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89
* * *
“그래도 혹시 모르는 거니까 한 번만 확인해 봐요.”
그가 얼굴 위로 부드러운 표정을 띄웠다.
“그대가 원한다면.”
“카샤, 왜 그렇게 평안한 거예요. 정말 궁금해서 그래요.”
지금 그는 시력도 잃고 깨어있는 시간도 일반인보다 현저히 적었다. 무리해서 깨어있다가 쓰러지기 일쑤였다. 나 같으면 고치고 싶어서 백방으로 알아볼 것 같은데. 정작 안달 난 사람은 당사자가 아니라 주변인들이었다.
“말한 것 같은데. 그대만 내 옆에 있으면 돼.”
“그래도 가능성이 있는 건 다 시도해 보면 좋잖아요.”
그가 잠시 침묵하더니 나를 끌어안았다.
“샬리.”
“네.”
“그냥 내 곁에만 있어. 아무것도 하려 하지 않아도 된다.”
당신 눈만 고치고 나면 나도 천하 태평하게 살 거예요.
“그렇게 할게요.”
“그러면 신성제국으로 가는 추천인은 내가 다른 사람을 알아보도록 하지.”
아니, 얘기가 또 왜 그렇게…. 기껏 화제를 돌렸다 했더니.
“카샤. 내가 가지 않으면 의미가 없잖아요. 아직 황후도 아니라서 더더욱 내가 가야 해요.”
그가 한숨을 내쉬더니 내 볼을 꽉 꼬집었다.
“아야!”
그가 꼬집은 볼을 살살 문질렀다. 병 주고 약 주고도 아니고.
“가끔 그대가 고집부리면 나도 못 이기겠다. 그럼, 이건 내 말대로 하지. 보니가 내 눈 치료를 위해 올 때 그대는 거기 없었으면 좋겠군.”
“치료하는데 내가 옆에 없다니요?”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위험할지도 모르니 다른 곳에 있어.”
“아니…. 지금 만월의 밤이라 위험하지도 않고, 같이 있으면 위험이 덜 할 거….”
“그대가 있으면 내가 신경 쓰여서 안 된다. 지금 나는 앞도 안 보이지 않나.”
보니도 보지 못한 지 오래되었고, 분명 상처받았을 텐데, 말 한마디 못하고 보는 것도 안 된다니….
“…….”
“신성제국에 가든지, 보니를 보든지 둘 중 하나만 해. 나는 둘 다 반대지만 한 가지는 선택할 수 있게 해주겠다.”
“…….”
둘 중에 하나만이라니, 신성제국에 가는 건 필수다. 보니를 포기해야 하나…. 내가 계속 말이 없자 그가 부드러운 어투로 달래듯 말했다.
“고집은 하나만 들어줄 거야. 이만하면 나도 많이 양보하지 않았나.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을 하나는 눈감아주겠다는데.”
“…신성제국에 갈게요.”
하나는 들어주겠다더니 그는 내 말에 미간을 찌푸리며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어차피 묶어 놓으면 어디에도 못 가는데…. 그건 싫지?”
“농담하는 거죠?”
“끈은 길게 풀어두겠다. 충분히 이 방을 활보하는데 문제없을 거야.”
시력을 잃고 나서는, 마냥 농담 같지 않은 그의 집착이 갈수록 심해지는 것 같았다.
“방 밖에도 못 나가요? 됐어요. 난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싶어요.”
농담은 그만하라는 말이었는데 그는 진지해졌다.
“그럼 황제궁 안까지만, 마법사들을 달달 볶으면 아마 끈 없이도 황제궁 안으로는 얼마든지 돌아다닐 수 있을 거다.”
빨리 카샤의 눈을 고쳐야 할 것 같다. 더 심해지기 전에…. 나는 재빨리 화제를 전환했다.
“보니는 그럼 언제 볼 거예요? 결정한 김에 오늘은 어때요?”
“나보다 그대가 더 급해 보이는군. 그럼, 오후 늦게 보도록 하지.”
부디 보니가 카샤를 치료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마음 놓고 신성제국에 다녀올 수 있을 텐데.
* * *
그가 치료받는 곳을 따라가지도 못하고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근처에서라도 기다리려고 했는데 아레인이 고개를 저었다.
“응접실에서 기다리시라고 합니다.”
“공주님, 자수 연습하시겠어요?”
크리하엘의 충격에서 돌아온 티나가 내게 자수를 권하길래 마지못해 받아들었다. 티나가 공주님 두 분 다 좋다고 했으니 내가 다른 사람이라는 부분은 자연스레 넘어갔다.
