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85
* * *
보니에게서 크리하엘이 빠져나가자 친위대와 마법사들이 우르르 떨어져 내렸다. 보니가 쓰러지는 것도, 마법사들이 부유 마법을 써 바닥에 충돌하는 걸 면하는 광경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크리하엘이 카샤에게 분명 무언가 하긴 한 거 같았다. 나처럼 응축된 신력을 맞은 게 아니라 다른 무언가를….
“카샤, 나 좀 봐요….”
그는 아직도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괴로워하고 있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아 그를 꽉 안은 채 잠시간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그의 모습에 이제 땅으로 내려온 친위대를 불러 황제궁으로 모셔가게 했다. 그러나 그렇게 괴로워하면서도 나를 안고 있는 그의 손마디에 힘이 빠지지 않아 떼어내는 데 애를 먹었다.
궁의를 부르고, 마법사도, 신관…. 우선 신관을 보류한 채 황제궁에서 그를 살폈다. 궁에 다 와 갈 때쯤 그는 정신을 잃고 완전히 쓰러졌다. 카샤가 쓰러진 것을 본 테너가 모든 업무를 나디 시녀장에게 일임했다. 궁의는 돌팔이가 틀림이 없었다. 한 번도 쓰러진 것을 본 적 없던 건강한 카샤가 신력을 맞고 쓰러졌는데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한다.
“음,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충격을 받으셔서 그런 것 같습니다. 푹 쉬면 다시 일어나실 테니 너무 심려 마시지요. 기력을 회복하는 약을 지어 올리겠습니다.”
“다시 제대로…. 아니에요. 알겠어요. 그렇게 해주세요.”
이곳의 궁의를 뭐라 할 게 아니었다. 일반적인 병만 살피는 그가 신력을 맞고 쓰러진 사람의 병을 알아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제 믿을 사람은 에이솔밖에 없나. 궁의를 내보내고 에이솔에게 카샤를 살피도록 했다.
“아….”
에이솔이 카샤의 몸을 살피다가 크게 놀랐다. 덩달아 나도 놀라자, 그녀가 입술을 깨물더니 다시 카샤의 몸을 살피기 시작했다. 마치 ‘이럴 리가 없는데.’ 하면서 한참을 몇 번이나 살피는 모양새가 불길했다.
“공주님, 부디 제가 잘 못 생각한 것이면 좋겠습니다만….”
에이솔이 그렇게 서두를 떼자, 왠지 듣고 싶지가 않았다. 그녀도 한참을 망설이며 입을 열었다가 도로 다물기를 반복했다.
“폐하의 두 눈을 중심으로, 오늘 보았던 크리하엘의 탁한 신력이 뭉쳐져 있습니다. 이게 뭘 뜻하는지는 아직 모르겠으나….”
카샤가, 쓰러지기 전에 손으로 눈을 가렸었다. 나는 그게 너무 고통스러운 나머지 하는 행동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알겠어요. 더 말하지 말도록 해요. 무슨 말인지 알겠으니까.”
나도 그녀도 섣불리 불길한 말을 입에 올리지 못한 채 생각에 잠겼다. 크리하엘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 중에 신력이 달라 누구도 치료하지 못할 거라고 했었다. 그 말은… 대신관도 성녀도 치료를 못한다는…. 나는 그제야 보니에게 생각이 닿기 시작했다. 에이솔과 친위대장이 뒤를 수습한 것이 기억났다.
“보니는, 어찌 되었어요? 쓰러진 걸 본 거 같은데 내가 신경을 못 썼네요.”
“우선, 구속구를 다시 채우고, 친위대장님이 폐하께서 깨어나기 전까지는 구금한다 하였어요.”
“알겠어요. 알려줘서 고마워요.”
보니에게 잘못이 없어도, 성녀는 항상 그런 취급을 당해왔다. 신탁을 내리다 미쳐버리면 마녀 취급받아 처형당하고 동대륙에서 성녀는 미치지 않아도 마녀나 다름없었다. 사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크리하엘이 다시 보니의 몸을 차지할 수도 있으니, 아이를 죽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구금은 온건한 처사였다. 아마 카샤의 처분을 기다리는 것이겠지.
“보니는 아직 깨어나지 않은 거죠?”
“네, 보니도 크리하엘의 강림으로 크게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습니다.”
에이솔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 테너가 다가왔다.
“일단 신전에서 사람을 구해와야겠습니다. 비밀리예요. 입단속도 시켜야 하니….”
테너는 모든 일을 다 제쳐두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카샤를 치료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 원래도 바빴던 나디는 테너의 일을 모두 떠맡아 이제 얼굴도 볼 수 없었다. 티나는 큰 충격을 받은 나머지 앓아누워서 길게 병가를 준 참이다. 아레인과 티나에게 내가 누구인지, 어떤 존재인지 알려줬다.
