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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86화 (86/97)

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86

* * *

“크리하엘이 아니면 고칠 수 없다는 말입니까?”

블레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일어났다.

“그를 죽이거나, 아니면 이곳과의 연결을 끊는 수밖에 없어요.”

테너가 어제 맹세의 서약서에 서명한 신관을 데려왔었다.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아니면 협박했는지는 몰라도 말이다. 그는 카샤의 손을 잡고 내부를 살펴보더니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런 신력을 가진 자는 처음 봅니다. 변질되었는데도 신력의 질은 최상급이군요. 이건, 대신관님 이상인데요. 그보다 훨씬, 제가 대주교님을 뵌 적은 없으나 대주교님 수준이 아닐까 합니다. 와, 역시 대주교님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니었던 거군요. 우리 대신관님이 대주교님이 못 되는 이유가 있었어요.’

그가 접한 최고의 신력을 가진 이가 대신관이었으니 그렇게 생각할 만도 했다. 아마 진짜 대주교를 본다면 그 생각이 터무니없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나. 실제로는 강림한 크리하엘이었으나 그가 맹세의 서약서에 서약했다 하더라도 그것까지 알려줄 필요는 없었다.

‘없앨 방법은 하나밖에, 아니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그 대주교급 신력을 가진 자를 데려와서 남겨두고 간 신력을 풀게 하거나…. 아니면 그를 죽이는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정말 그 사람이 누군지 안 알려주실 건가요? 이 정도의 신력을 가지고 신관이 아니라는 게 이상합니다. 분명 잘 알지 못해서 변질된 신력을 사용한…. 아 그런데 폐하는 어쩌다 그런 사람을 만나신 거죠?’

말이 많고 호기심도 많은 신관이었지만 어쨌든 그가 말하는 핵심은 둘 다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크리하엘을 데려오는 건 말도 안 되고, 그를 죽인다는 건 불가능이었다. 전에 보니의 구속구를 만들 때 에이솔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신력은 세계수와 연결되어 세상으로 흩어진다고.

세계수에 그 어떤 이들도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으니 그들은 아예 세계수를 어떻게 한다는 생각 자체를 못했다. 그렇다고 내가 세계수를 어떻게 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래도 지금 상태로 카샤를 내버려 두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지도 못한 채 상태만 악화시키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빨리 이 상황을 타개해야만 했으니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해봐야 했다.

“그러니까 샬리가 하는 말은 세계수를….”

오랜만에 헨리의 진지한 모습을 보는 것 같다. 나는 그가 끝맺지 못한 마지막 말을 대신해 주었다.

“부숴버리자고요.”

누가 보면 내가 복수에 눈이 멀어 앞뒤 분간 못 하고 헛소리를 한다고 할 수 있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냉정하게 생각하고 에이솔과 함께 내린 결론이었다. 그런 신은 이곳과의 연결을 없애버리는 게 훨씬 세계의 발전에 도움이 될 터였다. 가능하다면 그 자체를 없애버리고 싶지만, 크리하엘은 강림하는 것 말고는 볼 수가 없었다.

그것도 남의 몸을 빌려 강림하니 크리하엘이 전에 말한 대로 신이 아니라 죄 없는 몸만 죽어 나가는 것이다. 인간이 신을 어떻게 해 볼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는다.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마법부서 사람들과 얘기를 나눈 결과 이곳과의 연결을 끊어버리는 게 최선이라는 결론이 났다. 물론, 내가 세계수 근처로 다가갈 수 있다는 전제하에 내린 결론이지만.

“세계수는 부술 수 없습니다.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니까요. 크리하엘의 반응만 가지고 섣불리 움직이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블레인이 고개를 저었다.

“그 말은 에이솔에게 들었어요. 우선, 가봐야겠어요. 세계수 근처로 성지 순례하러 많이 간다면서요.”

“성지순례로 눈가림하시려는 겁니까? 쉽지는 않을 텐데요.”

“맞아요. 그리고 블레인의 말대로 크리하엘이 내게 보였던 반응만으로 세계수의 연결을 끊니 마니 하는 건 분명 무리수가 있지요.”

내가 수긍하자 블레인이 미심쩍은 얼굴로 쳐다보았다.

“다른 가능성이 더 있으신 거군요.”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아레인이 블레인과 헨리를 보며 입을 열었다.

“이번에 암영조를 통해 신성제국에서 들어온 첩보가 있다.”

