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94
그 모습이 심상치가 않아 나도 모르게 입이 열렸다.
“주세요. 트리뷰세티.”
내가 뒤를 돌아보며 손을 뻗자 트리뷰세티를 가지고 있던 친위대가 머뭇거리며 아레인의 눈치를 보았다. 나는 투알린에 사용했었던 고대 마법 병기인 소형 트리뷰세티 1기를 들고 왔다.
이건 내가 카샤에게 받은 수많은 약혼 선물 중 하나였다. 쓸 일이 있을까 했던 것인데, 혹시 몰라서 들고 왔다. 물론 카샤가 모르게. 교황후 추천장을 가지고 친선의 의미로 신성제국을 방문하는데 트리뷰세티를 들고 간다고 하면 의심할 것이 뻔하니 말이다.
사실 우리 모두 속으로 예상하고 왔다. 아레인과 에이솔이 애를 썼지만 검기 한 가닥, 마나 한 가닥 세계수에 닿을 수 없었다.
사실 이렇게 깊숙이 들어온 것만 해도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아레인과 에이솔도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실패했지만. 다들 짙은 농도의 신력 가득한 이곳에서 괴로워하는데 난 조금 숨쉬기가 버거울 뿐 아무렇지 않았다. 왠지 세계수 앞까지 다가가도 나는 괜찮을 것 같았다.
그들은 나를 지키는 것이 의무니까 어떻게든, 내가 최대한 나설 일이 없기를 바랄 것이다. 지금 내게 트리뷰세티를 쉽게 건네지 않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 상황에서 무언가 할 수 있는 사람은 나뿐임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저거 너무 불길하잖아요. 얼른 주세요.”
지금도 시시각각 나무의 색이 음침하게 바뀌고 있었다. 밑동부터 시작된 그것은 벌써 나무의 삼 분의 일을 물들이며 올라가고 있었다. 트리뷰세티를 들고 있는 친위대원을 채근하자 그가 아레인을 힐끗 보며 머뭇거렸다. 아레인은 팔 한쪽을 부여잡고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내가 움직이자 그의 눈동자가 내게로 쏠렸다.
“샬리, 무슨….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아레인, 에이솔도 예상하고 왔잖아요. 계획도 그렇게 짰구요. 그리고, 우리 오는 동안 계속 검술 연습한 거 기억나죠?”
“그건, 아직…. 뭔가 방법이 더 있을지도 모릅니다.”
“저걸 보고도 그래요?”
내게 트리뷰세티를 건네지 않는 친위대원에게 직접 다가갔다.
“얼른 줘요. 시간 없어요. 이건 당신이 들고 있으세요.”
나는 가고일의 알이 들어있는 작은 배낭을 그에게 떠넘겼다.
“저…. 공주님.”
친위대원이 어찌할 바를 모르며 아레인의 눈치를 볼 때 재빨리 그것을 빼앗다시피 해서 넘겨받았다. 바주카포의 형태를 띤 묵직한 것이 내 어깨 위로 올라왔다. 검술을 배우며 힘을 키우긴 했지만 그래도 나한텐 한참이나 버겁고 무거웠다.
“내가 잘 하고 있는지만 봐주세요.”
나는 아레인과 에이솔이 있는 곳까지 나아갔다. 역시나 나는 짓눌리지도, 억누르는 느낌도 없었다.
“아레인 경, 걱정하지 마세요. 괜찮아요. 공주님이 세계수 앞으로 가는 것도 아닌데요.”
“…….”
에이솔이 몸을 떨어대며 아레인을 진정시키는 모습은 내가 봐도 설득력이 없긴 했다. 더 가까이 가고 싶었지만, 그들이 기겁할까 봐서 멈추었다. 나는 배운 대로 차근차근히 해나갔다.
“둘 다 괴로우면 뒤로 물러나요.”
내가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물러날 두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 자리에 계속 고통스럽게 버티고 있는 것이 안타까워 말이 안 나올 수가 없었다. 어깨에 고정한 트리뷰세티의 잠금장치의 레버를 풀었다. 그리고 세계수를 겨냥한 채로 마나 아티팩트를 홈이 파인 곳에 모양대로 맞추어 끼워 넣자 달칵 소리를 내더니 고대 병기가 웅웅 진동이 울렸다.
나는 숨을 크게 몰아쉬고 아티팩트를 강하게 내리눌렀다. 그 순간 엄청난 힘이 내 어깨에서 세계수 쪽으로 폭발하듯 뻗어 나갔다.
