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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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아까 신탁의 내용 듣고 소름 돋았잖아요. 가끔 시종장님을 보면 저게 바로 연륜인가 싶기도 하고.”
그럴 리가. 테너는 젊어서도 그렇게 철두철미했다고 나디에게 들었다.
“테너가 안배한 일이 뭔데요? 위험한 일 해야 하는 건 아니죠?”
왠지 분위기가 으스스했다.
“우리한테는 그냥 준비운동 같은 거죠. 우선 이동부터 해요.”
에이솔이 씩 웃었지만, 여전히 분위기는 암울했다. 테너는 여러 가능성이 일어날 수 있는 시나리오를 짜두고 대비하고 있었다.
그 중엔 지금처럼 우리가 쫓기는 상황이 될 경우도 있었다. 다들 그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모든 상황에 대비해 준비해야 하는 건 사실이었으므로 군말 없이 따랐다고 한다. 이동 중에 계획을 짜야 했으므로 에이솔과 아레인이 같이 마차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시종장은 이런 일이 있을 때 우리에게 파르디 용병단이 되라 했습니다. 그래서 전부 용병단 패를 지니고 있고, 이 근처에는 가고일이 설친다는 의뢰가 있었으니 안성맞춤이지요. 우리는 가고일을 잡고 용병단으로서 도시에 들어갈 겁니다.”
가고일이라면 책으로 읽은 적이 있다. 내가 알던 곳에서는 없던 생물이라 흥미롭게 읽은 기억이 났다. 굉장히 희귀한 마법 생물로 고대에 존재했었던 드래곤의 하위 종이라고 했다.
“가고일이라면 마법 생물이잖아요. 그걸 죽이라는 의뢰가 들어왔다구요? 서식지가 달라서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알고 있었는데.”
“신성제국에서 들어온 의뢰예요. 그들은 대외적으로는 살상을 꺼리니까요. 아직 피해가 없는데 나서서 가고일을 죽이면 사람들 눈에 안 좋게 비치니까, 혹여나 발생할 골칫거리를 미리 제거하자는 거죠. 의뢰인은 비공개로 해달라고 했지만, 뭐 공녀님이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말씀하실 분도 아니고요. 그렇죠?”
에이솔이 싱글거리며 라이올라에게 되물었다.
“저는 입이 무거우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나저나 책으로만 읽어봤는데 가고일을 직접 볼 수가 있게 되었군요.”
왠지 모험하는 것 같아요. 라이가 마지막은 중얼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지만, 마차 안에서 그걸 못들은 이는 없을 것이다. 애써 숨기려 하긴 했지만 라이는 지금 그녀답지 않게 매우 들떠 있었다.
“미안해요. 이런 일이 처음이라….”
“괜찮습니다. 생각보다 공녀의 담력이 꽤 크시군요. 무서워서 얼어있으신 것보다는 낫습니다.”
나는 아레인의 말에 동의했다. 라이가 무섭다고 떼를 쓸 사람은 아니니 그런 걱정은 할 필요 없었다. 다만, 워낙 성숙한 모습만 보이던 이에게서 저런 천진한 모습을 보니 신기하긴 했다.
“우선 인원이 너무 많습니다. 샬리와 공녀 둘로 나눠야겠어요. 어차피 지금 신성제국으로 들어가도 공녀는 인질 상태가 될 게 뻔하니 다시 제국으로 돌아가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아레인의 말에 에이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고일을 잡은 후 둘로 나누도록 해요.”
“인원은 어떻게 나눌 건가요?”
현재 대충 비율이 친위대 20명, 마법사 20명, 공작가의 가문기사들이 60명 정도였다.
“우리는 눈에 띄면 안 됩니다. 첫 도시에서는 용병단으로 유야무야 넘어갈 거지만요. 대충 30명 정도가 할 수 있는 의뢰를 다시 받고 70명 정도는 공녀님과 함께 다시 제국으로 돌아가도록 할 겁니다. 그편이 자연스럽습니다. 어차피 파르디 용병단들은 개인적으로 움직이는 이들이 많으니 우르르 몰려다니는 게 더 이상하거든요.”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는지 마차는 금방 멈추었다.
“먼저 정찰병들을 보내겠습니다.”
정찰병들이 떠나고 마법사들이 친위대의 갑옷 위로 파르디 용병단의 마크를 환영 마법으로 덮었다. 각자 전투를 준비하고 있는 가운데 나는 내가 우려하고 있는 바를 아레인에게 물었다.
“아레인, 카샤가 지금 이 신탁을 듣게 되면 어떻게 될 것 같아요.”
