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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95화 (95/97)

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95

* * *

어떻게, 여기를…?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것은 내가 알던 가고일이 아니었다. 크기가, 그 덩치가 일전에 보았던 것보다 두 배는 커다랬다. 내가 본 것이 평균적인 크기일 텐데. 이놈이 비정상적으로 큰 게 분명하다. 그것은 소리 없이 눈동자만을 움직이며 내 행동을 주시하고 있었다.

얼마나 정신없었으면 가고일이 온 것도 알아채지 못했지. 나는 꼼짝도 못 한 채 그 소름 끼치는 눈을 마주하고 있었다. 일 분이 한 시간 같던 그때, 가고일이 내 몸이 잠깐 휘청일 정도로 강하게 숨을 들이켰다. 끝날 것 같지 않던 대치 상태가 깨졌다.

가고일이 고개를 돌리며 다시 숨을 들이켰다. 뜻 모를 놈의 행동을 살피다 문득 깨닫는 것이 있었다. 아, 놈이 이곳에 온 이유. 알을 찾고 있는 모양이었다. 알을 넣어둔 내 배낭을 가지고 있던 친위대원은 왼쪽 끝에 쓰러져 있었다. 놈은 오른쪽부터 찾을 요량인지 다시 그쪽으로 숨을 들이켰다.

가고일이, 세계수 근처로 올 수 있을까. 아마 예전이었다면 저놈도 오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세계수의 그 결계는 많이 약해져 있었다. 벼랑 끝까지 몰린 지금, 크리하엘에게 죽든 가고일에게 죽든 밑져야 본전이었다. 저놈을 이용해서 세계수를 파괴할 수 있다면….

놈이 오른쪽을 살피면서도 내 움직임을 계속 주시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상하게도 내가 움직이기만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조심스레 몸을 일으키자 놈의 얄팍하게 세로로 곧은 동자가 대번에 나를 직시했다. 알이 있는 곳으로 죽을 힘을 다해 뛰었다. 사람이 한계에 부딪히면 상상도 못 한 능력을 발휘한다더니 내가 생각해도 굉장히 빠른 속도였다.

달리는 등 뒤로 묵직한 공포가 내달렸다. 알을 들고 튀기엔 시간이 없었다. 나는 알이 있는 배낭을 내 배 아래로 깔고 웅크렸다. 그와 동시에 뻗은 왼쪽 팔에 끔찍한 고통이 뒤따랐다.

“아아아악!”

한순간 정신을 잃을 정도로 극심한 고통에 비명이 끊임없이 나왔다. 겨우 눈을 떠 확인하니 가고일이 발로 내 왼쪽 팔을 지그시 밟고 있었다.

“헉…. 헉….”

입술 안쪽을 깨물었는지 피 맛이 느껴졌다. 다른 발로 나를 압사시키려는 가고일을 향해 냅다 소리 질렀다.

“내 아래에 네 알이 있어! 부서질 거야!”

가고일은 내 말에 행동을 멈추었다. 알아들었는지 어쨌는지는 몰라도, 다른 멀쩡한 팔로 검은 알 하나를 슬며시 내보였다 다시 숨겼다. 진작 기절했어야 할 나는 정말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었다. 알을 본 가고일의 눈빛이 더없이 흉흉하게 변했다. 그 살기에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네 알 지금 당장이라도 으스러뜨릴 수 있어. 내가 배에 힘만 빼도, 네가 날 쓰러뜨리기만 해도 내 배에 깔려서….”

나는 웅크린 채 놈을 협박했다. 하지만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긴, 알아들을 리가 없나? 아니면 작은 인간이 협박하는 건 우스운 것인지도 모른다. 놈은 팔을 뭉개었던 발을 치운다 싶더니 내 몸을 단숨에 잡아 올려 세계수 쪽으로 던져버렸다.

바보 같은 놈이, 내가 내밀었던 배 아래에 있는 알만 보고 배낭은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나만 옆으로 치우면 알이 보일 거라 생각하고 던진 모양인데. 지금 내 손끝에는 배낭끈이 단단하게 걸려있었다. 아무렴, 내 생명줄인데 이걸 놓칠 리가. 세계수 근처로 던져진 나는 바닥에 부딪히기 전에 배낭을 한쪽 팔로 감싸 안았다.

바닥과의 충돌에 속이 진탕되며 거센 기침이 터져 나왔다. 왼쪽 팔은 이미 으스러졌는지 아니면 탈골되었는지 덜렁거렸다. 극통보다 더한 공포감이 앞서니, 이쯤은 아무래도 좋았다.

“네 꼴이 참으로 우습구나.”

세계수에서 크리하엘이 내게 말을 건넸다. 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 말 그대로 곧 돌려줄게요.”