프레타스 제국은 신성제국 크리하엘로에 십 년 넘게 첩자를 심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사람은 지금, 무려 대주교 중의 한 명이었다.

신성제국에는 쉽게 들어가기도, 그리고 유지하기도 어렵기 때문에 아주 조심스럽게 첩보 활동을 한다고 했다.

신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첩보원으로 써야 하니 애초에 인력도 부족하고 그 때문에 첩보 활동은 의심받지 않는 한도 내에서 최소한으로만 한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십몇 년 만에 얻게 된 큰 정보가 도착했다. 제국의 첩보원이 대주교가 된 지 5년 만이라 했다.

“세계수가 십 년 전부터 이상해졌다고 한다. 최고위급 신관들만 알고 있는 정보인데 아주 가끔 초보 신관들이 멋모르고 가까이 다가가다가 뒤늦게서야 튕겨난다고 하더군.”

“십 년 전부터 그랬던 걸 이제야 겨우 알게 된 거라고? 거기도 참 빡빡하네.”

헨리가 고개를 저으며 진저리를 쳤다. 세계수에 가까이 다가가려고 하면 일정 거리에서 몸이 튕겨난다고 한다.

그런데 알고 있던 바와 달리 최근 십 년 사이 가끔 세계수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비록 뒤늦게 튕기기는 해도. 내가 말하는 가능성은 여기에 더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세계수에 뭔가 변고가 일어난 게 틀림이 없었고 그것은 분명 크리하엘과 관련된 일일 터였다.

“샬리, 세계수는 신성제국의 보호 아래 있습니다만, 갑자기 성지순례를 온다고 해도 의심받을 테고, 만약 다가갈 수 있다고 쳐도 상처하나 내기 쉽지 않을 겁니다.”

“그건 라이올라 공녀의 도움을 받기로 했습니다. 차자 계획을 짜봐요. 이렇게 넋 놓고 가만히 있을 순 없잖아요.”

“라이올라 공녀요? 뭐, 그건 그렇다 치고. 계획부터 짜는 건 마음에 드는군요.”

헨리가 나를 보고 씩 웃었다.

* * *

카샤가 쓰러진 지 꼭 사흘을 꽉 채웠고 닷새로 넘어가기 몇 시간 전이었다. 가까이에서 가만히 눈을 감고 누워있는 그가 너무도 멀게 느껴졌다. 나는 침대 머리맡에서 자리를 지키고 앉아있었다. 하염없이 그를 보고 있자니 살며시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꾸벅꾸벅 졸다가 시트 밖으로 나와 있는 그의 손을 잡고 엎드렸다.

잠시만 이러고 있어야지…. 그랬는데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나 보다. 잠결에 내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넘기는 손길이 기분이 좋았다. 나는 습관적으로 앞쪽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파고들었다…? 잠긴 의식으로 드는 위화감을 생각하고 있는 사이 다른 손길이 내 허리를 당겨 안았다. 나 의자에 앉아서 졸았었던 거 같은데…아니, 그 뒤로 엎드렸었나. 느릿하게 눈을 끔벅거리며 떴다. 어느새 나는 품에 완전히 밀착되어 안겨있었다. 잠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가 파드득 놀라 일어나려는데 느슨하게 감겨있던 팔이 강한 힘으로 옥죄여왔다.

설마…. 내가 생각하는 게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그의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워낙 강한 힘에 눌려 고개조차 제대로 들 수 없었다. 대신 그의 너른 가슴에 얼굴을 파묻자 머스크향이 물씬 풍겨왔다. 그의 심장이 강한 기세로 맥동하며 내 귀에 박혀 들었다. 확실히 그가 깨어난 것 같았다. 기쁜 나머지 나 또한 팔을 둘러 그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

“카샤…. 깨어난 거예요?”

내 말에도 그는 대답이 없었다. 나를 안고 있고 움직이는 것 같은데 상태를 알 수 없으니 답답했다. 한쪽 귀를 그의 가슴에 댄 채로 말하자 목소리가 웅웅대며 울렸다.

“사흘만이에요. 궁의도 부르고, 사람들도 불러야겠어요. 다들 걱정이 많아요. 그래도 깨어나서 다행이에요.”

그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대신 내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는데 느릿한 그 손길이 왠지 모르게 울컥하게 했다.

