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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87화 (87/97)

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87

* * *…

“앞이… 안 보인다구요?”

내가 말을 뱉어내고도 무슨 말을 한 건지 잠시 멍했다. 그리고 그를 보기 위해 허리에 감긴 팔을 풀었다. 이번에는 그가 순순히 팔에서 힘을 뺐다. 자리를 위쪽으로 이동해 본 그는 눈을 감고 있었다.

“눈, 한 번만 떠 봐요.”

이런 거로 장난할 사람은 아니었다. 그의 눈언저리를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쓸었다. 손가락이 잘게 떨려서 거두려는데 그가 내 손을 잡아채고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 했어도, 소리는 들을 수 있으니까. 나는 다른 손으로 내 입을 가렸다. 표정은 감추지 못했어도 소리는 막았다.

그의 눈은 보니 몸에 신이 강림했을 때처럼 눈동자가 사라지고 전부 희었다. 밝은 밤하늘 같던 그의 남청색 눈동자가 신력에 의해 보이지 않았다. 내가 말이 없자, 그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그리고 희었던 두 눈은 다시 눈꺼풀에 가려 사라졌다.

“말을 하기 힘들 정도로 흉한가 보군. 아까 말한 건…. 빈말이 아니니까….”

“당신을 떠나도 이해한다는 거요?”

“…….”

왜 내가 당신이 시력을 잃은 것만으로 떠난다고 생각하는 거지.

“나는 당신을 떠날 수 없어요. 크리하엘 때문에 손발이 잘려 사지 불구가 된다고 해도 마찬가지예요. 내가 당신의 눈이 되어주면 되잖아요.”

“샬리….”

“나는 이제 당신밖에 없어요.”

나는 그의 눈꺼풀 위로 키스했다. 한 번, 두 번. 멈추고 싶지 않았다. 눈을 감고 내 입맞춤을 가만히 받는 그의 모습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애가 탔다. 내가 눈 키스를 멈추지 않자 그가 나지막이 웃음을 흘렸다.

“이런 절망 속에서도 그대의 애정을 듬뿍 받으니 기분 좋은데.”

“왜 절망적이에요, 내가 다시 앞을 보게 해줄게요.”

시일이 얼마가 걸리더라도 세계수의 뿌리까지 뽑아버릴 테니까.

“그대만 곁에 있어 주면 앞이 보이지 않아도 상관없어.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당신은 내 곁에서 불편하겠지.”

“내가 왜 불편할 거라고 생각해요.”

“분명 아름답게 치장했을 그대의 모습을 보고도 이제 더 이상 예쁘다 해줄 수가 없어.”

나를 뭐로 보고, 그런 몇 마디 못 들어서 불편할 리가 있나.

“진심으로 하는 소리 아니죠?”

“그러게, 상상 속에서도 여전히 이쁜데 이건 예시로 들기엔 맞지 않았군.”

지금 이 상황에서 농담이 나오나? 내가 허탈한 표정을 짓기도 전에 그가 씁쓸한 웃음을 내비쳤다.

“내가 원하지 않아도 헛손질하거나 헛발질하는 모습을 그대에게 보이겠지. 그대가 날씨에 관해 이야기하거나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도 공감해줄 수 없고 혹여나, 우리 사이에 태어날 아이도 어떻게 생겼는지 모를 테지. 그 이후의 일이나 다른 일들은 이제 말 안 해도 알게 될 테고. 그런데도 이런 나를 다 감당할 수 있나?”

그가 말하는 것들은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그는 절대로 눈을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아니라고 단언할 수도 없었다. 물론 카샤가 말하는 대로 함께 즐기고 느끼지 못하는 것들을 떠올리면 가슴이 먹먹했다.

“그래서 눈이 되어 주겠다고 했잖아요. 당신이 헛손질할 때는 내가 잡아줄 거고, 날씨가 좋을 땐 내가 먼저 산책가자고 할 거예요.

구름이 어떻게 생겼는지, 주변에 꽃이 얼마나 피었는지도 말해줄 수 있어요. 우리 아이는 분명 말하지 않아도 사랑스러울 테지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나하나 다 얘기해줄게요. 당신이 궁금해하는 것들은 전부 다요. 내가 정말 불편할 거라고 생각하나요?”

그가 오랫동안 앞을 보지 못 하는 일은 없을 거다. 당장 가서 세계수의 뿌리를 뽑고 싶어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언젠가 루카에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폐하께서는 안 되는 일도 되게 하시죠’

그럼 같이 동반자가 될 나도 그렇게 되어야지. 당신의 두 눈은 내가 다시 돌려놓을 테니까.

