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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96화 (96/97)

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96

* * *

크리하엘이 천사 같았다면, 이 자야말로 신이라고 할 수 있었다. 생김새나 신력 그 무엇을 떠나 그 존재 자체로 드는 경외감이, 그를 신으로 생각하게 했다.

그는 절대 인간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완벽하게 조형된 것처럼 보이는 이목구비는 현실과 동떨어져 보였고, 무표정한 얼굴에 감정 한 톨 담기지 않은 눈동자는 이질적인 기분을 느낌과 동시에 몸서리칠 만큼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 아이에게서 네 검을 빼내 주었으면 한단다.”

그러나 차가워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매우 따뜻하고 상냥했다.

“당신은 누구죠…?”

“이런, 팔이 많이 불편하겠구나.”

그는 여전히 표정의 변화가 없었지만 내 팔과 어깨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이제 아무 감각이 느껴지지 않던 덜렁거리는 어깨와 팔이 한순간 꽉 조이며 머리가 핑 돌았다.

“흐읍….”

갑작스러운 통증으로 숨을 들이켰다. 그러나 선명하게 박혀 든 고통은 내가 인지하자마자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를 악물고 버티려던 것이 무색해질 정도였다. 그리고 창백했던 손끝에서 혈색이 돌며 팔 전체가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반사적으로 팔을 한 번 휘둘렀다. 팔이 으스러지기 전으로 돌아왔다.

“이제 그만 그를 놓아주겠느냐.”

“팔을, 치료해 주셔서 고마워요. 그런데 누구신가요?”

고쳐준 것은 고마웠으나 무턱대고 검을 뽑을 수 없었다. 이건 카샤의 눈과 관련되어 있으니 내 몸보다 더 중요한 문제였다. 크리하엘은 내가 검을 찔러 넣었음에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이래서야 그가 죽었는지 알 수 없지 않나.

“혹시 크리하엘을 구하러 오신 거라면….”

신이라는 존재가 크리하엘 말고 더 있다니, 평소 같았으면 놀라서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크리하엘이 아니란다.”

목소리만 들으면 한없이 인자하고 자상할 것 같은데, 그는 정말 한치의 표정 변화도 없는 포커페이스였다. 그나저나 내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은데.

“네? 그게 무슨 말인가요?”

“내가 크리하엘이지. 그는 에티오라고 불린단다.”

크리하엘이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 자라고?

“크리하엘이 아니라….”

“에티오, 아무래도 그가 내 행세를 한 모양이로구나.”

그럼 이자는 뭐지? 신이 맞기는 한 건가. 크리하엘이 아니라 에티오. 우리를 농락한 자가 크리하엘이 아니라고…. 어쩐지 말이 되면서도 말이 안 되는 것 같고….

“반성하라고 내려보냈더니, 그 잠시를 못 참고 일을 저지른 모양이구나. 그런데 너는 여기에 있어야 할 영혼이 아닌데, 흐음….”

그가 나를 보며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나는 연이은 충격에 잠시 멍해졌으나 다시 입술을 깨물며 정신을 차렸다.

“크리…. 아니, 에티오가 그럼 신이 아닌가요?”

“신이 아니라기보다는, 신이 될 자. 내 아들이니 언젠가는 신이 될 것이다.”

크리하엘의 아들…? 둘을 번갈아 보던 나는 궁금한 것부터 물어보았다.

“당신의 아들이 어째서 세계수 속에 갇혀있나요?”

“벌을 받는 중이었지. 그 와중에 이렇게 일을 키우라고는 생각지 못했구나. 정말 손이 많이 가는 아이야.”

에티오가 아버지, 아니 어머니인가? 어찌 되었든 그에게서 벌을 받고 있었다고….

“그럼, 그가 신이 아니라서 내가 그의 가슴에 칼을 찌를 수 있었던 건가요?”

“그건 아니란다. 아직 신격을 갖추지 못했다 해도 허락하지 않는 한 근처에도 오지 못하지. 지금 저 뒤에 있는 네 동료들처럼.”

친위대와 마법사들은 여전히 쓰러진 채로 누구 하나 미동이 없었다.

“그가 창조물을 죽이며 신력이 많이 격하되기도 했지만, 문제는 네가 다른 곳에서 왔기 때문이란다. 신격을 갖추지 못한 자는 다른 세계의 영혼을 구속하지 못하는 법이거든.”

“그럼 당신은 저를 구속할 수 있나요?”

그가 내 어깨를 다시 어루만졌다.

“보다시피, 내 신력은 그 전에도 네게 분명 통했을 텐데. 이전에도 내 신력으로 치료받은 흔적이 있구나.”

그가 지금 내 어깨에 흘려 넣는 신력은 보니의 신력과 매우 흡사했다. 아니, 흡사한 정도가 아니라 그가 진짜겠지.

