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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88화 (88/97)

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88

* * *

“들여라.”

방문 넘어 들어온 테너의 얼굴이 말도 못 하게 핼쑥했다.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모습이었다.

“폐하, 걱정했….”

테너의 두 눈이 한순간 두 배로 커졌다. 나를 돌아보는 그에게 차마 카샤가 시력을 잃었다고 말할 수 없었다.

“테너, 입단속할 수 있는 시중인 둘만 빼고 나머지는 전부 내 거처에서 다 빼도록.”

“어찌 된 일입니까… 눈은 왜 감고 계시는지요. 제가 생각하는 그것이 맞습니까?”

테너가 카샤를 걱정이 가득 담긴 눈으로 살폈다. 나는 그가 쓰러지지나 않을지 조마조마해졌다. 어느새 아레인도 창백해진 얼굴로 옆에 섰다.

“폐하, 그것 때문입니까. 크리하엘의 신력을 맞아서….”

아레인이 차마 말을 끝맺지 못하고 뒤를 흐렸다.

“맞다. 테너, 나디를 불러 샬리의 짐을 이곳으로 들여. 보안을 최대로 해야 한다. 외부 시중인은 황제궁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해. 그리고 아레인, 루이를 불러서 암영조 위치를 다시 짜야겠다.”

카샤는 테너와 아레인이 그의 실명을 받아들일 시간조차 주지 않고 서둘러 명을 내렸다.

“눈을 잠시 떠보십시오. 폐하.”

그의 희어진 눈동자를 본 테너와 아레인이 탄식했다.

“궁의가 치료할 수 있겠습니까,”

“궁의는 절대 안 된다. 그 외에는 괜찮으니 수선 떨지 마라.”

실명이라는 무척 큰일을 겪었음에도 그는 태연하게 말을 받았다.

“폐하, 고작이 아닙니다. 무려… 무려….”

테너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더 이상 놔두었다가는 정말 쓰러질지도 모른다.

“샬리에게 들었다. 쓰러졌다지? 우선 내가 내린 명만 수행하고 쉬도록 해. 그대가 제대로 회복되어야 내가 일을 맡길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저는 일찌감치 회복되었습니다.”

테너가 고집을 부리자 카샤가 한숨을 쉬었다.

“좀 더 몸을 사려, 나는 그대가 내 곁에 오래오래 머물러주길 바란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테너가 마지못해 예를 갖춰 인사를 하고 방에서 나갔다. 그 뒤로 찾아온 방문자들은 처음에는 놀랐다가 다음은 혼란스러웠고 마지막은 당황했다. 헨리와 블레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그럴 것이 황제의 실명은 엄청나게 큰 사안인데도 불구하고 말해주는 사람이 아무렇지 않은 듯 얘기했으니 말이다.

“황궁의 보안을 강화하는데 제가 필요한 이유는 알겠습니다만,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왜 그렇게 멀쩡하십니까. 타격이 하나도 없으신 것 같습니다.”

헨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루 종일 앞날만 걱정하고 있으면 달라지는 거라도 있나? 그렇게 하면 묘책이 나오냔 말이다.”

“뭐, 그건 그렇습니다만….”

“언제까지 숨기려 하십니까, 정사를 오래 돌보지 않으시면 의심받습니다.”

블레인이 심각한 얼굴로 턱을 쓸었다.

“최대한 늦게,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 그리고 보조관 중 한 명을 승작시켜야겠어. 누가 좋겠나.”

카샤는 급하고 중한 사안만 빠르게 받아 진행했으며 대부분을 응접실에서 처리했다. 그는 오후에 지금껏 밀려있던 국사 회의를 열었고 대신들과 그의 사이를 가리는 파티션을 설치했다. 아직 완전한 회복이 아니라고 알렸지만, 여전히 그가 건재하다는 것은 알려야 했기 때문이다.

회복된 황제를 보나 싶었던 대신들이 어리둥절하며 왜 가리냐는 말에, 카샤가 네놈들 얼굴이 꼴 보기 싫어서라고 답해 회의장을 침묵에 잠기게 했다고 들었다. 그리고 눈 외에는 괜찮은 줄 알았던 카샤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느지막한 오후였다.