“그대가 왜 이렇게까지 고통스러울 일에 몸을 담그려는지 이해가 안 가는군. 내가 분명 빠져나갈 기회를 준다고 했는데.”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건 당연하게도, 내가 당신을…. 그의 감은 눈에 다시 한번 입을 맞추었다.

“사랑해요.”

“…….”

그가 숨을 멈추었다. 몸이 경직된 것이 느껴졌다.

“…뭐?”

“당신을 사랑해요. 카샤.”

말을 꺼내자 심장에서부터 주체할 수 없는 충만함이 돌며 전신을 가득 채웠다. 흘러넘치는 감정을 다 소비하지 못해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가 내 입술을 맞대고 얘기하기 좋아하는 것처럼 나 또한 그랬다. 그의 입술을 꾹 누르고 다시 한번 더 말했다. 비록 발음이 뭉개졌어도 알아들으리라 여기며.

“당신을 사랑, 읍….”

그의 혀가 들어와 거칠게 입안을 헤집기 시작했다. 마치 그와 처음 키스할 때처럼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격렬했다.

그의 애끓는 감정이 폭포수처럼 내게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버거운데도 다 받아내서 모조리 끌어안고 싶었다.

흘러내리던 눈물은 이제 길을 내며 쉴 새 없이 떨어졌다. 숨이 가빠져 헐떡거리자 그가 얽혀있던 혀와 입술을 떼어냈다. 카샤가 내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혀로 핥아 올렸다.

“미칠 것 같아.”

그가 나를 꽉 끌어안았다. 내가 바르작거리자 그가 내뱉는 숨결이 거칠었다.

“지금 한계야. 가만있어. 자극하지 말고.”

“왜, 참아요? 당신답지 않아요.”

그의 눈동자를 보고 싶었다. 아마 타오르는 정염과 애절함이 섞여 짙푸른 눈동자에 같이 녹아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가 온몸으로 그렇게 내게 말하고 있었다. 내가 먼저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 그는 미동이 없었다. 입술도 안 열어주었다.

왜 갑자기 참으려고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가 내게 하듯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침음을 삼킬 때 그 틈을 타 혀를 집어넣었다. 내 혀가 들어오자 그가 갑자기 우리 둘의 위치를 바꾸었다. 침대에서 마주 보는 자세였으나 이제는 그가 내 바로 위에 있었다.

“이런 건 어디서…. 자극하지 말랬지.”

“당신한테 사랑받고 싶어요.”

그가 입술을 깨물었다.

“안 보이는 상태로 하고 싶지 않아. 샬리.”

나는 그를 다시 침대로 밀어 넘어뜨렸다. 우리는 다시 마주 보는 자세가 되었다.

“보이지만 않을 뿐이죠. 감각은 다 느낄 수 있잖아요.”

“그대가 느끼는 그 감각을 온전히 보고 싶어. 내 눈으로.”

“그건 다음에 봐요. 실컷, 눈이 보이고 나면.”

그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다시 보인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럼 눈 감은 채로 한다고 생각해요. 나도 같이 눈 감을게요.”

입술을 지그시 깨물던 그가 내 말에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래, 그대 말대로.”

그가 내 손등을 끌어와 입 맞추며 신사적으로 웃었다.

* * *

나는 참지 말라고 했지, 짐승이 되라고 한 게 아니었는데. 사흘 동안 먹지도 못한 사람이 힘은 대체 어디서 솟아오르는지 모를 일이었다.

어째 앓아눕는 사람이 뒤바뀌게 되었다. 쪽팔려서 나가지도 못해. 내게 저녁 식사를 하시라 알리려던 시녀들은 문밖에서 한 발자국도 넘어오지 못했다. 카샤가 본인이 깨어난 걸 알렸으나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황제가 깨어났다는 소식에 한동안 바깥이 들썩였다.

“제발 저녁 식사는 하시라니, 샬리. 얼마나 안 먹은 거지? 설마 사흘 내내 먹지 않았나? 그래서 이렇게 금방 힘이 빠진 건가….”

시녀의 말을 듣고 카샤가 내게 추궁을 했다. 그것과 별개로 억울했다. 이 정도면 평소보다 훨씬 많이 버티지 않았나. 말없이 그를 노려보다가 눈에 힘을 풀었다. 내가 어떤 표정인지 그는 모를 테니까. 그는 밖의 시녀에게 식사를 준비하라 이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낭패감이 섞인 표정과 함께였다.

