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 검사는 재벌을 사냥한다-1화 (1/51)

1화. 사망, 그리고 기회

이름은 백동준. 직업은 검사다. 내가 15년 전 검찰청에 처음 들어올 때부터

노렸던 목표물이 있었다.

한국 재계를 양분하고 있는 HL 그룹, 그중에서도 유력한 차기 회장 후보로 꼽

히는 현임 총수의 둘째 아들 허민회다.

별 볼 일 없던 초임 검사 시절부터 부장검사가 된 지금까지 허민회 그 자식을

잡으려고 HL 그룹의 비리와 관련된 온갖 자료를 모아왔다.

그리고 요즘 드디어 내 노력이 결실을 맺고 있다. 지금까지 포착된 정황에 따

르면 허민회는 50억 원 규모의 대형 비자금을 조성했다.

그 방법도 야비하기 이를 데 없었다. HL 그룹 명의로 대출을 받은 뒤 회계 장

부상에는 그 돈을 사내 유보금으로 처리해 두고 실제로는 자신이 꿀꺽했다.

회사 자금을 자신이 털어먹는 엄연한 횡령 행위이고, 이 정도 액수면 특정경

제범죄법에 따라 최소 징역 5년이 나오게 된다.

엄청난 중죄이니, 범죄 혐의만 확실히 입증되면 재판까지 가기도 전에 구속영

장을 받아 내어 감옥에 처넣는 것도 가능하다.

후훗-.

일단 감옥에 넣고 구속 수사에 들어가면 내가 캐낼 수 있는 허민회의 범죄는

비단 이것 하나뿐만이 아니다.

그간 모은 자료를 바탕으로 그의 영향력이 배제된 HL 그룹을 탈탈 털어 영원

히 사회의 빛을 못 보게 만들어 줄 자신이 있다.

그리고 그 끝은 내가 검사가 되겠다고 결심하게 만든 ‘그 사건’의 진상을 만

천하에 까발리는 것이 되리라.

이 아름다운 미래를 위해 지금 나는 허민회의 비자금 조성을 위해 불법 대출

을 강행하고 회계 장부를 조작한 HL 그룹의 재무이사, 조봉석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나를 비롯한 검찰이 특별 수사팀까지 꾸려 법망을 좁혀가자 그대로 잠적했던

자인데, 어쩐 일인지 조금 전 나한테 먼저 메시지를 보내 왔다.

- 백동준 검사님 번호 맞습니까?

- 네.

- 저를 찾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조봉석이라고 합니다.

와, 그 문자를 보는데 소름이 쫙 돋더라. 이번 허민회의 불법 비자금 조성 사

건의 가장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는 자가 담당 수사팀장인 나한테 먼저 연락

을 해 오다니.

뚜릉, 뚜르릉-.

나는 메시지와 같이 찍혀 있는 번호로 전화를 걸었고, 일전에 다른 사건 때문

에 만난 적이 있는 조봉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여보세요.

이 쇠 긁는 목소리는 다른 사람일 수가 없었다. 사칭이 아닌 게 명확해졌으니

내 그물 안에 자기 지느러미로 헤엄쳐 들어온 물고기를 건져 올리기만 하면

됐다.

“백동준 검사입니다. 뵙고 말씀 나누었으면 하는데, 지금 어디십니까?”

- 수배 중인 용의자가 검사님한테 어떻게 함부로 제 위치를 말씀드리겠습니

까? 뵙는 건 저도 괜찮은데 그 전에 먼저 수배 해제해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오호라, 조봉석이 나한테 직접 연락해서 얻어내고자 하는 게 뭔지 단번에 알

아차릴 수 있는 대목이었다.

“지명수배는 검찰청으로 와 주시면 자동으로 해제됩니다.”

- 그런 원론적인 이야기 하실 거면 이만 끊겠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저도 철회할 명분이 있어야죠. 예를 들면, 조봉석 씨를 통해

서 찾으려고 했던 증거가 다른 경로로 확보되었다든지요.”

- 휴. 알겠습니다. 제가 허민회 부회장 죄 덮어 준다고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

겠습니까? 증거 넘겨 드릴 테니, 수배 해제해 주십시오.

제법 말이 통하는 인물이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 필요하신 게 HL 그룹이 산화저축은행에서 대출받을 때 쓴 이면합의서랑, 분

식 회계 들어가기 전 장부 원본 맞습니까? 둘 다 제가 파일로 갖고 있습니다.

“그럼 제 이메일 주소 알려드릴 테니 온라인으로 전송해 주시겠습니까?”