“아마…. 나오실 겁니다.”
“그가 이 소식을 듣게 되는데 얼마나 걸릴까요.”
“공식적으로 신탁을 듣게 되기까지 하루에서 이틀 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
여기서 마차로 신중하게 그리고 느릿하게 움직여서 일주일이 걸렸다. 마법 통신구는 국가 간에만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공식적인 일이 아닌 경우에는 쓸 수 없었다. 그러니 제국에 신탁이 넘어가기까지 하루에서 이틀.
“큰일이네요….”
“이 얘기는 도시로 들어가서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가 이 거짓 신탁을 듣고 얼마나 화를 낼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국가 간의 전쟁을 부추기는 신탁이다. 나를 가진다고 대륙통일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는데, 이런 거짓을 뿌리고 나면 크리하엘의 신뢰와 명성에 큰 타격이 갈 것이다.
신탁을 내리고 다시 만월의 밤이 찾아온다고 한다. 그 말은 지금 크리하엘이 저런 거짓 신탁을 내릴 정도로 다급하다는 뜻일까. 좋게 해석하면 지금 내가 오는 것을 그가 매우 꺼린다고도 볼 수 있었다. 아레인과 나는 심각한데 에이솔은 여전히 얼굴에 웃음기를 머금고 있었다. 평소 마법사들의 속내는 정말 알 수 없었지만, 지금만큼은 왠지 알 것 같기도 했다.
“에이솔, 우리 가능성이 있나요?”
크리하엘을 상대할 가능성. 에이솔은 더 활짝 미소 지었다.
“지금 이 상황이 그렇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지 않으세요? 전투에서 무리수를 쓰는 건 궁지에 몰린 자들이 쓰는 방법이랍니다. 공주님이 오는 것만으로도 위협이 되는가 봐요. 아, 저기 오는군요.”
정찰병들이 오고 있었다. 그들이 아레인에게 보고 했다.
“가고일의 상태가 이상합니다. 근처에 다른 생물체가 가까이 오면 경계태세일 텐데 바닥에 붙어서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주변에 돌아다니는 토끼를 풀어보았습니다만, 그것에도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죽은 건가? 누가 처리했다는 말은 없었는데….”
“흠, 그사이에 처리했을 수도 있지만 가고일의 사체를 놔두고 갔다는 건 말이 안 돼요.”
“미약하지만 숨을 쉬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더 이상 다가가기 어려워 정확한 판단이 서질 않았습니다만.”
“수고했다.”
“이번으로 가고일 사체는 두 번째인가.”
에이솔은 가고일의 사체를 어디서 본 거야?
“아레인은 가고일을 본 적이 있어요?”
“변경에서 미쳐 날뛰는 가고일을 폐하와 함께 잡은 적이 있습니다.”
“가고일을 잡는데 폐하도 가셨어요?”
“예, 그때는 같이 가지 않는 것이 오히려 위험할 때라….”
아, 황태자일 때 말이구나.
“에이솔은 사체를 어디서 봤어요?”
“제가 본 사체가 아레인 경이 잡은 거예요. 마법 생물이라서 마법 재료로 아주 훌륭하게 썼지요. 아주 귀한 재료라서 아껴 쓰느라 보존마법으로 마법 창고에 고이 모셔져 있답니다.”
으음. 썩 보고 싶진 않아. 그러고 보니 마법사들과 기사들이 전부 흥이 난 것이 보인다. 아무래도 가고일 때문인 것 같다.
“아레인, 정말 위험하지 않나요? 만월의 밤이 오기 전에 잡을 수 있어요?”
“예. 한 번 잡아 본 적이 있으니까요. 마법사분들도 있어서 그때보다 더 수월하게 잡을 것 같습니다.”
“라이와 난 어디에 있을까요?”
“지금은 멀리 계시는 것이 오히려 더 위험하니 근처에 계셔주십시오. 루카를 붙이겠습니다.”
우리는 기사들과 함께 이동했다.
“저게… 저것이 가고일이라는 거군요.”
옆의 라이가 잔뜩 흥분해서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박쥐와 드래곤을 합치면 저런 모양일까. 날개는 박쥐 같았고 생김새는 책에 그려진 삽화에서 보던 모습과 정말 흡사했다. 크기는 꽤 컸다. 등에 사람 두 명은 탈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는 여기서 멈추도록 하겠습니다.”
