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92
* * *
루카가 나와 라이를 엄폐물 뒤쪽으로 숨겼다. 커다란 바위 뒤에서 우리는 숨죽이며 지켜보았다.
“이거 잘못하면 미친 가고일 때처럼 난전이 되겠는데요. 어쩐지 쉽다 했더니….”
마법을 깨트린 가고일은 우리들의 예상을 깨고 제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그저 위협적으로 울음을 터트리며 날개만 크게 퍼덕였다.
“날지 않으면 우리가 유리하죠?”
“예, 보시다시피…. 날개를 다쳤나? 왜 저러지?”
루카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고일의 등에 붙어있던 아레인은 날개에 가까스로 매달려 있어 위태해 보였다. 그러나 날개가 펄럭이는 반동을 이용해 다시 등 위로 점프해 올라섰다. 그때에 맞추어 마법사들이 다시 홀드 마법을 걸었으나 잠시 멈칫했던 가고일이 다시 몸통을 부르르 털었다. 다시 마법을 깨트린 것 같았다.
“분산하지 말고 날개 쪽만 집중!”
에이솔이 소리를 지르고 마법이 집중되어 쏘아지자 날개가 움직임을 딱 멈추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파르르 떨리기 시작하는 것을 보니 얼마 안가 깨질 것 같았다. 가고일의 등에 바짝 붙어있던 아레인이 다시 자리를 잡았다. 어느 때보다 강렬한 푸른 불꽃이 검에서 높이, 아주 높이 치솟아 올랐다. 우리는 숨도 멈춘 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는 단번에 가고일의 등 위에서 검을 찔러넣었다. 검 손잡이만 남길 정도로 아주 깊이 찔러넣자 마법이 깨진 가고일이 다시 날개를 퍼덕였다. 아레인은 검을 붙잡고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가고일은 몇 번 퍼덕이더니 더는 움직임을 이어가지 못하고 고통스러운 울부짖음을 반복하다 이내 힘이 빠진 채로 쿵 소리를 내며 옆으로 쓰러졌다.
“후우…. 가고일이 날지 않아서 정말 천운이었습니다. 조장님의 빠른 판단력으로 단번에….”
옆으로 쓰러진 가고일의 날개 밑, 배 쪽에 동그란 무언가가 희미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루카, 저게 뭐지요?”
“그래도 이렇게 쉽게 잡다니 말도 안 되는데, 도리어 찝찝…. 그러게요. 저게 뭘까요.”
가고일은 잡았는데 반대로 루카의 표정은 심각했다.
“저거, 동그란 거 알 같지 않아요?”
멀리 떨어져 있긴 하지만 아무리 봐도 타원형으로 생긴 커다란 것이 알처럼 보였다. 색은 가고일의 몸체처럼 검었지만 반들반들한 그것은 햇빛을 머금고 우리 쪽으로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그 빛 때문에 오히려 멀리 있는 우리만 눈치를 챈 것 같았고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도리어 가고일의 배 아래쪽, 그들의 발치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날개에 살짝 가려져 위에서는 안 보이는 모양인데. 가고일의 생사를 확인하는 모습만 보일 뿐.
“허락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가까이 가서는 안 되니…. 어… 어! 공주님…. 아직 가시면 안 됩니다!”
“잘못하면 저 사람이 알을 밟겠어요!”
나는 다급히 뛰어가며 말했다.
“아, 이런…. 공녀님, 업어드릴까요? 지금 뛰어야겠는데요.”
루카가 라이를 업고 내 곁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한 명 업은 채로도 나를 따라잡다니….
“공주님, 이 상황, 뭔가 익숙하지 않으십니까?”
“모르겠는데요. 거기! 밟지 마요, 아니 멈춰요!”
헉헉대며 대답하다가 알을 밟으려던 사람이 다시 알 쪽으로 다가가길래 소리를 질렀다. 그 기사는 내 목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멈춰섰다. 다들 이쪽을 쳐다보자 루카가 한숨을 내쉬었다.
“공주님, 검술 배우시더니 체력이 많이 느셨습니다….”
도착하자마자 알 앞에 서 있던 기사에게 자리를 옮겨달라고 양해를 구했다.
“루카 경, 내려주세요. 저도 알이 보고 싶어요.”
라이가 루카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녀를 내려준 루카가 아레인을 보며 입을 열었다.
“조장님, 아무리 미친 가고일이 아니었다 해도 쉽게 잡았는데요. 그때는 마법사들이 적다 해도 기사들이 배 이상이었고 부상자도 꽤 많지 않았습니까. 너무 이상하다 했더니….”
