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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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입니까, 그게.”
“아직 가고일이 나타나지 않았어요. 지금까지 일정을 느긋하게 잡아서 그렇지. 최대한 빠르게 움직이면 여기서 성도까지는 반나절이에요. 그 정도면 충분하죠. 가고일을 성도로 유인해서 시선이 몰려있을 때 우리는 세계수로 접근하는 거예요.”
“에이솔, 좋은 방법이긴 한데 사람들이 혼란에 빠질 거예요. 성기사들도 가고일을 잡을 수 있나요?”
확실히 여기보다 치안과 병력이 좋은 성도에 쳐들어오는 것이 훨씬 나을지도 모른다. 여기는 방어할 인원도 적고 원군요청을 해도 오는 데 시일이 걸리니 피해가 누적될 것이다.
그럴 바에야 성도에서 성기사들이 가고일을 처리하는 것이 훨씬 낫지 않을까. 비록 성도에 인구가 훨씬 많아서 더 큰 혼란이 예상된다 해도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현재 우리에게 오히려 도움이 되는 상황이 될 것이다.
“물론이죠. 우리보다 실력이 떨어지긴 하지만 그들도 나름 신성제국의 기사들이니까요.”
아레인이 고개를 기울여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하도록 하죠. 가고일이 내일 오전까지 나타나지 않는다면요. 하지만 나타난다면 기존의 계획대로 해야겠습니다. 사체는 맡기는 것으로 변경해야겠군요.”
그는 다른 기사들에게 가고일의 사체처리 방식을 바꾸기 위해 명령을 내리러 바깥으로 나갔다. 다시 세세하게 계획을 짠 우리는 만월의 밤이 깊어지는 것을 확인하고 이른 시간에 잠자리에 들었다. 성도에 반나절 만에 이동하려면 새벽 일찍 일어나야 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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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성도의 검문소 앞에 도착한 건 딱 해가 지기 전 아슬아슬할 때였다. 가고일은 여전히 나타나지 않았다. 아마 짝이 없을지도 모른다던 루카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정말 반나절 만에 가능하나 싶었던 이동은, 마법사들이 간간이 마법까지 써가며 속도를 높인 탓에 가능한 일이었다.
성도의 검문대는 훨씬 까다로울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 전의 도시보다 더 수월하게 지나갔고 의외의 정보도 얻을 수 있었다. 신성제국에서 대주교를 지내고 있다는 이와 아레인이 접선하고 돌아왔다.
“우리가 성도에 발을 디딜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듯합니다.”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었으니, 확실히 에이솔의 계획은 훌륭했다.
“그렇겠죠. 아무것도 없이 적진 한복판에 뛰어든다는 건 스스로 잡아달라는 얘기밖에 되지 않으니까요.”
지금 신성제국의 대성전은 나로 인한 신탁 때문에 혼돈 그 자체였다. 우리가 가고일을 잡아 왔다는 것은 성도 거리에서나 얘깃거리였고, 성도의 대성전에서는 흥미조차 끌지 못했다.
우리에게 관심이 쏠리지 않는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그들은 신탁 때문에 우리의 향방을 찾기 위해 꽤 많은 인력을 추려서 추적하는 중이라고 한다.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지만, 인질로 두든 다른 것과 교환들 하든, 정말 신탁대로 하든 어쨌든 나를 붙잡고 보자는 식이었다.
우리는 전 전 도시에서 행방이 끊겼으니 아무리 빨라도 만월의 밤 때문에 삼일 이상 소요, 혹여나 황궁 마차를 타고 돌아간 시녀들을 쫓아간다면 시일이 더 걸릴 것이다. 그리고 알아챈다 해도 전서구를 보내는데 하루에서 이틀 정도. 최소 사흘의 시간이 있었고 에이솔은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했다. 오늘 내로 가고일이 나타나지 않으면 원래의 계획대로 하기로 했다.
“샬리, 절대로 잡히지 마세요.”
라이의 눈동자가 불안으로 얕게 흔들렸다. 그녀도 나보다 먼저 제국을 돌아갈 채비를 했다.
“잡힐 리가 없지요. 걱정 마요. 라이.”
내가 잡히는 순간 대륙은 전쟁통이 될 텐데 절대 안 될 말이었다. 더군다나 지금 카샤는 시력도 상실한 상태이다. 그게 소문이 퍼지면 제국의 이미지가 실추되는 건 물론 제국인들의 신뢰 하락으로 카샤의 입지도 좁아지게 된다. 제국인들은 그들의 통치자가 뛰어나고 완전무결하길 바란다.