루카가 아레인의 사인을 받고 멈추어섰다. 납작 엎드린 그것은 기사들이 다가가자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그러나 곧장 공격할 줄 알았던 그것이 도리어 몸을 웅크리며 방어하는 자세를 취했다. 가고일은 공격하는 대신 크게 울음을 터트렸다. 그저 맹렬한 눈으로 그들을 노려볼 뿐 피할 생각도 없어 보였다. 그러나 꼬리를 옆으로 탕탕 내려치는 모습은 꽤 위압적이었다.
“가고일이 어딘가 아픈 걸까요?”
라이올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문을 띄웠다.
“흠, 그러게 말입니다. 행동이 특이하긴 하군요. 미쳐 날뛰던 가고일을 보다가 저렇게 얌전한 가고일을 보니 기분이 이상하네요.”
“루카도 변경에 있던 미친 가고일을 같이 처리했어요?”
“아니요. 그때는 견습으로 따라갔었습니다. 아직 실력이 형편없을 때라서요.”
“두 번 다 보기만 해서 어떻게 해요.”
기사들은 아무래도 호승심이 있을 테니 가고일을 상대해보고 싶을 텐데. 지금은 또 나 때문에 못 나가고 있으니 아쉬운 마음이 들 것 같았다.
“사실 별로 안 내킵니다. 가능하다면 생명은 거두지 않는 쪽이라서요. 저는 꽤 신실한 신자였는데 이번에 크리하엘에게 굉장히 실망했지 뭡니까.”
그가 씁쓸하게 웃으며 친위대원들이 가고일을 상대하는 모습을 구경했다. 아가리를 벌려 울음을 터트려 보았자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아 사정거리에 들어있지 않은 친위대원들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
아레인이 에이솔에게 무어라 말하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솔과 마법사들의 손에서 현란한 마나의 빛이 터지며 가고일을 향해 쏘아졌다. 작열하는 마법을 대량으로 얻어맞은 가고일은 멀쩡해 보였다. 엄청난 고통으로 몸부림칠 줄 알았는데….
“그나저나 저렇게 안 움직일 줄 알았으면 홀드 마법 대신 다른 걸 쓸 걸 그랬네요. 조장님도 미친 것처럼 날뛰던 가고일 생각하고 홀드 마법을 부탁했을 텐데 말입니다. 저렇게 얌전할 줄이야.”
공격 마법이 아닌 움직임을 봉쇄하는 마법을 사용해서 가고일이 저렇게 멀쩡한 모양이었다. 기사들이 각자 자리를 잡고 검을 꺼내어 들었다. 그런데 아레인의 검에서 윙윙대며 울리는 진동 소리가 여기까지 전해져왔다.
“어…. 저게 뭐예요. 루카? 아레인의 검이….”
그의 검에서 푸른 빛이 불길처럼 치솟아 올랐다.
“경지에 통달한 자만이 사용할 수 있는 오러라는 검기입니다. 언제봐도 멋있군요.”
“루카도 쓸 수 있어요?”
그가 멋쩍게 웃으며 뒷덜미를 쓸었다.
“아니요. 저는 아직 그 정도의 실력이 못 됩니다. 우리 제국만 해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다섯 명 정도나 될까요.”
아레인이 사용할 수 있으니 카샤도 오러를….
“폐하도 저렇게 푸른 빛이 나와요?”
“폐하는 붉은색입니다. 굉장히 화려하지요.”
벌써 카샤가 보고 싶었다. 오러도 보여달라고 하고 싶고,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가만히 안고만 있어도 좋을 텐데. 아, 뭘 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지치면 안 되지.
“가고일이 원래 저렇게 공격성이 없나요?”
옆에서 라이가 안타까운 어조로 질문했다.
“제 영역 내에만 들어오지 않으면 공격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긴 한데, 지금은 홀드 마법이 걸려서 아마 움직이지 못해서 그럴 겁니다. 마법이 풀리면 어찌 될지 모르겠지만요. 그런데 아마 그 전에 끝이 날것…. 음. 곧 끝날 것 같군요.”
루카의 말대로 아레인이 오러를 두른 검으로 가고일의 등에 올라타 심장이라고 할 만한 곳을 여러 번 찌르고 있었다. 푸른 불꽃이 일렁이며 등을 뚫고 속을 파헤쳤다. 다른 기사들도 가고일에 상처를 내고 있었지만, 아무렴 저 공격으로 끝이 날 것 같았다.
“이건 허수아비 찌르기보다 쉽군요.”
루카의 말대로 곧 허무하리만치 쉽게, 속수무책으로 가고일은 당하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날카롭게 쨍하는 깨지는 소리가 나며 가고일이 날개를 크게 퍼덕였다.
“헉, 마법이 깨어졌나 봅니다. 제기랄, 공주님 이쪽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