나를 치운 자리에서 알을 찾고 있는 가고일을 향해 배낭에서 알 하나를 꺼내 흔들었다. 그것을 본 놈이 맹렬한 기세로 날아오르며 울부짖기 시작했다. 근처에서 들으니 귀가 먹먹했다. 다시 알을 배낭 안에 집어넣고 둘러맨 뒤 세계수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았다. 세계수 근처에 있으니 짙은 신력으로 마취한 것처럼 고통이 덜했다.

“저놈을 이곳으로 불러들인 모양이로군. 가소롭게도.”

크리하엘의 목소리에는 깊은 분노가 깔려있었다.

“맞아요. 올지 안 올지는 두고 보면 알겠지만, 제가 알을 가지고 있거든요.”

크리하엘은 답이 없었다. 높이 날아오른 가고일이 언제 내려올지 알 수 없었다. 잠시 숨 쉴 틈이 생기자 다시 왼팔의 고통이 엄습해왔다. 전신이 만신창이였다.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다시 일어섰다. 위쪽에서부터 밑으로 쇄도하는 소름 끼치는 파공음이 들려왔기 때문에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일어서자마자 '쿵' 하는 묵직한 충돌과 함께 세계수가 크게 흔들렸다. 고개를 들자 놈이 샛노란 눈을 번득이며 나를 쏘아보았다. 굵은 가지에 매달려 눈동자를 굴리는 모습이 내게서 알을 찾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 엄폐물이 되어줄 세계수의 몸통에 등을 붙이고 천천히 이동하자 주시하는 눈길도 따라붙었다.

“감히, 미물들이 어딜 함부로…!”

크리하엘의 크게 노한 목소리와 함께 가고일이 저 멀리 튕겨 나가떨어졌다.

“대단하네요. 저렇게 큰 가고일을….”

나는 멀쩡했고, 놈처럼 튕겨나지 않았다. 재빨리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너를 데려오는 게 아니었는데, 내가 이런 실수를 하다니….”

이제 와서 후회한다고 뭐가 달라지나. 튕겨난 가고일이 이제 세계수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얼른 둘이서 치고받고 싸우면서 힘을 다 뺐으면…. 문득 이 난리에도 왜 성기사와 신관들이 오지 않는 것인지 의아했다. 저렇게 큰 가고일이니 성도에서 얼마나 난리 쳤을지를 생각하면 바로 달려와야 맞는 건데. 아니면, 이미 당해버려서 달려올 성기사들이 없나….

가고일이 다시 세계수로 돌진했다. 아까는 머리 위라서 보질 못했지만, 지금은 잘 보였다. 세계수 쪽으로 쇄도해 올수록 가고일의 움직임이 느려졌다. 아마 아레인들처럼 움직임에 제약을 받아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저 덩치는 어떻게 꾸역꾸역 밀고 들어왔다. 내가 세계수 뒤로 숨어있는 것을 보더니 나를 향해 이빨을 드러냈다.

위협적인 모습이었지만 지금 가고일은 눈에 띄게 움직임이 느려져 있었다. 놈이 발톱을 내게 휘둘렀으나, 그 모습이 슬로우 모션처럼 느껴졌던 나는 금세 몸을 피했다. 나 대신 세계수의 몸통에 발톱이 깊이 박혔다. 움직임은 느려도 힘은 여전한 모양이었다. 크리하엘은 극히 분노한 뒤로는 말이 없었으나 가고일은 또 튕겨 나갔다.

자꾸 튕겨 나가서 화가 나는지 놈은 이번에 아예 발톱 두 개를 세계수 몸통에 박아넣었다. 그리고 옆으로 이동하며 내게 다가왔다. 나는 숨을 헐떡이며 나무의 밑동주위를 뛰다시피 하며 뱅뱅 돌았다. 저놈이 느리다 해도 덩치가 커서 그런지 금세 따라잡히려고 했다. 세계수는 놈의 발톱으로 인해 몸통 부분이 깊이 긁혀 엉망이었다.

내가 검을 박아넣는 것보다 더 속도가 빠르네. 가고일은 자신을 튕겨내는 것이 세계수라는 것을 알아챈 것인지 나를 한번 주시하더니 나무를 머리로 들이받기 시작했다. 세계수부터 처리할 모양인듯했다. 그러나 정말 무식한 방법이었다. 몇몇 쿵쿵 찧어대던 놈은 세계수가 몇 번 잘게 흔들릴 뿐 뒤로 넘어가지 않자 울음소리를 내며 포효했다.

그리고는 커다란 입을 벌려 나무 몸통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한 번에 나무껍질이 뭉텅이로 떨어져 나갔다. 심장이 크게 엇박자로 뛰기 시작했다. 저놈이 세계수를 파괴해줄지도 모른다. 어째서 크리하엘은 반격 없이 튕겨내기만 하는 것인지 의아했다. 어쩌면 우리 친위대원과 마법사들을 공격할 때 그 힘을 다 사용한 것인지도 몰랐다.