“왜 그래요?”

“그대는 지금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니까, 씻겨주려고 했는데.”

그가 입술을 깨물더니 초조한 기색으로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씻겨줘요. 방향 내가 알려줄 테니까. 이참에 눈이 되는 연습이나 하죠, 뭐.”

카샤가 나를 안아 들었다. 내가 알려주는 대로 카샤는 꽤 능숙하게 방향을 잃지도 않았다.

“연습 없어도 되겠어요. 이 정도면.”

검술로 몸의 균형감각이 잡혀 있어서 그런지 그는 처음에 잠깐 버벅댔을 뿐 아주 수월하게 욕탕에 도착했다. 대충 몸을 씻고 나오자 식사를 내가도 될지 묻는 시중인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응접실에서 식사할 테니 그쪽으로 준비를 하라고 했다.

“황좌가 위태롭겠는데”

확실히 그의 실명 소식을 들으면 정계가 들썩일 게 뻔했다.

“그대가 들려주는 달콤한 말에 취해서 이 말은 하지 않았는데, 지금보다 훨씬 목숨의 위협을 많이 받을 거다. 나는 그대를 지키지 못할까 봐 두려울 지경이지.”

그가 다시 불안한 기색으로 머리칼을 흩트렸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보니를 생각하고 있었다. 내 안의 샬리오니도 빼내 성불시키고 엘리제의 망령도 쫓아낸 아이다.

아마 카샤의 눈도… 고칠 수 있지 않을까. 다만 걸리는 게 너무 많았다. 카샤의 반응이 어떨지는 둘째치고서라도 크리하엘 때문에 몸서리치는 주변인들이 한둘이 아니었으니 보니에게 카샤를 맡길 수 있을지조차 불투명했다.

하지만 지금은 만월의 밤이었다. 2주 이상 지속할지도 모른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크리하엘이 현재 약해졌다는 증거였다. 언제 회복될지는 몰라도 지금이 기회였다. 사람들은 마치 백 년 전의 동대륙의 영웅 사건을 들먹였다. 그때에도 오랫동안 만월의 밤이 이어졌으니 말이다.

그러니 크리하엘이 다시 보니의 몸에 강림할 가능성은 극히 낮았다. 그러니 카샤의 눈을 위해서라면 그 위험성을 감당할 수 있지 않을까. 그가 나를 안아 들고 응접실로 이동했고 나는 그에게 귓속말로 방향을 알려주었다. 앞이 안 보이는 사람 같지 않게 아주 자연스러운 걸음걸이였다.

깨어났다는 소식에 한차례 들썩일 땐 언제고 현재 시중인들은 아무일 없었다는 듯 아주 침착했다. 전부 눈을 내리깔고 있어 눈치챈 자들이 없었으나, 방의 침실을 나오고 옆에 붙은 아레인이 카샤를 보고 움찔 몸을 떨었다. 그러나 그는 내색하지 않았다. 다만 혼란스러운 눈빛이었다. 옆에서 그의 전담 시종 한 명이 뒤에 따라붙었다.

“폐하, 시종장님께 기별을 넣었습니다. 궁의는 지금 대기 중입니다.”

테너는 어제 고열로 쓰러졌었다. 궁의 말로는 스트레스와 더불어 그간의 고생으로 기력이 크게 떨어진 상태라 푹 쉬어야 한다고 했다. 카샤를 아들처럼 애지중지 옆에서 보좌해온 그가 얼마나 많은 마음고생을 했을지…. 아마 지금쯤 깨어나 시종이 전한 황제가 일어났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우선 식사부터, 궁의는 나중에.”

응접실에 도착한 카샤는 주변인을 다 물렸다. 나는 부드러운 감자 포타주를 한 스푼 떴다.

“카샤, 먹여줄게요.”

“뭐…? 아니, 내가 알아서….”

“당신은 멀쩡한 나도 떠먹여 줬는데 왜 나는 안 돼요?”

“…….”

그가 입을 다물고 침묵했다.

“빨리요, 입 벌려요. 다 식었어요.”

그가 입을 열 생각이 없어서 그의 입술 앞으로 스푼을 들이밀자 그제야 그의 입술이 열리기 시작했다. 순순히 식사를 다 받아먹은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까지 그대가 먹여줄 수는 없어. 이것도 연습할 테니 신경 쓰지 마라.”

그가 헛기침하며 볼을 붉혔다.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시종장께서 뵙기를 청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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