굉음에 귀 옆이 잠시 멍했고, 무지막지한 힘의 반동으로 어깨에 큰 충격이 왔지만 이를 악물었다. 나는 트리뷰세티의 화염구가 세계수 쪽으로 맹렬하게 쏘아져 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 화염구가 세계수의 늘어뜨린 이파리 하나 닿지 못하고 홀연히 종적을 감추는 것을 덤덤하게 바라보았다.
뒤에서 사람들의 탄식이 일었다. 하지만 나는 이것도 예상했다. 그들의 검기와 마법이 먹히지 않았으니, 이것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그런데도 내가 굳이 트리뷰세티를 사용한 건, 이왕 가져왔으니 써보자는 것도 있었고 이것조차 먹히지 않으면 내가 세계수 근처로 다가가는 것에 사람들이 어느 정도 납득하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역시 자동은 안 먹히네, 수동밖에 안 되나 봐요.”
나는 미련 없이 트리뷰세티를 어깨에서 내리고 다시 돌아가 친위대원에게 넘겼다. 내 일련의 행동을 지켜보던 그들이 고대 병기를 넘기고 안심할 때에 빠르게 앞으로 튀어나갔다.
“샬리!!”
“공주님, 어디 가세요!”
내가 아무리 빠르게 뛰어도 그들보다 느렸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우습게도 여기서는 내가 제일 빨랐다.
그들은 괴로워서 넘어오지 못하는 것을 나는 손쉽게 뛰어넘었다. 아마 설렁설렁 뛰어도 그들은 나를 쫓아오지 못할 것이다.
신성제국으로 올 때 나는 그 중간중간 짬을 내어 아레인에게 검술을 배웠다. 한 번에 힘을 실어 검을 내지르거나 폭발적으로 내리긋는 방식 같은 것 말이다.
“설마, 샬리…. 안됩니다!”
그들은 내 행동을 예상했지만 다가올 수 없었다. 힐끗 뒤를 돌아보자 아레인이 앞으로 다가오다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에이솔이 그를 부축하러 가는 모습도. 세계수 바로 앞까지 도착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멀쩡했다. 내 허리춤에 매여진 검을 뽑아 들었다. 세계수의 색깔이 몸통 부분을 전부 휘감았다.
“내가 뿌리까지 다 뽑아버려야지.”
아, 이럴 줄 알았으면 도끼를 들고 오는 건데. 내 검은 강철 하나 섞이지 않은 순수한 미스릴로 만들어졌다. 그래도 도끼가 낫지 않을까, 미리 준비했어야 하는 건데. 나도 참 바보 같다는 생각을 하며 검을 허리 뒤로 빼었다가 강한 힘으로 나무에 찔러넣었다.
강한 반발력이 느껴졌지만, 검 끝은 나무에 푹 하고 박혀 들었다. 그와 동시에 내가 검을 찍어 넣은 곳부터 시작해 짙게 물들어가던 색이 다시 본래의 색으로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내가 꼭 다시 정화하고 있는 것 같네.”
찔러넣은 검을 옆으로 비틀려고 할 때였다.
“네가 정녕 죽고 싶은 게로구나.”
나무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천상에서 내려왔다 해도 믿을 정도로 아름답고 중후하게, 그리고 은근하게 주변에 울려 퍼졌다.
뒤를 돌아보자 나만 들은 것이 아닌 듯했다. 그들이 당황하는 것이 멀리서도 보였다. 그리고 동시에 그들이 저 멀리 한꺼번에 튕겨 나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세계수를 바라보았다. 나무가 말을 할 리는 없으니, 이 목소리는 크리하엘일 것이다.
“이제 하다못해, 나무에까지 강림하셨나 보네. 아직 만월의 밤이 끝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온 거죠?”
나는 말을 하면서 이를 악물고 검을 비틀었다. 크리하엘이 다시 강림하다니 초조해졌다.
“그만두고 여기서 나가거라. 너 같은 미물이 올 곳이 아니다.”
“나는 언제든 나갈 수 있어요. 당신이 두 가지 약속만 해준다면. 나도 신성한 나무를 베어버리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그가 내 말에 노한 것인지 세계수의 이파리가 파르르 스산하게 흔들렸다.
“정말 어리석기 그지없군. 한낱 미물이 나를 배겠다고?”
“누가 당신을 베겠다고 했나요? 난 세계수를 베어낸다는 소리였어요.”
그의 말에 대꾸해주면서도 나는 온통 나무를 베는 것에 신경이 쏠려 있었다. 나도 오러 같은 것을 사용할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정말 성가신 존재로구나. 네가 원하는 것을 말해보라.”