놈은 기세를 몰아 몇 번 물어뜯더니 크게 지친 모양새를 했다. 크리하엘에 의해 계속 튕기기도 하고, 아무래도 세계수의 영역에 들어와 있으니 움직이기가 몇 배로 힘들 것이다.

그래도 저놈의 집념이 대단했다. 세계수는 벌써 깊이 파이고, 속살을 보였다. 그 속살을 또 달려들어 콱 물어뜯자, 큰소리가 나며 나무가 뜯기는 소리가 났다.

그런데 그 소리가 이상했다. 세계수 안쪽에서 공기가 떨리며 울리는 소리가 났다. 마치 속이 텅 비어버린 나무처럼. 나무 속을 물어뜯은 가고일이 멈칫하는 것이 보였다.

뭐지…?

“네놈들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한동안 말없이 가고일을 튕겨내기만 하던 크리하엘이 천둥이 치는 것처럼 노한 목소리로 놈을 향해 거대한 신력을 퍼부었다. 너무도 어마어마한 신력이라 근처에 있던 나도 희미하게 느낄 수 있었다. 저번에 내 몸에 충돌했던 그 변질된 크리하엘의 신력이었다. 주변의 신력마저 모조리 그쪽으로 빨려가는 것 같았다.

아직도 저런 힘을 숨기고 있었으면 왜 진작 안 쓰고 세계수가 저리될 때까지 가만히 있었던 거지. 신력을 정통으로 맞은 가고일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날개를 펼친 채였다. 그리고는 뒤로 천천히 쿵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죽은 걸까…. 사실 저걸 맞고 죽지 않는다면 도리어 그것이 이상할 것이다. 나는 숨을 죽이고 뒤쪽에서 상황을 주시했다.

“허억…. 헉…. 크으읍…. 흐아아악!”

괴로움에 헐떡이는 크리하엘의 비명 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가고일을 없애버린 건 크리하엘인데 어째서 본인이 괴로워하는 걸까. 이유는 모르겠으나 그가 뭔가 무리하게 힘을 썼다는 것만은 알겠다. 저런 부작용 때문에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나. 이미 다리에 힘이 풀린 내가 절뚝이며 가고일이 파헤쳤던 세계수의 앞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내부가 텅 비어있는 세계수 안에 사람이, 아니 천사의 용모를 한 자가 허공에 뜬 채로 고통에 잠겨 몸을 뒤틀고 있었다.

그는 여러 갈래의 희게 빛나는 실 같은 것들에 전신이 얽매여 있었다. 천사가 아니라 신이겠지. 그저 세계수를 매개체로 강림한 줄로만 알았던 크리하엘이 세계수 안에, 그것도 갇혀있는 것처럼 보여 매우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동시에 드는 생각은, 지금이 기회가 아닐까. 크게 튀어 오르는 심장을 진정하려 애썼다.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신을 보며 검을 뽑아 들었다. 저 신을 죽이면 카샤가 눈을 되찾을 수 있었다. 검을 잡은 손이 덜덜 떨렸다. 아직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그의 비명이 귓속에 달라붙었다.

이제 와서 머뭇거리다니 말이 안 되지. 그의 얼굴은 성별을 알 수 없을 정도 중성적이었고 상상 속의 천사처럼 티 없이 맑았다. 그리고 지금 그 얼굴이 고통으로 얼룩져있었다. 그가 우리에게 한 짓을 생각하자 벌렁거리던 가슴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제 온전치 못한 덜덜 떨리는 몸을 이끌고 뜯긴 나무 밑동 위로 올라섰다.

젖먹던 힘을 쥐어짜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망설임 없이 그의 심장에 검을 박아넣었다. 순간 비틀리며 난리를 치던 그의 몸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도, 신의 몸에 내 검이 파고들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박아넣은 그의 심장에서 흰빛이 팍하고 터졌다.

사방이 희게 변해 눈이 부셨다. 그리고 천지가 크게 진동했다. 검 손잡이를 잡은 내 손부터 시작해 몸도 크게 떨렸다. 다리에 힘이 풀리며 주저앉았으나, 검 손잡이만큼은 악착같이 붙들고 있었다. 감지 않은 두 눈에서 눈부심으로 인해 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모든 공간을 덮었던 흰빛은 터질 때만큼이나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천지의 진동도 멈추었다. 이제 너무 지쳐서 쓰려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내 몸이, 내 정신이 내 것이 아닌 것만 같았다. 마지막으로 크리하엘의 생사만 확인하고 나면…. 검 손잡이를 잡은 내 손 위로 누군가의 손바닥이 포근하게 덮었다.

누구…? 흐릿해진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는 정녕, 신이라고 불릴만한 자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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