“티나, 이번에 신성제국에 가는 거 티나는 가지 않는 게 좋겠어.”
만약 또 크리하엘을 보게 된다면 쓰러질지 모르니까. 걱정되니 안 데려가는 것이 훨씬 나았다.
“저 이제 괜찮아요. 공주님. 원래 사람은 점점 단련된다고 하잖아요. 그런 일을 겪었으니 이제 웬만한 건 끄떡없어요.”
“글쎄, 한번 생각해보자.”
본인은 괜찮다고 하는데 내가 걱정되니 못 데려가겠다. 카샤도 날 보면 이런 마음이려나. 초조한 마음으로 자수를 놓으니 안 그래도 못하던 자수가 더 엉망이었다.
“날이 갈수록 솜씨가 일취월장하시는 거 같아요. 어쩐지 예전 공주님과 다르게 손재주가 좋으시다 했는데 말이에요. 번개가 너무 멋져요. 표현력도 좋으시구요. 폐하께 드릴 거죠?”
손수건에 민들레를 수놓고 있었는데 번개라는 오인을 받았다. 자수에서만큼은 샬리오니와 내 실력이 별다를 것이 없을 듯하다. 괜히 심통이 나서 자수를 밀어버렸다. 카샤가 빨리 오지 않는 것도 한몫했다.
“아레인, 상황이 어떤지 한 번 보고 올래요?”
“샬리를 지키는 것이 제 임무입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카샤 옆에 수족처럼 붙어있던 시종 한 명은 여기 두는 건데. 가만히 있질 못하고 이리저리 응접실을 휘젓자 티나가 그러면 더 불안하지 않냐고 점잖게 앉아서 기다리라고 한다.
“푸딩이라도 내오라고 할까요?”
잠시 움찔했지만, 푸딩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머, 오시나 봐요.”
밖에서 여러 명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나 스스로 문을 벌컥 열고 바깥으로 튀어나갔다. 그곳에서는 카샤가 위풍당당하게도 친위대와 마법사들을 뒤로 거느린 채 곧장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 그 옆에 수족 같던 시종들은 조금 떨어져 있었다. 설마설마했는데, 정말 고친 건가?!
기쁜 마음으로 달려가자 그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멈추지 않고 달리는 기세로 그대로 그의 품 안에 파고들었다. 잠시 뒤로 밀리는가 싶던 그가 다시 자세를 잡고 나를 마주 안았다.
“샬리, 나오지 말고 기다리라고 했을 텐데.”
“폐하가 오셨으니 이제 상관없잖아요.”
나는 고개를 빼고 그의 얼굴을, 정확히는 눈을 마주했다. 미묘하긴 하지만 카샤의 눈동자가 제대로 돌아온 것이 보였다. 정말 치료했나 보다. 보니가 정말 대단한데?
“공주님, 기대하고 계시는 것 같아 죄송하지만 치료하지 못했습니다.”
에이솔이 미안한 표정으로 내게 말을 건네었다.
“네? 하지만 지금 폐하의 눈동자가, 그리고 도움 없이도 잘….”
기쁨으로 흘러넘치던 마음이 한순간에 나락으로 고꾸라진 것 같았다.
“보니도 크리하엘의 신력을 없애지는 못했습니다. 대신, 응급처방을 할 수는 있었어요.”
“어떤 처방이요?”
“크리하엘의 신력을 보니의 것으로 감싸서 억누르는 방법이에요. 크리하엘에겐 통하지 않지만, 보니한텐 제 마법이 통하니까요. 그래서 마법으로 폐하의 눈동자를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게끔 덮어씌웠습니다. 보시는 것은 진짜가 아니라 가짜예요.”
“그럼, 폐하…. 여전히 앞이 안 보이는 거예요?”
“완전히는 아니지만 대충 윤곽 정도는 보인다. 아주 흐릿하게 사물 구별 정도는 할 수 있을 정도야.”
“보니의 신력이 크리하엘의 신력을 미약하게라도 억누를 수가 있었어요. 그래서 대충은 보이신다고 합니다.”
어쩐지 나를 마주 보는 그의 시선이 묘하게 빗나간 것 같다는 느낌을 받긴 했는데 그래서 그런 모양이었다. 아예 고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정도도 어딘가 싶어 실망감을 애써 내리눌렀다.
“그럼 보니, 구속구 해제하고 한 거예요?”
“음, 네. 그랬죠. 바로 구속구를 채울 수 있도록 옆에서 여러 명이 대기하고 철저히 준비한 후 했어요.”
