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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97화 (97/97)

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97

5. Epilogue

“그러니까, 공주님은 하나도 다치지 않으셨고, 그렇게 일사천리로 사건이 흘러갔다고요?”

에이솔과 아레인이 미심쩍은 얼굴로 그날 일을 캐물었다. 카샤는 테이블에 턱을 괴고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우리는 지금 신성제국의 대성전에 머물고 있었다. 여기가 어딘지 깨닫자마자 곧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지만.

“그럼요, 보다시피 내가 어디 다친 곳이 있어요? 여러분이 쓰러지고 바로 가고일이 나타났어요. 근처에 가고일이 나타난 게 마음에 들지 않는지 세계수 안에 있던 에티오가 화내면서 치고받고 싸우더니 진짜 신 크리하엘이 내려와서 다 상황정리를 했다니까요.”

그들이 믿지 못해서 나는 앵무새처럼 여러 번 반복해서 말해주었다. 계속된 질문으로 빈틈을 파고들까 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내가 다쳤었다는 걸 알면 카샤가 얼마나 화를 낼지는….

“그럼, 공주님은….”

“그만하지. 이 이상은 말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데.”

내가 에이솔의 넘치는 호기심을 채워주지 못하자 카샤가 손짓하며 말을 끊었다.

“말할 생각이 없는 게 아니라 정말 그게 다예요.”

“그런데 왜 자꾸 내 눈치를 보지?”

“제가 언제요?”

그는 아무래도 좋은 듯 환하게 웃으며 내 뺨을 커다란 손으로 감쌌다.

“그래서, 마지막은 내가 보고 싶다고 크리하엘에게 떼를 썼다고 했었지, 아마?”

그는 이 사건의 마지막 이야기를 가장 좋아했다. 떼를 쓴 게 아니라 카샤의 눈을 확인하고 싶다고 한 거지만, 그가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좋다면 뭐 어떤가 싶어 말을 말았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내가 다친 사실만 모르면 되니까.

그는 크리하엘로에서 발표한 신탁을 듣고 아예 군대를 준비하고 있었고, 선발대를 꾸려 먼저 신성제국으로 향하는 중이었다고 한다. 그 와중에 크리하엘에 의해 혼자 이곳으로 순간 이동한 셈이니. 지금 선발대는 한창 이쪽으로 오고 있었고 그들이 도착하면 우리는 다시 제국으로 떠나게 될 것이다.

그가 제국에서 준비하고 있던 군대는 취소되었다. 나에 대한 신탁은 잘못 해석되었다는 결론이 났기 때문이다. 크리하엘이 신의 뜻을 잘못 해석했다고 크게 노하며 다시는 신탁을 내리는 일이 없을 것이라 했다고 한다. 덕분에 지금 신성제국은 비상이었다.

그들이 신탁으로 얻는 권력이 상당했으니, 한동안 그것을 추스르려면 외부로 눈을 돌릴 여유는 없을 것이다.

제국으로 돌아가던 라이올라도 다시 신성제국으로 왔다. 다시 추천장을 내밀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오히려 잘못된 신탁으로 제국에 손해를 끼칠 뻔하였으니, 그들에게는 추천장이 아니라 명령장이나 다름없었다. 지금쯤 라이가 다음 대의 교황 후보인 유리온을 만날 준비를 할 테니 거기 한 번 가볼까.

“이제 다 됐죠?”

“어딜 가지?”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가 내 손을 붙들었다. 여기 온 뒤 그는 내가 잠시라도 곁을 비우려는 낌새만 보이면 지금처럼 정색하며 어디에도 못 가게 했다.

“곧 교황 성하 오실 때가 다 돼가는걸요. 저는 라이한테 가 있을게요.”

제국에 손해를 끼친 배상 문제로 두 국가 원수가 만나는 자리였으니, 그가 저렇게 못마땅한 얼굴을 해도 별수 있을 리가. 그에게 힘내라고 귓속말을 해주었다.

“많이 벌어오세요. 여보.”

그 신탁 때문에 느꼈던 내 심적 부담감까지 팍팍 뜯어내라고 한 얘기였는데 어쩐지 카샤의 얼굴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아니, 왜….”

새삼스럽게 볼이 붉어지는 거냐고 물으려다 입을 다물고 얼른 밖으로 나갔다. 반응이 저러니 말한 내가 더 민망하고 쑥스러워져서 그 자리에 있을 수가 없었다. 밖으로 나와 따라붙은 시녀에게, 라이가 있는 곳을 안내받은 나는 가면서 덩달아 열 오른 얼굴을 식히기로 했다.

* * *

“무슨 일이에요. 샬리? 혼자 못 돌아다니는 거 아니었어요?”

라이는 한창 예쁘게 단장 중이었다.

“오늘 배상 문제가 있는 날이잖아요. 라이의 결혼 문제도 논의하겠죠.”

“아하, 그래서 나 구경하러 왔어요?”

“아니, 뭐….”