그가 내 약속을 들어준다면 나간다는 말은 그저 해본 말이었다. 그를 믿을 바에야 지나가던 개미를 믿겠다.
“카샤의 눈을 정상적으로 돌려주고 더 이상 우리 일에 관여하지 마세요.”
“그는 받아야 할 벌을 받았을 뿐이다. 그만두지 못하겠느냐!”
“당신이 약속해줄 거라고는 애초에 기대하지 않아서….”
나는 처음 찔렀던 곳을 중심으로 악착같이 세계수의 몸통을 베어내고 있었다. 조금씩이지만 틈이 꾸준히 벌어지고 있었다. 세계수의 두꺼운 몸통을 생각하면 언제 다 베어버릴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크리하엘에게 대꾸하면서도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멍청한 것, 네 뒤의 미물들이 현생에서 사라지길 바라는 모양이야.”
그 말에 나는 검을 박아넣고 잠시 멈추었다.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차라리 나에게 신벌을 내리세요. 당신이 이렇게 말뿐인 건 아무래도 힘을 남발해서 그런 거겠죠? 신탁을 내리고 만월의 밤이 찾아왔는데 다시 강림까지 하고, 어디 그렇게 할 수 있겠어요?”
그는 줄곧 불안정한 만월의 밤을 지속했고 그 와중에서도 나를 견제하는 신탁을 내렸다. 그리고 계속 내게 말로만 위협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사실 조금 안심하고 있었다. 다시 나를 본다면 진작 신벌을 내릴 것으로 생각해 왔었는데 아무런 일이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내 잘못된 판단이었던 모양이다.
크리하엘은 무언가를 하는지, 잠시간 말이 없었다. 그에 나는 불안하고 초조해지기 시작했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더 미친 듯이 검으로 나무를 베어내기 시작했다. 내가 신을 상대로 뭘 한 거지. 괜히 말을 되돌려주었나. 급격한 후회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얼마간을 그렇게 침묵 속에 있었을까, 나무의 이파리들이 한 차례 떨리며 눈부신 흰빛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불길했다.
“그래, 내가 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한 번 보자꾸나.”
크리하엘의 말이 끝나자마자 수백 개로 비산하는 흰빛, 아주 작은 신력 덩어리들이 뒤쪽의 친위대와 마법사들이 있는 방향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안 돼!”
내가 소리 지르는 것과 동시에 가공할 속도의 신력 덩어리들이 비처럼 그들에게 쏟아져 내렸다.
“어떻게…. 어떻게….”
저 멀리서 억눌린 신음이 이리저리 들려왔다.
“하지 마…. 그만둬요. 나한테 신벌을 내리라고 했잖아요!”
“한 번 더 하면 정말, 다들 죽어버릴지도 모르겠구나.”
그의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목소리는 마치 웃는 것 같았다. 일단은, 그들을 살리는 것이 우선이었다. 나는 검을 집어넣고 그들에게 달려갔다. 나 때문에, 내가 크리하엘을 도발하는 바람에…. 토할 것 같은 죄책감과 함께 온몸이 극한 긴장감으로 조여들었다. 내가 다가갔을 때는 모두 다 쓰러져 고통스러운 몸짓으로 바닥을 뒹굴었다.
“괜찮….”
을 리가 없지. 손을 덜덜 떨며, 괴로워하는 아레인의 몸을 조심스럽게 뒤집었다. 그가 눈을 뜨지 못하고 헐떡이고 있었다.
“아….”
몸을 돌려 에이솔을 찾았다. 그녀는 미동이 없었다. 마치….
지금 내가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생각해. 어떻게 하는 게 최선 일지…. 몇 번 커다란 병장기 소리가 흘러나왔기 때문에, 신성제국이 가고일로 다른 곳에 신경이 쏠렸다 하더라도 안심할 수가 없었다. 언제 성기사들이 몰려올지 모른다 생각하니 입안이 바짝 말라왔다. 머릿속이 엉망이었고 쓰러져 괴로워하는 친위대와 마법사들을 보니 몸이 떨려왔다.
입술을 깨물고 진정하려 애썼다. 뒤에는 크리하엘이, 앞으로는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성기사들이…. 다시금 조여오는 압박감에 식은땀이 흘러내리는데 내 위로 커다랗고 어두운 그림자가 졌다. 막혀있던 숨이 터지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사납게 번들거리는 짐승, 아니 파충류의 날카롭고 섬뜩한 눈동자가 초점을 모으듯 일자로 좁아지며 나를 직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