“그럼 나 이제 보니를 만나봐도 되나요?”
이 분위기면 보니를 만날 수 있겠다 싶어 물어보았다. 카샤가 손짓으로 주변을 물렸다. 그는 한숨을 쉬더니 나를 응접실로 이끌며 말했다.
“아니, 절대 안 돼.”
“만월의 밤이니 크게 위험하지 않잖아요. 카샤도 조금 전까지만 해도 도움받았고.”
그가 내게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샬리, 미안하지만 그것만은 안 된다. 타협 불가야.”
전혀 미안하지 않은 표정인데.
“왜 나만 안 되나요. 다른 사람들은 다 보는데.”
“감시하는 몇 명뿐이야.”
“그럼, 티나라도 보니를 보게 해주세요.”
티나를 통해서 편지와 먹을거리를 전해주어야겠다. 혼자서 심심할 테니 책도 넣어주고….
“그대가 이 이후로 보니를 볼 일은 없을 테니 그만 잊는 것은 어떤가.”
“네?”
이게 대체 무슨 소리람?
“크리하엘 때문에 보니를 보는 것은 평생 금지야. 곧 다른 곳으로 보낼 참이다.”
이건, 마치 보니를 이용할 대로 이용하고선 내치는 것처럼 보이지 않나. 샬리오니를 성불시키고 엘리제의 망령까지 없애느라 아이가 얼마나 고생했던가. 지금은 카샤의 눈에 대한 불편도 덜어주었는데 보니에 대한 처사가 너무했다.
“알겠어요. 보니 보겠다고 안 할 테니까 다른 곳으로 보내지만 마세요.”
그는 말없이 나를 당겨 안아 등을 쓸어내리기만 했다.
* * *
만월의 밤이 3주째에 접어들어 완전히 끝이 났다. 아무래도 이번에 강림해 힘을 사용한 것이 크리하엘에게 타격이 꽤 컸나 보다. 크리하엘이 강림한 건에 대한 것은 관련된 이들 외엔 누구도 몰랐다. 모르는 이들은 저마다 신이 노하셨니, 크리하엘이 쇠락하였니 하며 의견이 분분했다.
황제의 건강이 완전히 회복했다고 공표하며 들썩이던 정계도 다시 안정되었다. 나는 라이올라와 함께 오늘 신성제국으로 출발한다.
중간중간 그가 무던히도 가지 못할 핑계를 대며 방해했지만, 어찌 다 물리치고 나와 라이올라는 크리하엘로로 향하는 마차 앞이었다. 아직 내가 황후가 아니라서 제국의 추천서에는 황제의 인장이 찍혀있었다. 카샤가 계속 찍어주지 않으려 해서 이걸 받는데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바로 와야 해. 정말 얼굴만 내밀고 와야 한다.”
내가 가는 걸 막지 못한 카샤가 자신도 따라가겠다 해서 다시 주변을 식겁하게 했다. 그러나 그가 눈을 잃은 동안 밀린 일들과 더불어 아직도 제대로 눈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일 처리 속도가 매우 느렸다. 테너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말리고, 주변에서도 모두 아니 된다고 곡소리를 내니 카샤는 더 이상 따라가겠다고 억지를 쓸 수 없었다.
다만 몇 시간 간격으로 끊임없이 내게 빨리 오도록 머릿속을 주입하다시피 했다. 빨리 오지 않으면 찾아가겠다, 외로워서 죽어가고 있을 거다 등 단어사용은 매번 바뀌지만 하는 내용은 항상 같았다.
“그렇게 할게요.”
그가 미련을 버리지 못한 얼굴로 내 귀에 속삭였다.
“내가 돌아버리면 그대 때문이다. 제국을 망친 희대의 악녀가 되기 싫으면 빨리 돌아와야 한단 말이다.”
그도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말인지 아니까 이렇게 귓속말을 하는 거겠지?
“당신이 돌아버리기 전에 빨리 올게요. 부디 제국을 온전하게 지켜주세요.”
스스로한테서요. 나도 마주 귓속말을 하고 그대로 마차에 올라섰다. 창문 밖에서 카샤가 퉁명스러운 어투로 중얼거렸다.
“하아…. 그대가 이렇게 미울 수가 없군. 말도 안 되게….”
그가 세상이 떠나갈 것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라이올라가 나를 빤히 보자 내가 다 민망했다. 벌써 카샤 때문에 출발이 한참 지연되었다. 다들 황제라서 말을 하지 못하고 있을 뿐. 같이 차출된 친위대와 마법사들은 지겨움을 숨긴 채 여전히 각 잡고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