카샤는 다시 쓰러졌다. 하루 중 카샤가 깨어있는 시간은 10시간도 채 되지 않았다. 그는 필수불가결하게 지금껏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는 오침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저녁까지 그가 버티지를 못했다. 아마도 신력의 영향 때문인 듯했다. 나는 그가 오침에 든 모습을 보고 침실을 빠져나왔다.

밖에서는 아레인이 대기 중이었다. 카샤는 분명 내가 신성제국으로 넘어가는 것을 내켜 하지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내가 무엇 때문에 가는지 알게 되면 더더욱. 카샤 모르게 계획을 짜려면 이렇게 그가 잠든 뒤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 전엔 매번 붙어있다시피 하니 말이다.

“공주님, 오셨어요. 기다렸답니다.”

“황궁에 이제부터 매일 들러야겠습니다. 디저트에 중독되었지 뭡니까.”

그곳에는 에이솔과 헨리, 그리고 블레인과 테너와 라이올라 공녀가 있었다. 테너에게도 진작 의견을 구할 생각이었으나 때마침 쓰러져, 뒤늦게 물어보았다. 그는 부디 폐하를 도와달라며 나를 붙잡고 눈물을 쏟았었다. 그리고 내가 가는 이유를 알게 되면 카샤가 나를 보내주지 않을 거라는 것에 그도 동의했다.

나는 라이올라를 바라보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었다. 그녀는 엘리제를 극복했고, 나를 도와주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이번에는 정말 그녀가 필요했다. 정확히는 신성제국에 가는데에 그녀가 구실이 되어 주었다.

“오늘은 다른 할 얘기가 있어요. 보니 말인데….”

나는 보니가 카샤의 눈을 치료할 가능성을 짚어주었다. 하지만 에이솔은 고개를 저었다.

“그때 신관이 그랬잖아요. 오직 크리하엘만이 그 신력을 없앨 수 있다고요. 아마 보니도 할 수 없을 거예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있으면….”

“정말 가능성이 없습니까?”

테너까지 합세하자 에이솔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묻는다면 딱 아니라고 답할 수는 없죠, 언제나 변수는 일어나니까요. 하지만 그 위험을 감수할 정도의 가능성이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럼 보니의 구속구를 풀지 않고 가능한지만 먼저 물어보도록 해요. 구속구를 차도 가능 여부는 알 수 있을 거예요. 만월의 밤이 계속되고 있으니 분명 크리하엘이 강림할 가능성은 현저히 낮을 테고요.”

“사실 저도 위험성만 없다면 시도해보고 싶기는 한데, 두 분은 어떻게 생각해요?”

나와 테너가 간절한 낮으로 보자 에이솔이 헨리와 블레인에게 의견을 구했다.

“아마 폐하께서도 흔쾌히 허락하실 겁니다.”

“만월의 밤에는 확실히 위험성이 줄어들긴 할 테니, 시도해보는 것이 좋겠군요.”

둘이 찬성의 표를 던졌다.

“이제 보니가 치료에 실패했을 때를 대비한 다른 계획을 세워보도록 하죠.”

* * *

내가 황제궁으로 돌아오자 카샤는 아직 잠에 빠져 있었다. 이렇게 나가 대책을 마련한 지 벌써 삼 일째였다. 침대에 곤히 잠들어 있는 그의 옆으로 파고들자 그의 온기가 나를 따뜻하게 감싸 안았다. 불안했던 마음이 녹으며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그렇게 잠시 있는데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샬리, 어딜 갔다 온 거야.”

깨어 있었나 보다. 그의 목소리는 왜인지 굳어있었다.

“아, 라이올라 공녀와 티타임을 가졌어요.”

어쨌든 거기에 라이올라가 있던 것도 사실이니까….

“티타임을 매일 한다고? 요 며칠 계속 이 시간에 나가지 않았나.”

나는 속으로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가 잘 때 몰래 나왔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는 다 알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내가 매일 나가는 거….”

“불안하니까. 언젠가는 못 버티고 떠난다고 할까 봐, 옆에 그대가 한시라도 없으면 미칠 것 같거든. 그런데 이제 못 물러. 그대는 내 옆에 있기로 약속했고, 도망가면 그곳이 어디든 쫓아가서 잡아올 거니까.”

어쩐지 그가 오침을 가지고도 일찍 잠든다 해서 걱정했더니 낮에 잠을 자지 않고 있어서 그런 거였다.

