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90
4. 신성제국으로
카샤와 겨우 인사를 끝내고 출발했다. 제도를 빠져나온 뒤 마차 지붕에 화려하고 멋진 장식을 덮어씌운 천을 걷어냈다. 장식된 천을 걷어내자 화려한 마차 두 대와 초라한 마차 세 대가 되었다. 신성제국 크리하엘로까지 가는 길이 결코 안전하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철두철미한 테너는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제도에서 벗어나면 천을 걷어내고 마차를 바꿔 타라고 했다. 내가 탄 마차는 장식 하나 없이 도색만 겨우 끝낸 마차다. 사람들이 제도 거리 내에서 흔히 빌려 타는 것을 볼 수 있는 그런 평범한 마차. 안쪽도 겉처럼 밋밋하긴 마찬가지다.
다만, 앉을 때의 쿠션감은 황궁 마차와 비견할 정도로 푹신하니 좋았고 공간도 넓어 불편함을 못 느낄 정도로 쾌적했다. 마차는 다시 출발했고 덜컹거림도 없이 매끄럽게 길을 나아갔다. 라이올라는 예전보다 말수가 줄었고 더 신중해졌다. 그녀는 황궁에서 출발할 때부터 줄곧 바빠 보였다.
무릎 위에 휴대용 독서대를 눕혀 편지를 쓰기도 하고, 마차를 바꿔탄 지금은 금박이 박혀있는 하늘하늘하고 화려한 고급원단의 망토에 수를 놓고 있었다. 슬쩍 본 그녀의 솜씨는 거의 전문가 수준이었다. 정말 부러웠다.
“라이, 그거 크리하엘로를 상징하는 문양이네요.”
그녀가 싱긋 웃었다.
“맞아요. 일정이 급하게 잡혀서, 그래도 가는 동안이면 완성될 거 같아요.”
실력도 좋은데 손도 빠른가 보다. 더 부러워졌다.
“아까 쓰던 편지는 누구한테 보내던 거예요?”
“유리온 전하요.”
유리온은 다음 대의 교황 후보였다. 우리 약혼식에 축하 사절단으로 왔었고, 그때 라이와 만나 친분을 나눈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쭉 편지로 왕래하며 교분을 쌓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목표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사랑받는 신부가 될 것 같아요. 라이.”
수를 놓던 그녀가 잠시 손을 멈추고 나를 보았다.
“물론, 두 번째 목표가 그거예요. 샬리. 내 사전에 배우자에게 사랑받지 않는다는 건 없어요. 그는 반드시 나를 사랑하게 될 거예요.”
엄청난 자신감이었다. 물론 그 기세만은 높이 살 정도로 그녀는 노력하고 있었고 그 모습은 내가 보기에도 멋있고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사람 마음이 노력만으로 되었다면, 그녀는 진작에 프레타스 제국의 황후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음, 아마 내가 없었다면 정말 그녀가 되었을 것 같긴 하다. 카샤도 그녀에 대한 평가가 나쁘지 않았었으니까.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그가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을까…별로 상상하고 싶지는 않네.
“편지에서 분위기는 어때요? 저번에 들었을 땐 꽤 좋다고 했었던 거 같은데….”
말을 하다 보니 잠시 엘리제가 떠올라 뒷말을 흐렸다.
“물론 아주 좋아요. 편지 상으로는 제게 홀딱 빠져있는 거 같습니다.”
그녀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그렇구나. 둘이 서로 호감은 충분히 오간 것 같고…. 도착해서 둘이 밀고 당기는 거 보는 맛이 쏠쏠하겠는데. 나는 속으로 음흉하게 웃으며 잘되었다 맞장구쳐주었다.
“샬리, 이제 긴장은 좀 풀렸나요?”
긴장하고 있는 거 역시 티 났나 보네.
“라이랑 같이 얘기하다 보니까요.”
일이 잘 풀려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려 긴장으로 바짝 날이 서 있었다. 그래서 마차를 갈아타기 전에 나와 라이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묵묵히 제 할 일을 했고, 나는 불안감에 몸도 목소리도 굳어있었다.
“잘 될 거예요. 우리 둘 다. 행운이 따르고 있으니까요.”
“나한테 행운이 따른다구요? 금시초문인데요.”
필사적으로 버텨온 기억밖에 없는데…. 지금 내가 하려는 일도 운이 좋다기에는 어폐가 있지 않나. 앞으로의 일만 생각해도 위험천만한 일투성이다.