청량하고 편안하고 포근해서 모든 긴장감을 단번에 날려버릴 정도로 깨끗한 신력이었다. 확실히 나는 보니에게서 치료받을 수 있었고, 세계수 근처로 다가가면 농축된 신력으로 숨쉬기만 버거웠지, 짓눌린다는 느낌은 없었다.

에티오의 힘이 속해있는 이곳 사람들은 영향을 받지만, 나는 다른 세계에서 왔기 때문에 영향을 받지 않았었나 보다. 하지만 내 눈앞에 있는 자는 진짜 신이었다. 다른 세계에서 온 것과 상관없이 그의 힘은 내게 통한다. 그가 나를 해코지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이제 검을 뽑아줄 마음이 들었으면 좋겠구나.”

“그가 저지른 짓 때문에 검을 뽑을 수 없어요.”

그가 말한 대로라면 신은 내 의사와 상관없이 칼을 뽑을 수 있을 테지만 그는 그러지 않고 내게 부탁을 했다.

“그래, 원한이 없다면 찌르지도 않았겠지. 원래 네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길 원한다면 내가 다시 보내주마.”

“그게 아니에요.”

“그럼?”

내가 고개를 젓자 그의 목소리가 의문을 띄웠다. 여전히 얼굴은 무표정 그대로였다. 나는 손으로 뒤쪽을 가리켰다.

“저기에 쓰러진 사람들이, 크리… 아니, 에티오 때문에….”

내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가리키고 있던 뒤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선을 진짜 신이라는 크리하엘에게 고정하고 있던 내가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아레인을 비롯한 사람들이 어리둥절하며 일어나는 모습이 보였다.

“아….”

“되었느냐.”

이렇게 간단히….

“아니요, 그가 저지른 짓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가 거짓 신탁을 내려서 저를 비롯한 많은 사람이 전쟁의 위기에 처해있어요.”

“거짓 신탁…?”

표정은 그대로였지만, 목소리는 마치 카샤가 입꼬리 한쪽을 올릴 때처럼 스산했다.

“나를 얻으면 대륙을 통일할 수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신탁이요.”

“…그것도 해결해주마.”

그의 목소리는 약간 언짢은 느낌을 주었는데, 그것이 나를 향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제일 중요한 게 하나 남아있는데요.”

“말해보렴.”

“카샤의 눈을 고쳐주세요. 에티오가 그의 시력을 가려서 앞이 보이질 않거든요.”

나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게 제일 중요한 건데….

“그는 어디에 있지?”

“여기에 없어요. 그는 프레타스 제국의 황제예요.”

“흐음….”

여기에 없어도 신이라면 분명 가능하지 않을까. 잠시간 말이 없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는 이미 시력을 되찾은 것 같으니 걱정하지 말렴.”

“네? 어떻게….”

그가 에티오에게 눈길을 주었다.

“네가 심장에 검을 꽃은 순간 풀린 것 같구나.”

“에티오는 죽은 게 아닌가요?”

“신격을 타고난 존재는 죽지 않는단다. 소멸할 수는 있어도.”

같은 말이 아닌가 싶었지만, 그냥 입을 다물었다. 내가 알고 싶은 건 그게 아니었다.

“카샤가 시력을 되찾았다는 걸 어떻게 확인하죠…?”

나는 그의 눈치를 보며 쉽게 검을 빼 들지 않았다. 당장 눈앞에서 카샤가 제대로 초점을 맞추고 나를 바라볼 수 있는지 확인해야 할 것 같았다. 멀리 있는 그를 어떻게 확인한다고, 억지 같은 소리였으나 나는 꿋꿋이 버텼다.

“확인시켜주마. 안 그래도 너를 애타고 찾고 있는 것 같으니 말이다. 다만, 들어주는 건 이게 마지막이란다.”

“정말로요…?”

단 한 번도 표정이 변하지 않았던 그가 처음으로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 모습을 보자 겨우 붙잡고 있던 긴장감이 온몸에서 쭉 빠져나갔다. 나는 결국 검 손잡이를 놓치고 주저앉았다. 그와 동시에 시야가 다시 흰빛으로 물들었다. 이전과 달리 포근한 구름 속에 있는 기분이었다.

카샤를…. 어떻게 확인시켜준다는 걸까. 그때까지 깨어있어야 하는데, 자꾸만 눈이 감겨들었다. 천천히 몇 번 눈을 깜박이자, 주변을 가득 채웠던 빛이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내 앞에는 가고일에게 물어 뜯기기 전의 멀쩡하게 복구된 세계수가 있었다. 크리하엘도, 에티오도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완벽하게 복구된 세계수에서 청량한 신력이 흘러넘쳤다. 너무 강해서 숨쉬기 버거운 정도가 아니라 헐떡일 정도였다. 여기를 나가야겠는데…. 생각은 그렇게 하는데, 눈꺼풀이 무거웠다. 탈력감에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조차 없었다. 옆으로 기울어지는 몸을 누군가 받쳐 들었다.