“당신이 그렇게 불안해할 줄 몰랐어요. 그럼 이제 말하고 나갈게요. 라이올라가 저번에 내가 사교계에서 입지를 다지고 황후가 되는 데에 도움을 주는 대신 추천서를 써달라고 한 거 기억나요?”

나는 약혼 후 그에게 라이올라와 나의 거래에 대해 알려주었었다.

“그래서?”

“이번에 써주려고 해요. 그 추천서. 그래서 지금 매일 만나서 계획을 조율하고 있어요.”

이것도 어느 정도 일부분은 사실이니까. 나는 속이 뜨끔 하는 걸 감추며 목소리에 긴장을 풀었다.

“아직 그대가 황후가 되지 않았는데 벌써 써준다고?”

“지금 리노아가 빠른 속도로 투알린을 흡수하고 있잖아요. 이대로 가면 투알린이 곧 합병되니까 추천서 세 곳을 쓰려면 그 전에 해줘야지요.”

“그대는 너무 물러. 추천인은 다른 이를 보내도록 하지.”

“대신할 사람이 없어요. 오라버니는 지금 합병 때문에 바쁘고 투알린에는 사람이 없잖아요. 저 말고는….”

“지금 이런 나를 두고 가겠다고…?”

그가 나를 꽉 끌어안으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얼굴만 비추고 금방 돌아올게요. 이제 나 없어도 잘하잖아요. 시종이 옆에서 도와주고 있고.”

이제 내가 곁에 없어도 그의 전담 시종 두 명이 손발이 되어 움직여주고 있었다. 내가 신성제국에 가는 대외적인 이유는 충분히 납득가는 상황이었으므로 그들에게 꿍꿍이를 의심받을 거리가 없었다.

라이올라에게 제국과 왕국의 인장이 찍힌 추천서를 써주고 나는 그 추천인으로서 참석한다. 그리고 겸사겸사 몸이 아픈 카샤의 병환을 신에게 빌어 완쾌를 목적으로 세계수에 성지순례를 간다는 명목이었다.

“가지 마라. 그 추천서 그냥 써주지 마. 다른 선물을 주겠다고 해.”

“한 입 가지고 두말하는 게 어디 있어요. 황궁의 신뢰도가 하락해요. 제냐크 가문이면 그래도 든든한 중립이잖아요.”

“…말도 안 돼. 정말 가겠다고? 나를 두고….”

그가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하며 내 양심을 콕콕 찔렀다.

“내가 알아보지, 다른 이를 보낼 수 있는지.”

“안 돼요! 아… 왜냐하면, 저 신성제국에 한번 가보고 싶어서 이참에….”

내가 핑계를 대자 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흠, 그대가 신성제국에 관심이 있는지는 몰랐는데, 아 우리 약혼식 날 교황 후보가 왔을 때 꽤 관심을 가진 것 같긴 했어.”

“라이올라와 결혼할 사람이니까요! 딱 그 정도의 관심이었어요.”

그가 내 뺨을 느릿하게 쓸었다.

“샬리,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제 못 놓아줘. 도망가면 내 곁에 평생 가두고 바깥에는 못 나가게 할 거야. 그대가 평생 볼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겠지.”

그가 무감하고 서늘한 어조로 말했다.

“얼굴만 비추고 올 거예요.”

정말로요. 진짜예요. 까지는 양심상 차마 덧붙이지 못했다.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아까는 신성제국을 구경하고 싶다더니.”

“잠시 보고 오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내 뺨을 쓸던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절대로 얼굴만 비추고 오는 거야. 그대가 결혼할 사람이 누군지 결코 잊으면 안 돼.”

“그렇게 할게요.”

그가 내 이마에 키스하더니 다시 한숨을 내비쳤다.

“하아… 불안해 미칠 것 같다. 그냥 가지마. 내 눈이 되어준다고 하지 않았나.”

“…….”

화제를 돌려야겠다 싶어 안 그래도 오늘 중으로 말하려고 했던 보니의 건을 물었다.

“카샤, 보니 말인데요.”

“그 아이는 왜?”

카샤는 보니가 본인 방에서 구금 중이라는 걸 보고받았지만 무슨 생각인지 딱히 가타부타 얘기가 없었다.

“혹시나 보니가 당신 눈을 고칠 수도 있을지 모르잖아요.”

“그럴 가능성은 현저히 낮다고 하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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