그 말이 맞긴 하지만, 둘이 어떤지 궁금한 건 사실이다. 그녀가 단장하는 걸 지켜보며 자리에 앉자, 곧 시녀가 다과를 내어왔다. 한 입 깨문 쿠키는 황궁보다 맛이 못했다.

“유리온 전하는 어떤 성격이에요?”

약혼식에서 잠깐 보았을 때는 정말 단정하고 경건한 신부님처럼 보였었다.

“굉장히 점잖으시고 배려심이 넘치시죠. 제 뜻도 존중해 주시구요.”

조곤조곤 말하는 어투와 달리 라이의 얼굴은 들뜬 기색이 역력했다.

“여기 도착하고서 몇 번이나 만났어요?”

“음, 다섯 번이요?”

도착한 지 사흘인데 그동안 다섯 번, 그럼 지금 또 만날 테니 총 여섯 번? 둘이 못 만나서 안달인가 본데. 내가 말없이 싱긋 웃자 거울 너머로 나를 보던 라이올라가 드물게 얼굴을 붉혔다. 오늘 내 앞에서 얼굴 붉히는 사람들이 많네.

“샬리는 계속 폐하 옆에 있어서 몰랐겠지만, 지금 포르토의 레이시즈 왕세자도 여기 와있어요.”

테일러 오빠랑 티격태격하던 레이 왕세자?

“레이가 여길 왜 방문했죠? 아, 설마….”

“그 설마가 맞을걸요. 신탁을 듣고 샬리를 노린 거죠. 이제 헛물켜고 돌아가겠지만.”

“정말 전쟁 날 뻔했네.”

진짜 일어날 수도 있었던 상황이라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사람이 나를 귀찮게 한답니다. 샬리를 한 번만 더 보고 싶은데 폐하 때문에 얼굴 한번 보기 힘들다구요. 여기 온 걸 생각하면 그 답은 뻔한데 폐하께서 샬리를 만나게 해줄 리가 없잖아요.”

말은 안 해도 나를 데려가려고 신성제국으로 왔을 가능성이 컸다. 아니라면, 시기상으로 참 억울하긴 할 것이다. 노크 소리가 들리고 시녀가 유리온이 온 것을 알렸다.

“난 이만 가볼게요. 불청객이 되면 안 되니까요.”

사실 궁금해서 쳐들어오긴 했는데 말을 들어보니 방해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문을 열고 나가자 약혼식 이후로 오랜만에 보는 인물이 서 있었다. 내가 여기 머무른 지 삼 일째인 걸 생각하면 진작에 인사 한번은 나누고도 남았을 텐데, 그것도 아닌 라이와 데이트하려는 타이밍에 얼굴을 마주하니 어색하긴 하다.

“라이…. 아, 샬리오니 공주님이시군요.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제가 두 분의 시간을 방해한 것인지….”

저 눈에 띄게 실망한 표정이라니, 라이가 아니라서 미안하네요.

“오랜만이에요. 유리온 전하. 저는 방해할 생각이 없답니다.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당황한 유리온의 얼굴을 즐겁게 감상하다가 마저 인사하고 나왔다. 라이의 방에서 꽤 시간을 보냈다 해도, 다시 방으로 돌아가기엔 모처럼 얻은 자유시간이 아까웠다.

“샬리, 방으로 돌아가시겠습니까?”

“아니요, 아레인. 대성전 좀 구경하고 싶어요. 여기까지 와서 대성전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고 돌아가기엔 아깝잖아요.”

나는 그의 대답도 듣지 않고 성큼성큼 앞을 향하다가 다시 멈춰 섰다.

“아레인, 나가는 길이 어디예요? 대성전 외관부터 천천히 보고 싶은데….”

“안타깝지만 방으로 돌아가는 게 어떨까. 곧 제국으로 출발할거야. 샬리.”

카샤가 언제 왔는지 내 뒤에서 허리를 끌어안고 말했다.

“벌써 끝났어요?”

“길게 말할 필요 뭐 있나. 선발대가 도착했으니 이제 돌아가도록 하지.”

대성전이 아름답다고 유명하던데 제대로 감상하지 못하고 바로 돌아가야 한다니. 내가 실망하자 그가 나를 돌려세우고 내 귓가에 속삭였다.

“당신 말대로 많이 벌어왔으니, 그대가 보고싶어 하는 대성전, 제국에 똑같이 지어줄게.”

* * *

“안아줄까?”

제국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나도 모르게 졸았는지 앞으로 떨어지는 내 이마를 카샤가 받치며 물었다.

“네.”

하품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내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어깨에 기대려는데 그가 나를 살짝 들어 올려 제 무릎 위에 앉혔다.

“이 자세 불편한데요?”

당신 허벅지 너무 딱딱해서 쿠션감이 하나도 없다고.

“어째서?”

그의 불만 어린 얼굴을 보고 있는데 어디선가 ‘쩌적’ 하며 깨지는 소리가 났다.