“폐하께 사랑을 듬뿍 받고 계시고 황후가 되는 길도 순조롭게 진행 중이시지요. 샬리의 왕국도 투알린과 합병이 곧이에요.
제국의 지지 아래 영향력 있는 왕국으로 발돋움하겠지요. 크리하엘의 신벌을 받고도 샬리는 멀쩡하고, 폐하께서는 비록 시력을 잃긴 하셨지만, 임시처치도 하신 상황이구요. 아무도 죽지 않았고, 해결 가능성도 있어요. 노력하고 그 보상을 받고 있다면 저는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굉장히 긍정적인 사고방식이긴 한데, 어째 내가 알던 라이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네.
“라이가 그렇게 긍정적인 사람인 줄은 몰랐네요.”
“엘리제는, 노력했지만 보상을 받지 못했어요. 남을 해치는 노력은 행운도 피하는 법이에요.”
“뭐, 해만 끼치다 가긴 했죠. 성자가 할법한 말이네요.”
“저는 이제 교황후가 될 거니까요. 연습해야죠.”
그럼 그렇지. 웬일로 권선징악 같은 말을 하나 했네. 우리는 순조롭게 신성제국에 다가가고 있었다. 라이가 수를 놓는 중간중간 내게 팁도 알려주긴 했는데 남몰래 연습해보다가 때려치웠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뭐, 수 잘 놓는다고 밥 먹여주는 것… 도 있겠지만 나는 아니었다. 전문가를 불러 그들 배를 부르게 해줘야지, 나는 포기했다.
성도에 도착하기까지 이틀 정도 남았을 때, 라이는 망토의 수를 완성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매우 신중하게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이동이 매우 느렸다. 그 사이 그녀가 수를 완성한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완성하고도 꼼꼼하게 살필 시간까지 있었다.
도시나 마을에 들르기 전엔 항상 정찰대가 먼저 가서 주변 분위기를 먼저 살핀 후 괜찮다는 사인이 돌아와야 그곳에 묵었다.
적어도 경로상 앞의 두 경유지 정도는 정찰조가 먼저 방문했다. 이동 중에는 정보를 얻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제 성도만을 남겨둔 상태에서 우리는 제일 가까운 도시에 묵을 예정이었다. 성도와 가까워질수록 도시의 형태를 띠며 거리는 깨끗하고 발전된 모습을 보였다.
“가까운 도시가 이 정도인데 성도는 정말 볼만하겠는데요.”
라이가 창문 밖으로 고개를 빼꼼히 내밀며 들뜬 모습을 보였다. 오면서 라이의 새로운 면을 참 많이 발견한다 싶었다. 티타임 중엔 언제나 성숙하고 느긋한 면만 내게 보여왔었는데. 그녀의 말대로 아직 도시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성문 앞은 입구부터 그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라이가 망토에 수를 놓았던 것과 같은 화려한 크리하엘로의 문양이 양각되어 있었고, 그 주변은 대리석을 이용한 크리하엘의 조각상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정찰대가 돌아왔나 봐요.”
한참 밖을 구경하던 라이가 고개를 다시 집어넣고 새침을 떨며 자세를 바로 했다. 그 모습이 꼭 국외 여행을 처음 하는 사람 같았다. 제냐크 공작가면 여기저기 많이 다녀 보았을 것 같은데.
“여행 많이 다녀봤어요, 라이?”
“국외로 나가는 건 처음이에요.”
저렇게 호기심이 넘치는데 국외 여행은 처음이라니, 리노아는 자유분방해서 그런지 몰라도 꽤 국외 여행을 자주 다니는 것 같던데. 샬리오니만 해도 웬만한 왕국은 공적이든 사적이든 많이 다닌 거로 알고 있다.
우리가 여행을 주제로 수다 꽃을 피우려는데 누군가 마차 문을 두드렸다. 정찰병이 돌아왔나보다 싶어 문을 열었다. 아레인이 미간을 찌푸린 채 다급한 표정으로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샬리, 대피해야겠습니다. 크리하엘이, 하아…. 크리하엘이 말도 안 되는 신탁을 내렸습니다.”
“대체 무슨 일인데요?”
“우선 편한 복장으로 옷을 갈아입으십시오. 장식 없는 평범한 옷이어야 합니다.”
그는 다급하고 초조해 보였다. 크리하엘이 또 뭔 일을 벌였나 보다.
“알겠어요.”