그 전의 잘한 일들도 모조리 없던 일이 되어 버릴 수 있었다. 지금 우리가 성도에 온 목적은 오로지 세계수의 파괴가 목적이었다.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간절히 바라고 있다. 세계수와 이곳의 흐름을 끊어 신력을 단절시킨다면 신성제국도 쇠락을 길을 걷게 될 텐데, 라이는 그 부분에 대해 통 말이 없었다.
“프레타스 제국은 신력이 있어서 제국의 위용을 떨치고 있나요. 뭐. 신력이 없으면 타격은 크겠지만, 세력 유지하는 것도 신성제국의 능력이죠. 내가 교황후로 있는 한 제국이 왕국으로 격하되는 일은 결코 없을 거예요. 그리고, 신력을 잃어 신성제국이 흔들릴 틈에 교황후 후보로 들어가는 것은 타국인인 내가 기반을 다지기에 아주 좋은 기회랍니다.”
그녀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내가 라이를 걱정하다니, 쓸데없는 오지랖이었다. 그녀는 어딜 가든 잘 해낼 테니 말이다.
“가고일이 정말 짝이 없었나.”
우려했던 가고일은 성도에 도착한 그 날에도 볼 수 없었다. 다음 날 새벽 일찍부터 우리는 기존의 계획대로 진행하기로 했다.
라이와 세 공작가들의 기사 60여 명 정도는 다시 제국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제국으로 가는 간단한 용병 의뢰를 받아서 말이다.
본래 70여 명을 보낼 예정이었지만, 가고일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결국 친위대와 마법사들은 각각 한 명만 제국으로 보내고 나머지는 모조리 남기로 했다.
“라이, 조심해서 가도록 해요.”
“샬리도 일을 끝내고 무사히 돌아와요. 우리, 성도에는 다음에 꼭 정식으로 방문하도록 하죠.”
라이를 보낸 후 우리는 세계수로 바로 이동하기로 했다. 신탁에 정신이 팔린 지금이 기회였다. 대주교로 활동하고 있는 제국의 첩보원이 보내준 정보에 의하면 만월의 밤이 지속되는 기간에는 성지순례를 받지 않는다고 했다.
어차피 신관들도 세계수 근처에 가질 못하니 근처에서 순찰을 돌고 있는 이들이 대부분이라 했다. 멀리서 어렴풋이 보이는 세계수는 은은한 빛을 뿌리며 그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무 둘레는 매우 넓고 두꺼웠으며 그 크기가 어마어마했다. 해가 완전히 뜬 것이 아니라 날은 아직 어둑했고, 그 아름다운 빛은 보는 사람을 홀리게 했다.
그 빛무리에 압도되어 성지순례를 온 것도 아닌데 저도 모르게 그 앞에서 경배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세계수 주변에서 순찰을 돌고 있는 이들은 스무 명의 성기사들과 다섯 명의 신관. 그리고 교대시간은 5시간마다. 우리는 새벽조와 오전조가 교대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기 오는군요.”
우리 쪽은 마법사와 기사가 2인 1조로 움직였다.
각자의 자리에서 교대 조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마법사와 기사들은 그들이 다가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조용히 다가섰다.
“오늘은 성지순례를 받지 않….”
성기사는 더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침묵 마법으로 일시적으로 목소리를 잃어버린 성기사는 입을 뻐끔대며 제 목을 쓰다듬었다.
상황을 알아차린 성기사가 칼을 빼 들기도 전에 친위대가 그의 급소를 가격하며 기절시켰다. 그리고는 손발을 묶어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쉽게 마무리된 곳이 있는가 하면 다른 곳에서는 칼 부딪히는 병장기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그러나 해결된 조에서 마법사가 다시 침묵 마법을 펼치며 금세 조용해지고는 했다.
“다 정리가 된 것 같습니다.”
“교대하기 전에 끝내야 해요.”
에이솔과 아레인이 내게 다가왔다. 낮은 높이의 성벽을 둘러싼 그 안쪽, 한중간에 세계수가 있었다. 저 빛무리는 신력일까.