- 큰일 날 말씀을요. 그 중요한 자료가 중간에 해킹이라도 당하면 저나 검사

님이나 피차 곤란해지지 않겠습니까? 우편도 마찬가지로 배달 사고 날 수 있

고요.

“그럼 어떻게 주시겠습니까?”

핸드폰 너머의 조봉석이 이게 본론이라는 듯 침까지 한 번 삼키고 나서야 대

답을 이었다.

- 제가 직접 USB에 담아서 전달 드리죠. 전화 끊는 대로 문자로 주소 하나 찍

어 드릴 테니까 오늘 밤 11시에 거기로 나오십시오.

“좋습니다. 자료 확인해 보고 이상 없으면 내일 중으로 지명수배 철회해 드리

겠습니다.”

- 그리고 수사관이나 경찰 대동하지 마시고 꼭 혼자 나오시기 바랍니다. 만약

에 오늘 밤에 저 체포하려고 하시면 자료는 영원히 삭제될 겁니다.

애초에 체포 안 당하려고 자료를 넘기는 것이니 어찌 생각해 보면 당연한 요

구였다.

“알겠습니다. 이따 밤에 뵙죠.”

그렇게 통화를 끊고 나니 조봉석은 약속대로 주소가 적힌 메시지를 보내 왔

다. 얼른 검색해 보니 서울 외곽에 있는 한 유흥주점이었다.

* * *

그곳에 도착해 홀복을 입고 마중 나온 여주인에게 내 이름을 밝히자 기다렸다

는 듯 나를 아주 깊숙한 곳에 있는 방으로 안내했다.

안에는 이미 술상이 차려져 있었고, 한쪽 구석에 뭔가 불편한 것처럼 팔짱을

끼고 인상을 찌푸린 조봉석이 앉아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혼자 오신 거 맞으시겠죠?”

삐뚜름한 조봉석의 인사였지만, 어디까지나 이 자리에서 내가 집중해야 할 건

받기로 한 증거이니 별 트집 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네. 이렇게 거창하게 준비해 놓으실 것까지는 없었는데요.”

“제가 마시고 싶어서 차려 달라고 했습니다. 검사님 덕분에 도망 다니다 보니

이런 여유 가질 기회가 있어야지 말입니다. 오늘은 체포 안 하시겠다고 약속

하셨으니, 큰 거래인데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앉아서 한 잔 나누시죠.”

“그렇게 하시죠.”

조봉석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조금 전 나를 안내했던 주점 주인이 다시 들

어와 내 몫의 잔을 탁자에 놓고 돌아갔다.

쪼로록-.

조봉석의 맞은편 자리에 앉은 나는 그가 따라 준 술을 받았고, 이미 한 번 비

워진 그의 잔 역시 채워 주었다.

이때 까지만 해도 이 술 마시고 조봉석에게 USB 저장장치를 받아서 검찰청으

로 돌아가면 모든 게 완벽하게 끝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잔을 비우고 채 10초가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갑자기 눈앞이 빙그르

르 돌더니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의 어지러움이 몰려왔다.

눈앞에 있는 조봉석의 얼굴에 자글자글하게 낀 주름이 돌돌 말려 둥글둥글하

게 보일 지경이었다.

당연히 전체 얼굴 형상도 도깨비마냥 일그러져 보였는데, 그 틈으로 조봉석이

이제야 안심이라는 듯 팔짱을 풀고 웃음 짓는 게 보였다.

“술맛이 어떠십니까?”

턱-.

앉아 있는데도 몸을 가누기가 힘들어 테이블 모서리를 잡고서야 겨우 고개를

들고 있을 수 있더라.

“술에 뭘 타신 겁니까?”

내 물음에 조봉석이 자신의 술잔을 내 눈앞에 가져다 대고 흔들어 보였다.

“술은 멀쩡했습니다. 뭘 탔으면 제가 이렇게 깔끔하게 비웠겠습니까?”

맞다. 나도 이런 상황을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조봉석이 먼저 마시는 걸

확인한 뒤에야 잔에 내 입을 댔으니까.

“그럼 대체...!”

“곧 돌아가실 분이 궁금한 건 많으신가 봅니다? 죽을 사람이시니 못 가르쳐

드릴 것도 없죠. 술이 아니라 검사님 잔 바닥에 수면제가 발라져 있었거든요.”

하아, 그래서 아까 술집 주인이 내 잔을 따로 챙겨온 거였어? 무조건 혼자 오

라고 한 건 이딴 짓을 해 놓고 나를 도와줄 사람이 없게 만들려고 그런 거였고?