테너는 만일에 대비해 나디에게 평범한 여행용 짐을 따로 준비하게 했다. 이런 일이 있을 거라 예상한 것은 아니겠지만 준비성 하나는 정말 철저했다. 물론 라이도 그리 하도록 권고받았었다. 아레인이 빠르게 멀어진 뒤 에이솔과 시녀 몇이 다가왔다.
“공주님, 공녀님. 환복하시고 나면 외모를 바꾸는 마법을 사용할 거예요.”
우리는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빠르게 옷을 갈아입었다. 헐렁한 셔츠에 바지, 그리고 가죽 부츠. 전형적인 여행자의 복장이었다.
“두 분 다 이쪽으로.”
에이솔을 우리 둘을 검은 머리칼로 바꾸고 외형도 평범하게 만들었다. 라이와 나는 자매 같았다.
“무슨 일이에요.”
“크리하엘이, 신탁을 내렸습니다. 샬리오니 공주님을 얻는 자는 대륙을 통일하게 될 거라는 말도 안 되는 신탁을 말이에요. 아마 그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나가 신탁을 믿는 멍청이들이 공주님을 노리게 될 거예요. 타이밍 맞춰서 공주님이 제국이 아닌 허허벌판에 무방비하게 있는 지금 말이죠.”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어갔다.
“그렇게 전쟁, 전쟁하더니 기어이 나를 잡고 늘어지네요. 성도에는…. 못가겠군요.”
“거긴, 지금 제일 위험한 곳 1순위로 변했죠.”
“마법사님, 그럼 우리는 어디로 가게 되나요?”
라이올라가 입술을 깨물고 초조한 낮으로 물었다. 코앞에서 보상을 놓친 기분이리라. 크리하엘의 대륙 간의 전쟁을 유발하는 저 엄청난 발언은 나로 인한 것인지라 라이에게 미안해졌다.
“아직 장소는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이제 공주님과 공녀님을 나타낼만한 드레스와 장신구들을 모조리 모아오세요. 불태워서 소멸시킬 거예요. 몇 벌만 빼고요.”
에이솔은 남은 몇 벌의 드레스들을 시녀와 하녀들에게 입혔다.
“에이솔…. 혹시 그들을 희생하는 건가요?”
“그들은 본연의 임무를 하는 것뿐입니다.”
에이솔이 단호한 목소리로 내 말을 받았다. 나와 라이의 드레스로 갈아입은 시녀들이 내게 다가왔다.
“공주님, 부디 무사히 폐하의 품으로 돌아가십시오.”
내가 무어라 말할 새도 없이 그들은 내게 짧게 인사하고 화려한 마차에 올라탔다. 모든 것이 매우 빠른 속도로, 일사불란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 행렬에 따라온 인원을 둘러보았다. 최정예 친위대원들과 마법사들, 그리고 헨리와 블레인, 제냐크 가문 소속의 기사들이 이 행렬의 구성원이었다. 화려한 마차는 벌써 출발했고 그 뒤를 공작가의 기사들이 조금 따라붙는 것이 보였다.
“공주님, 곧 다시 만월의 밤이 온다고 합니다. 아마 크리하엘이 제대로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다시 무리하게 신탁을 사용한 것 때문인 듯합니다. 그나마 그게 희망이에요. 우리를 노리는 이들 또한 발목이 묶여 버리니까요.”
“우리도 적은 인원이 아닌데….”
“공주님, 우리는 제국의 최정예예요. 떨거지들이랑 비교하시면 곤란합니다.”
에이솔이 싱긋 웃었다. 신성제국의 성기사들을 떨거지라 칭하기엔 무리가 있지 않나 싶었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나와 라이가 외모를 바꿔도 이 많은 인원을 뭐라고 할 거예요? 인원이 적어도 백여 명…. 무어라 속일 수 있는 인원이 아니잖아요.”
“음, 그것은 시종장님이 준비해주셨는데요. 아 참, 공주님은 먼저 준비하신다고 자리를 비우셔서 뒷부분은 못 들으셨겠네요.”
테너가 또 뭔가를 준비해 두었다고?
“이 근처에 지금 사람을 비롯해 개미 한 마리도 안 보이지 않나요? 도시가 가까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에요.”
그러고 보니, 길 한가운데가 영 조용했다.
“아까 마차는 한 번 지나갔는걸요. 하지만 확실히 사람은 한 명도 안 보이는군요. 벌레 또한….”
주변엔 흔한 풀벌레 한 마리조차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