근처에 있는 우리에게 신력이 미약하게 스며들었다. 그것은 꼭 보니의 신력과 같았다. 청명하고 맑고 기분 좋게 만드는 기운이었다. 세계수에서는 이렇게 정갈한 신력이 나오는데 어째서 그 신이라는 크리하엘의 신력은 그렇게 음침하게 변질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우리가 성벽 앞을 지키고 서 있는 신관 다섯 명까지 기절시키고 성벽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였다. 저 멀리서 굉장한 폭음이 들려왔다. 파괴적인 소리가 섬뜩해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커다랗게 울부짖는 소리.
“가고일의 사체가 있는 방향인 걸 보니 다른 놈이 온 것 같습니다. 저쪽으로 시선이 쏠릴 테니 우리에게는 더 좋군요.”
“세계수에 신경 쓸 여력이 없겠죠?”
“역시 짝이 있었어요. 그래도 어찌 될지 모르니 서둘러요. 공주님.”
아레인과 에이솔이 빠른 속도로 성벽 안으로 진입했다. 그 둘이 괜찮다는 사인을 보내고 나서야 나는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성벽 안은 공기의 밀도가 아니, 신력의 밀도가 매우 높았다. 청량한 신력이 농축되어 숨쉬기가 조금 버거웠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음…. 이런 신성한 나무를 훼손해야 한다니, 뭐 어쩔 수가 없나요. 자업자득이죠.”
우리는 천천히 앞으로 전진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앞서가던 이들이 숨을 컥컥 들이켜며 움직임을 멈추었다.
“무슨 일이에요?”
“이 이상 들어가지 못할 것… 숨 쉬는 것이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친위대원 몇 명이 그리 말하며 한걸음 물러섰다. 다른 마법사들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이 중에 실력이 가장 뛰어난 아레인과 에이솔은 몇 발자국 더 나아갔다. 내가 뒤따라가려 하자 그가 손을 들어 저지했다.
“들어가려 하면 들어갈 수는 있겠는데 몸의 압박감이 장난이 아니군요. 이 정도 거리에서 검기를 쏘면 맞으려나….”
“저도 마찬가지예요. 우선 마법사용이 가능한지 한번 볼게요. 보니에게 마법이 통하긴 했는데 세계수에도 통하려나.”
아레인은 괴로워 보였고 에이솔은 그 와중에도 마법사의 호기심이 무럭무럭 넘치는지 눈이 반짝거렸다.
“나도 가볼게요.”
“아직, 오지 마십시오. 그대로 계세요.”
아레인이 단호하게 나를 제지했다. 그가 발검하여 칼끝을 세계수 쪽으로 겨누었다. 그의 검에서 오러라고 하는 푸른 불꽃이 점점 크게 일렁였다. 아레인이 팔을 휘두르며 엄청난 기세의 오러를 세계수 쪽으로 쏘았다.
“큭…. 하…. 굉장히, 팔 한번 휘두르는데도…. 팔이 떨어져 나가는 줄 알았습니다.”
어느새 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흥건했고, 얼굴은 고통스럽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가 쏘아 보낸 매서운 오러는 조금 나아가다 말고 허공에서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마치 신기루를 본 것처럼, 아무 일도 없다는 양 다시 주위가 평온했다. 그 모습을 본 아레인이 표정이 무겁게 굳어졌다.
“쉽지 않겠다 했지만, 오래 끌면 안 되는데 말입니다.”
“아레인 경의 말을 참고해야겠군요. 지금도 짓눌려서 으스러질 것 같은데 말이죠. 최대한 움직임을 주지 않아야겠어요.”
그들은 평이한 어조로 말을 주고받고 있었지만,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에이솔의 몸이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소매 속의 완드를 꺼내 세계수 쪽으로 겨누었다. 마법을 모르는 나조차도 그녀 주위로 휘몰아치는 거대한 마나의 유동을 느낄 수 있었다.
항상 간단한 마법만 쓰던 그녀를 보다가 이런 모습을 보니 생경했다. 그녀의 눈꺼풀 위로 땀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보니 얼마나 힘겨운지 알겠다. 완드로 응축된 마나가 모여들더니 세계수 앞으로 그 어마어마한 힘이 빠르게 폭사 되어 앞으로 나갔다. 그러나 그것은 아레인의 검기처럼 세계수 앞의 어느 부분에서 사그라들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게…. 이게 얼마나 많은 양이었는데 그걸 다 먹어치워….”
에이솔이 헉헉거리며 세계수를 노려보았다. 그 순간 나무 밑동의 색깔이 변했다. 아름다운 빛깔을 띄우던 나무가 점점 짙고 음침한 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