“당신이 깨어나지 않아서 슬펐어요. 괴로웠구요. 심장이 너무 아팠어요. 사실은 지금도 그래요. 카샤, 왜 말이 없어요?”

말없이 듣기만 하는 그를 보니 채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드디어 입을 열었는지 머리 위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긴 허스키한 목소리를 몇 번 가다듬자 가슴에 얼굴을 대고 있던 내게 진동이 느껴졌다. 그제야 카샤가 온전히 깨어난 사람처럼 느껴져 안도감에 한숨을 쉬었다.

“샬리, 날 좋아하지…?”

어떤 뜻으로 하는 말인지 알 수 없어 가만히 있었다. 이미 알고 있는 있을 텐데 왜 물어보는 걸까.

“대답 안 할 건가.”

그의 목소리에 조급함이 묻어나와 나는 얼른 입을 열었다.

“좋아해요.”

그리고는 다시 말이 없었다. 이제 내가 다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얼굴을 마주 보고 대화하고 싶었다. 자리를 위로 옮기려 허리에 감긴 팔을 조심스레 풀려고 했다. 그러자 멈칫한 그가 오히려 나를 더 꽉 끌어안았다.

“그냥 그대로 있어.”

“얼굴 보고 싶어요. 사흘 동안 눈 감고 있는 모습밖에 못 봤어요.”

“잠시만 이대로 있어 줘. 계속 날 간호했나. 힘들지는 않았고?”

“몸은 힘들지 않았어요.”

계속 등을 쓰다듬던 그가 목 뒤쪽과 견갑골을 느릿하게 훑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왜 이렇게 말랐지. 사흘 동안 무슨 일이 있었길래, 설마 식사도 제대로 안 한 건 아니겠지. 샬리.”

“음…. 당신이 사흘 만에 깨어나서 헷갈리는 게 아닐까요. 나는 그대로인데.”

사흘 만에 살이 빠지면 얼마나 빠진다고…. 얼굴 살이면 몰라. 시녀들이 얼굴 살이 홀쭉해졌다고 걱정했는데, 그 당시에는 귓등으로 안 듣다가 카샤가 볼 걸 생각하니 걱정되긴 했다.

“무슨 소리야. 이 부분, 이 부분은 살이 조금 더 있었는데 지금은 아예 뼈에 달라붙어 있지 않나.”

그가 말하는 부분은 팔을 젖히면 튀어나오는 어깨뼈 제일 윗부분이었다. 그걸 기억하고 있다는 카샤 때문에 당황했다. 지금 이런 얘기 할 때가 아닌데….

“그런가, 이상하네요. 똑같이 먹었는데. 그보다…. 카샤, 신력 맞은 거….”

“어차피 물어보면 다 알게 될걸. 식사를 안 한 게 분명하군. 시중인들 모두 경을 쳐야겠는데.”

“다들 당신을 얼마나 많이 걱정하고 있었는데! 이럴 게 아니에요. 빨리 사람들을 불러서….”

그래, 지금도 많은 이들이 걱정하고 있는데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황제가 깨어났음을 알려야 했다. 나는 다급하게 일어나려 했지만, 다시 그가 힘준 손에 막혀 버렸다. 이제 숨쉬기도 힘들고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카샤, 잠시만 놔 봐요. 숨쉬기가 힘들어요.”

깨어난 뒤로 내 등을 시종일관 멈추지 않고 계속 쓸던 그가 우뚝 멈추었다. 그리고는 내 어깨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대가 내 곁에서 사라질까 봐 겁이 나….”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난 이제 당신밖에 없어요. 정말 당신밖에는….”

그가 쓰러졌을 때 가장 많이 생각했던 것이었다. 나한테는 당신밖에 없는데, 왜 일어나지 않냐고…. 그러나 카샤는 내 말에도 여전히 어깨에 힘준 손을 풀지 않았다. 내가 고개를 들려고 하자 그가 다시 끌어안았다.

“그대가 내 곁을 떠나고 싶다면, 괜찮다. 이해하니까….”

겁이 난다고 하더니, 다시 알 수 없는 소리를 했고 그 말은 나를 화나게 했다.

“깨어나자마자 그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뭐예요? ”

자연스레 내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았다. 말로는 떠나도 이해한다면서 그는 나를 꽉 끌어안고 있었다. 그가 내 머리 위로 입맞춤을 했다.

“안 보여….”

“네…?”

“샬리, 앞이 안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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