흐려진 시야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이 잡혔다. 입가가 느슨하게 풀리며 입꼬리 또한 덩달아 올라갔다. 그리고 사르르 마음이 녹아내렸다. 더없이 충만한 기분이었다.

* * *

밝은 빛이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몸은 천근만근 무거웠고 나른했다. 왜 이렇게 피곤하지…. 어딘가 꽁꽁 싸 매인 것처럼 움직일 수도 없었다. 세계수와 가고일, 크리하엘이 차례차례 머릿속으로 떠올랐다. 그에 반사적으로 몸이 튀어나가려 했으나 어딘가 얽매여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뒤에서 단단한 두 팔이 나를 강한 힘으로 끌어안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몸에서 힘을 쭉 뺐다. 침대도, 벽도 방안의 가구들도 익숙하지 않은 것들이었다. 카샤의 얼굴을 본 것을 마지막으로 정신을 잃은 모양이었다. 그 뒤로는 기억이 없었다.

눈.

제일 중요한 그의 눈을 확인하고 싶었다. 크리하엘은 분명 카샤의 시력이 돌아왔다고 했다. 뒤돌려 하자 그가 나를 움직이지 못하게 꼭 끌어안았다.

“카샤…?”

화를 내든, 좋아하든 뭔갈 할 줄 알았는데 그가 말이 없으니 왠지 모르게 불안했다. 어깨 위로 그가 자잘한 키스를 퍼부었다.

“얼굴, 보여줘요. 보고 싶어요.”

그가 목덜미를 진득하게 핥아 올리더니 꽉 깨물었다.

“읏….”

“내가 보고 싶었으면, 가지 말지 그랬어. 샬리…. 진정 내가 미치는 꼴을 봐야겠나. 내가 대체 어떤 심정이었는지….”

애절하고 처절함이 섞인 그의 목소리에 가슴 한편이 시큰거렸다.

“나 말고 해결할 사람이 없잖아요.”

“해결할 필요 없어.”

지금 내 마음은 아릿한 동시에 카샤로 가득 차 충족된 기쁨을 누리고 있었다.

“복수하지 못하면 아마 화병이 나서 숨이 넘어갔을지도 몰라요.”

드디어, 그가 나를 돌려 눕혔다.

“그래서, 복수는 다 했나.”

청금석을 박아넣은 것 같은 아름다운 진청색의 두 눈동자가 나를 가득 담고 칭칭 옭아맸다. 초점은 정확히 나를 향하고 있었고, 시선은 강렬하다 못해 뚫릴 지경이었다.

“복수는 충분히 했죠. 그리고 해결하니까 이렇게 좋은데요.”

그의 눈언저리를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쓸었다. 보고 있으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내가 웃자 눈에 힘을 주던 그도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마주 웃었다.

“그냥, 앞으로 내가 이런 일이 없게 해야지, 제 명에 못 살겠군.”

설마 신이랑 얽힐 일이 또 있으려고. 그가 묻기 전에 위험했던 순간만 쏙 빼고 간략하게 말해주려고 입을 열었지만, 말은 밖으로 새어 나오지 못했다.

“읍….”

내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고 밀착한 채 그가 내 입술을 당겨 물었다. 격렬한 키스는 자주 있었지만, 숨 막힐 것 같던 첫 키스 이후로 숨은 쉬게 해줬는데…. 지금 그는 그때처럼 잡아먹을 듯이 거칠게 입안을 휘저었다. 그의 단단한 가슴을 두드려 겨우 입술을 떼어낸 나는 할딱이며 카샤의 입술을 막았다.

그러고 보니, 여기 대체 어디지? 황궁도 아닌 곳에서…. 그가 손바닥에 입술을 막힌 채로 내 다리를 쓸어내렸다. 내 침의는 어느새 반쯤 벗겨져 있었다. 입을 막은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정염에 휩싸인 눈동자를 보니 절로 몸이 떨렸다.

“안 돼요. 여기 마법 물약도 없고….”

그가 내 손바닥을 혀로 느릿하게 핥아 올렸다. 깜짝 놀라 떼어내자 그가 눈을 반달로 휘며 나른하게 웃었다.

“괜찮아, 돌아가면 바로 결혼부터 할 거니까. 신성제국에 교황후를 추천할 정도의 영향력이면 이제 황후로는 차고 넘치지.”

돌아가면 바로, 결혼…?

“이제, 다시는 나 없이 어디 가지도 못하게 할 거거든.”

내가 멍한 상태로 있자, 그가 내 귓불을 깨물며 속삭였다.

“그러니까, 나와 결혼 해줘. 샬리. 안 그러면 이번엔 내가 정말로 죽을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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