“그래, 그 이유가 저기 있었던 것 같군. 샬리, 잠시만. 만지지 마십시오.”
날개 밑에서 반들반들하게 윤이 나는 검은 알을 만져보려던 나는 아레인의 말에 제지당했다.
“위험할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달려오면…. 샬리의 안전이 최우선입니다. 아무리 급한 사항이라 해도 위험했습니다. 가고일이 갑자기 움직이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그래도 알이….”
“아마 부서지기 전에 발견했을 겁니다.”
아레인이 단호하게 말하며 나를 책망했다. 그의 얼굴에 걱정과 근심이 묻어나서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해요. 내가 너무 성급했어요.”
내가 아레인에게 혼나든 말든 라이는 옆에서 몸을 숙인 채 알을 구경하고 있었다.
“알이 있다구요?”
가고일의 사체 뒤편에서 마법사들과 떠들던 에이솔이 알이라는 소리에 다급하게 앞으로 넘어왔다. 알이라고 좋아할 줄 알았던 그녀의 얼굴이 삽시간에 새파랗게 질렸다.
“전… 투 준비를, 아니…. 공주님을 먼저 대피….”
“무슨 일입니까.”
횡설수설하던 에이솔의 어깨를 아레인이 툭툭 치자 그제야 그녀가 다급하게, 횡설수설 말을 쏟아냈다.
“알 때문에 가고일이 움직이지 않았던 건 다들 예상했겠지요. 그런데 이 녀석에게 짝이 있다면요? 아마 변경의 그 미친 가고일처럼 굴지도 몰라요. 상황이 안 좋아요. 가고일은 모성애와 부성애가 극심한 개체예요. 희귀해서 그런지….”
아레인이 초조한 듯 입술을 깨물며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그렇지만 지금 마법사들의 상태가…. 저 또한….”
“아까처럼 길게 마법을 유지하지 못해요. 마나가 고갈된 사람들이 꽤 있어요. 휴, 아레인 경이 상대했다던 미친 가고일을 저도 보게 생겼네요. 아레인 경도 아까 한 번에 힘을 폭사하신 걸 텐데….”
“그나마 이번엔 운 좋게 끝났지만, 그런 미친 가고일이라면 공주님을 근처에 모시고 전투하기도 곤란해집니다.”
“그리고 오늘부터 만월의 밤이에요. 우리는 빨리 도시에 들어가야 하구요.”
“의외로 짝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루카가 허허롭게 웃으며 얘기하자 에이솔이 고개를 저었다.
“희귀한 가고일인데 혼자서 알을 낳았겠어요? 이 녀석의 비명 소리를 듣고 오고 있을지도 몰라요.”
얘기를 들어보니 상황이 심각해지고 있었다.
“얼마나 안 좋은 상황인가요. 지금.”
“마법사들이 마나를 많이 소비한 상태라 회복되려면 좀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고요. 가고일은 보통은 점잖은 녀석이나 날뛰면 마법을 맞추기도, 검을 쓰기도 매우 힘들어집니다. 특히나 날아다니는 녀석이라….”
우리의 현재 상황까지 더해지니 그가 골치가 아픈 듯 이마를 짚었다.
“아레인 경, 별수 없어요. 어차피 사체를 여기에 놔두고 가도 미친 가고일이 근처 도시를 공격할 거예요. 이러나저러나 결과는 같으니 우리는 이 사체를 도시까지 운반하고 용병 의뢰소에서 완료하는 것을 목표로 둡시다.”
에이솔의 말에 아레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사체를 데려온 우리를 비난할 것 같은데요.”
도시에서 매 맞겠는데….
“원래 용병들이란 게 그렇습니다. 본인이 받은 의뢰만 끝내면 나 몰라라 하는 거지요. 우리는 지금 용병입니다. 그리고 현재는 이런저런 문제를 신경 쓸 상황이 아닙니다. 만월의 밤이 오기 전에 방을 잡아야 하고 신탁으로 쫓아올 멍청이들 때문에 그 대비를 해야 하지요. 그리고, 우리 제일 목표는 그거잖아요. 공주님, 완수해야죠.”
아레인이 사람들을 모아 이동 준비를 했다.
“우선 이동부터 하겠습니다. 만월의 밤이 되기 전 도시 안으로 들어가야 하니까요.”
사체를 같이 운반하느라 우리는 꽤 이동이 느렸다. 다행히 도시가 근처에 있어 천만다행이었다. 우리가 도시 성문 앞에 다다랐을 때는 어느덧 해가 기울고 있었다.
“방금 알이 움직였어요.”
