 싫은 소리만 잔뜩 들었네.
이 쓸데없는 통화를 하느라 물을 부어놓은 컵라면도 잔뜩 불어서 못 먹을 지
경이 되어 버렸다.
그나저나, 이 컵라면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방금 양경동 부장이 말한 사건이
다. 대체 이 사건에 어떻게 무죄와 거의 똑같은 기소유예 처분을 내린단 말인가?
15년이라는 내 기억 속의 안개를 헤치고 들어가자, 사건 개요가 똑똑이 떠올
랐다. 너무 파렴치해서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으니까.
이 사건의 가해자는 흔히 강력범죄자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와는 너
무 다르게 여고생이었다.
내가 회귀한 이 시점에 일선 학교에 뿌리 깊게 박혀 있던 일진 문화를 생각해
보면 이해가 조금 더 빠를지도 모르겠다. 피의자 우지현이 그 일진의 전형이
었으니까.
검찰청에 이 사건이 들어오게 된 건 피해자가 체육 시간에 빈 교실에서 조각
칼로 자신의 손목을 긋는 자살 시도를 하면서였다.
다행히 깊게 찌르지는 않았기에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신고를 받고 출동
한 경찰에 의해 구조된 뒤 바로 검찰청에 고소장이 접수되었다.
그 내용은, 가해자 우지현에 의해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지속적인 폭행과 금
품 갈취에 시달렸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끝났으면 검찰이 아니라 교무실에서 처리될 수도 있는 사건이었겠으
나, 우지현은 여기에서 한참 더 선을 넘고 말았다.
체육복을 갈아입는 틈을 이용해 같은 여고생인 피해자의 속옷 차림 사진을 촬
영하고,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그걸 유포하겠다고 협박을 일삼았다.
고소장에 적혀 있는 바에 따르면 그 협박 내용도 엄청났는데, 성매매를 하고
그 수익금을 자신에게 상납하라는 것이었다.
도대체 같은 여자끼리, 그것도 한 공간에서 공부하는 급우끼리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인간으로서 이해가 안 되는 행태였다.
그런 와중에, 어려서 치밀하게 범행을 계획하지는 못했는지 그 협박을 기록이
뚜렷이 남는 문자 메시지로도 반복하여 그 증거까지 내 손에 들어와 있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이 피해자가 고소장에 적은 것 외에 더 당한 일은 없는지,
또 다른 피해자가 있지는 않은지 수사하여 우지현을 법정에 세우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양경동 부장은 이 우지현에게 아무 죄도 묻지 말고 멀쩡하게 학
교를 다니게 내버려 두라고 하고 있다.
내 지난 생에는 도저히 그럴 수는 없다고 대들다가 결국 사건이 다른 검사에
게로 재배당되고 우지현은 끝내 양경동의 뜻대로 기소유예 처분을 받는다.
이걸 바로잡을 기회가 생겼는데 또 다시 같은 일이 반복되게 둘 수는 없다.
양경동 부장을 꺾어서라도 우지현은 내가 재판정에 세워서 감옥에 넣고 말리라.
* * *
도저히 못 먹게 된 컵라면 대신 사다 놓은 과자로 아침 식사를 해결한 나는
지금 양경동의 부장검사실에 들어와 있다.
“무단결근하는 간 큰 초임 검사님 오셨습니까?”
이미 죄송하다고 사과했는데도 계속 저런 식으로 비꼬면 대체 나더러 어쩌란
말인가?
“죄송합니다. 경위서 제출하고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 없게 하겠습니다.”
“그래? 그 경위서 얼마나 명문장으로 적어오나 한 번 보지. 그건 그렇고, 진
화여고 학교폭력 사건 왜 아직도 기소유예 처분 안 했는지 똑바로 설명해 봐.”
“기소유예 처분을 내리면 통지서에 뭐라고 써야 할지 도저히 알 수가 없습니다.”