“방금 들었어요?”

“샬리, 그대 가방 안에서 나는 소리 같은데.”

설마! 나는 순식간에 그의 무릎에서 내려와 배낭을 뒤졌다. 그리고 알 두 개를 조심스레 꺼내자 하나가 이미 금이 크게 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알이…. 안에서 알을 깨고 지금 나오려는 모양이에요.”

알들을 자리 위에 올려두고 두근반세근반하며 지켜보았다. 가고일의 알은 까맣게 잊고 있다가 짐을 챙기다 생각나서 배낭을 챙겼는데 느닷없이 지금 알이 깨지다니.

“흐음, 이걸 길들일 수 있나…?”

카샤도 관심 있는지 알을 지켜보았다. 그러다 금이 간 후로 영 진전이 없으니 금방 흥미를 잃었다.

“샬리, 그만하고 이리와. 재워줄게.”

이미 잠은 한참 전에 다 깼는데.

“이거 볼래요. 이제 잠 안 오는걸요.”

“그럼, 이번에는 그대가 날 재워주는 게 어떨까.”

내가 돌아보자 그가 서늘한 얼굴로 알을 노려보았다.

“잠 와요?”

“그래.”

전혀 잠 오는 얼굴이 아닌데. 할 수 없이 그의 옆으로 가려는데 다시 쩌적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양쪽 다에서 소리가 났다. 다른 알도 금이 가고 있었다.

“카샤, 지금 알이 나오려고 하는데 조금만 기다려요.”

먼젓번의 알이 한 번 더 금이 가더니 점점 톡톡 소리를 내며 알이 깨지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툭 소리를 내며 알의 지붕이 떨어져 나가자 그 위로 새끼 가고일이 고개를 쭉 내밀었다. 뭐든 새끼들은 귀여운 법이다. 그 크기가 새끼임에도 불구하고 좀 크긴 하지만….

까만 새처럼 생긴 새끼의 크기는 내 손바닥만 했다. 생명의 탄생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뭉클했다. 겨우 눈을 뜬 새끼 가고일과 눈이 딱 마주쳤다. 끼엑, 하고 소리를 낸 새끼 가고일이 내 옆으로 다가오려 했다. 날개는 어떻게 펴긴 폈는데 날지는 못하고 뒤뚱거리면서 오는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그거, 지금 없애버릴까.”

“네? 이 귀여운걸요?”

“그게…. 귀엽다니?”

그가 잘못 들었다는 듯이 되물었다. 우리가 말을 주고받는 사이 새끼가 내 무릎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는 고개를 툭 늘어뜨리더니 몸을 말고 눈을 감았다. 그 모습이 그렇게 평안해 보일 수가 없었다.

“…….”

“…….”

“내가 어미인 줄 아는 거 아닐까요? 왜, 새들이 알에서 깨면 처음 마주하는….”

“그거 파충류야.”

다시 옆에서 알이 금이 가는 소리를 내며 깨지는 소리가 났다.

“이번엔 카샤가 이리로 와요. 당신이 처음 마주치는 거예요.”

“난 저놈이 싫어.”

그가 매서운 눈길로 내 무릎 위에 잠들어 있는 새끼를 일별했다. 아까는 길들일 수 있나 어쩌나 하더니.

“당신을 따르면 제국에 큰 도움이 될 텐데요. 가고일 두 마리를 거느린 제국이 될 텐데. 상징성도 있고, 제국민들도 좋아할 테고….”

내가 얼른 오라고 손짓하자 그가 마지못해 나와 알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깨어났어요?”

“아니, 아직.”

다시 크게 톡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왔어요?”

“음….”

나왔는지 끼엑 하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잠시 뒤에 푸드덕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의 팔을 타고 새끼 가고일이 올라가고 있었다. 이번에 알에서 나온 새끼 가고일이 내 무릎 위에 잠든 것보다 크기가 컸다. 카샤의 어깨 위에 안착한 새끼 가고일이 자세를 잡고 눈을 끔벅끔벅했다.

“와, 당신이 어미인 줄 아는 거 같은데요. 가고일도 길들일 수 있을까요?”

“에이솔한테 던져주면 알아서 연구하겠지, 뭐.”

에이솔이 무척 좋아하는 게 눈에 선하다. 내 무릎 위에 잠든 가고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언젠가 태어날 우리 아이도 이렇게 내 무릎 위에서 잠들겠죠?”

그가 내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아마 그대를 닮아 무척 사랑스럽겠지.”

“당신을 닮아서 똑똑하고 멋있을 거예요.”

그가 꿀이 떨어질 것처럼 달콤한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사랑한다. 샬리, 나한텐 그대밖에 없어.”

그가 다시 내 이마에 가만히 입을 맞추었다. 나도 그래요. 나도 당신밖에 없어요.

-지금까지 ‘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를 읽어주신 독자분들께 무한한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샬리와 카샤를 응원해주신 덕분에 완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Fin

By.[Y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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