“정말요? 어머, 방금 오른쪽 알이 움직인 것 같아요.”
마차에 오르자 들떠있던 라이는 다시 새침하게 돌아갔다. 그러나 알 얘기를 꺼내면 다시 두 눈을 반짝였다. 내 품 안에 검은색의 알 두 개가 얌전히 놓여 있었다. 성문 밖의 검문대는 가고일의 사체로 한창 시끄러웠다.
“의뢰라구요? 이 근처에 가고일이 있었다니…. 좋습니다. 사체는 확인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마차는 뭡니까. 하나는 짐칸, 이쪽은….”
검문소의 경비대라고 생각될 법한 사람이 마차 문을 벌컥 열었다. 나는 그의 목소리가 들릴 때부터 알을 주섬주섬 안 보이는 곳에 챙겨 넣었다.
“이 여성분들은 왜 마차에 타고 있습니까? 용병단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요.”
“이번 의뢰에 요리 담당을 맡은 요리사들입니다만. 저래 보여도 기본적인 검술은 쓴다고.”
루카가 옆에서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파르디 용병단 모릅니까? 우리를 떨거지 용병 나부랭이로 생각하면 곤란한데. 우리는 임무 수행할 때도 꼭 요리사를 고용합니다. 의뢰 중이라고 아무렇게나 먹고 다니지 않거든.”
아레인이 설명해준 파르디 용병단은 프레타스 제국에 본거지를 두고 있는 꽤 유명한 용병단이었다. 고액의 의뢰가 아니면 거들떠보지도 않지만, 한 명, 한 명이 실력자라는 소문 때문에 귀족들에게도 의뢰가 많이 들어오고 행동거지 또한 여타 용병들과 다르게 점잖은 편이라서 스카우트 제의도 많이 받는다고 했다. 그런 유명한 용병단을 사칭해도 되냐 했더니, 암영조가 관리하는 용병단이란다.
“흠, 알겠습니다. 용병패를 보여주시죠.”
나와 라이는 에이솔이 건네준 용병패를 경비대원에게 보였다. 만월의 밤 때문에 도시 안쪽의 거리는 벌써 사람들이 비어 한산했으나 우리가 성문을 통과하고 그 뒤를 계속 쫓아오는 사람들로 인해 왁자지껄해졌다. 다들 가고일을 구경하러 몰려드는 것이었다.
“우리는 먼저 여관으로 이동하도록 하죠.”
다른 이들에게 용병 의뢰소로 가서 가고일을 처리하도록 맡기고 우리는 도시에서 가장 좋다고 추천받은 여관에서 짐을 풀었다.
“지금 우리 목표는 최단 시간 내에 세계수 앞으로 가는 겁니다. 그것을 최우선 목표로 계획을 짜도록 하죠.”
아레인이 테이블에 앉은 이들을 둘러보며 말을 하자 에이솔이 말을 받았다.
“지금 우리한테 걸리는 문제점들이 뭐가 있죠?”
“가고일, 신탁, 그리고…. 폐하십니다.”
에이솔이 생각을 정리하듯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가고일은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았으니 젖혀두고, 신탁도 그걸 믿고 준비해서 수소문해 오는데 시일이 걸릴 거예요. 우리는 그 전에 일을 끝내고 떠야 해요. 다만 공식적으로 신성제국을 방문할 수 없으니 용병단으로 들어가야 하고 세계수 근처에 가는 것도 좀 애를 먹겠네요. 그리고 폐하는…. 하아….”
“폐하께 일정 시간마다 팔콘을 보내기로 했잖아요. 아레인. 그건 어떻게 되었나요?”
팔콘은 전서구의 일종인 맹금류였다. 카샤가 일정 시간마다 소식을 보내라 했으니….
“어차피 신탁 얘기를 듣지 않으실 수 없으니, 우선 폐하께 명령이 하달되기 전까진 용병단 행세를 하며 최대한 들키지 않는 쪽으로 있겠다고 보냈습니다. 그래도 용병단의 인원이 이렇게 많은 이상 신탁을 듣고 쫓아오는 자들에게 추적당하는 건 금방입니다. 빨리 흩어져야 합니다.”
아레인이 라이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저는 아까 말한 대로 돌아가도록 하지요. 지금은 인원을 분산하는 것이 내 일인 듯하니.”
라이가 담담히 말하자 에이솔이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딱 쳤다.
“라이올라 영애도 같이 성도까지 가기로 해요. 그리고 우리는 가고일의 사체도 이곳이 아닌 성도까지 끌고 가는 겁니다.”
“네?”
“그게 무슨….”
에이솔의 발언에 다들 입을 다물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