“뭐? 처분 통지서 하나 못 쓰면, 그러고도 네가 검사야?”
또, 또 와다다다 쏘아붙여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 대화를 끌고 가려고 한다.
이런 사람들한테는 아주 차분하게 대꾸해 주는 게 잘 먹히더라.
“합당한 처분을 내릴 때는 그에 맞는 처분 통지서 얼마든지 잘 쓸 수 있습니
다만, 부당한 처분에 따른 통지서를 쓰는 방법은 배우지 못했습니다.”
“지금 하고 싶은 말이, 내가 판단한 기소유예 처분이 부당하다는 거야? 백동
준 검사, 대답 똑바로 해.”
“네.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폭행과 금품 갈취, 성매매 강요 및 협박까지 있
었습니다. 이게 처벌하지 않고 넘어갈 만큼 가벼운 죄라는 판단에 저는 동의
할 수 없습니다.”
벌떡-.
내 굳은 결의를 꺾어 보겠다는 듯, 양경동 부장이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나에
게 서류 뭉치를 척 내밀었다.
“이봐, 폭행이야 아이들끼리 지내는 학교에서 작게는 늘 있는 거고, 금품 갈
취는 증거도 없잖아? 성매매는 실제로 이루어지지도 않았어. 그리고 이거 가
서 또박또박 정독해.”
“이건 뭡니까?”
“지금 백동준 검사 네가 가해자로 지목하고 있는 우지현 학생 반 담임 선생님
이랑 그 반 친구들이 쓴 탄원서야. 우지현 학생이 얼마나 우수한 성적으로 성
실하게 학교생활을 했는지, 그 피해자라는 애가 평소에 얼마나 지각, 결석이
많고 게을렀는지 다 적혀 있다고.”
와, 이 인간도 나름 사시 패스해서 이 자리에 있을 텐데 내가 이렇게 기초적
인 법을 설명해 줘야 하나?
“방금 하신 말씀에 지적 드릴 사안이 많네요. 먼저, 성매매가 실제로 이루어
지지 않았어도 성폭력 특례법 제14조에 따라 수치심을 일으킬 수 있는 사진으
로 협박했으니 가해자는 유죄입니다.”
“이게 어디서?”
“아직 제 말 안 끝났습니다. 가해자의 학교 성적과 유죄 여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피해자가 지각과 결석을 많이 했다고요? 그렇게 심한 괴롭힘을 당
하는데 너무 당연한 결과 아닐까요? 저는 이 사건 기소할 겁니다.”
탁-.
탄원서 뭉치를 도로 책상에 내려놓은 양경동이 나에게 다가와 똑바로 눈을 맞
췄다.
“야, 백동준 기소유예 하라고.”
“피해자와의 합의도 없잖습니까? 어느모로 보더라도 기소유예할 명분이 없습
니다.”
“까라면 까!”
와, 법적으로 명백하게 중죄를 물어야 할 사안인데 대체 왜 저러는지 모르겠
다. 저 썩음썩음한 마음에 들어가 보고 싶을 지경이다.
그때 내 귀에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백동준 이 새끼, 말 뒤지게 안 듣네. 이러다가 우지현이 엄마가 주고 간
(......) 토해내야 하는 거 아닌가 (......)? 합의는 일단 기소유예 나오면
어차피 자기 딸은 감옥 안 간다고 피해자 얼러서 돈 (......) 쥐어주고 끝낸
댔는데.]
마치 전파 수신이 잘 안 되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말처럼 군데군데 잘려있
긴 했어도, 못 알아들을 리 없는 양경동의 평소 싸가지 없는 말투였다.
그 내용 역시 지금 양경동이 사고 있는 생각이라고 했을 때 너무 상황에 딱
맞아 떨어졌다. 하지만 그는 입을 굳건히 닫고서 나를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게 뭘까? 설마 회귀하면서 다른 사람의 생각을 들을 수 있는 능력이 생긴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