나는 어떻게든 이곳에서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문을 바라보았다. 그때 문

이 벌컥 열리더니 아주 거만한 얼굴의 한 남자가 들어왔다.

내가 너무나 잘 아는 얼굴이었다. 현임 HL 그룹 부회장이자, 가장 유력한 차

기 회장 후보. 그리고 내 최종 목표물.

“허민회!”

그가 거친 구두굽 소리를 내며 나에게 다가오더니 턱을 콱 틀어쥐었다.

“백동준 검사님. 그러게 적당히 나대셨어야지. 지금 졸려 죽을 것 같죠? 푹

주무세요. 영원히.”

그러더니 내 어깨를 밀었고, 목 하나 가눌 힘이 없던 나는 그대로 소파에 나

뒹굴고 말았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불가항력적으로 눈이 감겼다.

필사적으로 잠들지 말아야 한다는 다짐으로 나머지 감각을 억지로 부여잡고

있는데, 내 팔뚝에 바늘이 꽂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아직 잠들지 않은 청각을 통해 조봉석의 쇠 긁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검사님, 이건 모르핀입니다. 잘 아시듯이 법정 마약이고요, 치사량 투여할

겁니다, 그런 다음에는 이 주사기에는 검사님 지문도 방향 맞춰서 잘 찍어 놓

겠습니다. 수사 전문가이시니 이게 어떤 결과로 나타날지는 잘 아시겠죠?”

멀쩡하게 일하던 현직 검사가 죽었으니 부검이 이루어질 것이고, 그럼 내 혈

액에서는 모르핀이 검출되겠지.

주사기에 내 지문까지 찍혀 있으면 너무 당연하게 내가 스스로 말뚝에 마약을

찔러 넣다가 양을 잘못 맞춰 얼떨결에 자살했다는 쪽팔려 뒤질 것 같은 결론

이 나오게 된다.

이 새끼들은 지금 나를 죽이는 것으로도 모자라 죽은 뒤에도 약쟁이 검사로

만들어 부관참시까지 할 생각이다.

이렇게 나를 악마로 만들어서 내가 하던 HL 그룹의 불법 비자금 수사를 뭉개

고 넘어갈 구실을 만들 속셈인 게 너무 뻔히 보였다.

어떻게든 그런 상황만은 만들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정신을 붙들어 보았지

만, 수면제에 마약까지 이어진 효과는 강력했다.

마치 낙하산도 없이 비행기에서 뛰어내린 것처럼 내 의식은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로 꺼져갔다.

* * *

“안 돼!”

그 뒤로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온몸이 땀에 푹 젖은 채로 비명을 지

르며 일어났다.

허민회를 잡을 핵심 증거를 주겠다는 조봉석의 꾐에 넘어가서 강제로 마약을

투여받고 미친 듯한 잠에 빠져들었던 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다시 깨어난 걸 보니 치사량의 모르핀을 투여해서 나를 죽이겠다는 그들의 계

획이 실패로 돌아간 걸까?

후, 하, 후, 하-.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눈을 깜박여 보니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어? 내

가 왜 여기에 와 있지?

상식적으로 그런 사고를 당했으니 병원에서 깨어났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내

가 있는 곳은 15년 전 초임 검사 시절에 살던 검찰청 근처의 오피스텔이었다.

눈을 몇 번 더 깜박여 보니 침대 옆 테이블에 놓여 있는 핸드폰이 보였다. 심

지어 이것도 내가 15년 전에 쓰던 아주 오래된 기종이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에 허겁지겁 핸드폰 화면을 켜 달력

어플을 열어 보니, 정말 15년 전의 연도가 찍혀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나는 허민회와 조봉석이 저지른 살인 범죄에서 살아난 게 아니

라, 15년 전으로 회귀한 거라고?

맙소사.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처음에는 너무 막막했다. 그 힘든 초년

검사 생활을 다시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는 가슴이 답답해지더라.

그러다가, 이건 저주가 아니라 엄청난 축복이라는 걸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5년 전으로 돌아온 건 내 몸이지 정신이 아니었다. 이 말은, 지금 내 머릿속

에 앞으로 15년간 일어날 일이 몽땅 다 들어있다는 뜻이 된다.

또한, 지난 생에서 철저하게 실패했던 HL 그룹과 허민회의 수사를 엄청난 미

래 지식과 함께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렇게 된 이상, 허민회 그 망나니 하나 잡아넣는 것으로는 성에 안 찬다. HL

그룹을 통째로 내가 먹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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