티나는 이 이야기로 더 충격받았을 것이다. 아레인은 내가 무엇이든 자신에게는 똑같이 소중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 덕에 안심할 수 있었다. 궁의도 마법사도 그의 상태에 대해서 제일 잘 알 만한 사람은 역시 신력을 다루는 이밖에 없었으니 신관을 데려오긴 해야 한다.
“공주님, 시녀장이 오늘 밤부터 만월의 밤이 시작된다고 전해왔습니다.”
그래, 만월의 밤이 오는 것은 크리하엘이 약해져 있다는 증거였다. 그놈도 무리를 한 것이 틀림없을 테지. 카샤에게 정신이 팔려 그 뒤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이제 다시 그 상황을 곱씹어볼 때였다. 분명히 크리하엘은 나를 피하고 있었다. 아닌 척했지만, 내가 그에게 닿는 것을 질겁하는 모양새기도 했다.
어째서 그랬을까, 나는 카샤보다 무력도 월등히 약하고 그를 해할 힘이 없다시피 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내가 칼로 그의 어깨를 스쳤을 때, 눈동자는 보이지 않았으나 그가 크게 놀랐었던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카샤와 내가 다른 이유.
자잘하게 하나하나 따지면 이유는 많겠지만, 그중에서 가장 신빙성 있는 것이 있었다. 무력을 제외하면, 제일 다른 것 한 가지. 나는 다른 세상에서 넘어왔다. 내가 성가시고 골치 아파 돌려보내고 싶다 했으니 분명 이와 관련된 것일 테다. 그 말투에는 후회가 가득 묻어나왔었다.
크리하엘이 내가 이곳에 온 것을 후회한다. 그리고 나를 경계하며 꺼린다. 고작 내가 지른 칼끝에 스친 것을 보고도 흠칫 놀란다. 아무래도 내가 그를, 해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 * *
나는 요즘 거의 황제궁에서 살다시피 했다. 카샤가 깨어나지 못한지 벌써 삼 일째였다. 내가 사흘 동안 깨어나지 못했을 때 그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가슴이 먹먹하고, 의지할 사람은 그밖에 없는데, 정작 그는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다른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음식은 보기만 해도 역했다. 황제가 얼마나 위독하면 정무에도 나오지 못하냐며 대전은 첫날부터 들썩였다. 국정은 황제가 전쟁을 나갔을 때처럼 전시체제로 돌아갔다. 귀족들에게 카샤는 항상 위협적이고 굳건했다. 그것은 절대 깨어지지 않는 불변의 법칙처럼 보였을 테니 지금 상황이 그들에겐 생소할 것이다.
이 상태가 길어지면 안 좋은 마음을 먹은 이들이 하나둘 상황을 알아보려 할 것이 분명하다. 사실 다른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냥 그가 일어나주기만 한다면. 나는 이제 그가 없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카샤를 제외한 이곳의 소중한 것 모두를 합쳐도 그 하나만 못했다.
다른 건 없어도 그는 있어야 했다. 그의 생각을 하지 않을 땐 크리하엘에게 복수할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찼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실행에 옮길 참이었다. 크리하엘이 나를 경계하고 꺼린다는, 이 믿기지 않는 말을 들어줄 사람이 누가 있을까 생각하자 에이솔이 먼저 떠올랐다.
“그건 저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움직임을 봉쇄당한 것뿐이지 머리까지 망각한 것은 아니었으니까요.”
에이솔은 그때 생각만 해도 분한지 몸서리를 쳤다.
“신력으로 봉쇄당한 것은 어찌할 수 없으니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그가 나타났을 땐 정말 이대로 모두 신벌을 받아 죽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공주님은 아무렇지 않아 보이시더군요. 분명 우리처럼 신력에 눌려 움직이지 못하실 줄 알았는데….”
전혀 알지 못했던 사실에 나는 의아했다. 그의 신력이 탁하고 숨 막힌다고는 느꼈어도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크리하엘이 움직임을 봉쇄해서 그런 것 아니었어요?”
“그저 강한 신력에 눌린 것뿐입니다.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말이지요. 물론 공중에 올린 건 그의 뜻이겠지만…. 제 생각인데 공주님이 아니었으면 폐하께도 못 움직이셨을걸요?”
에이솔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 사람은 아직 옆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저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닐 거예요. 우리는 위에서 다 보고 있었으니까요. 누가 봐도 크리하엘이 공주님을 피하는 모습이었죠. 왜 그런지 공주님은 알고 계신가요?”
이 말을 하려면 내가 다른 곳에서 넘어왔다는 얘기까지 해야 했다. 카샤가 쓰러진 마당에 도울 사람도 한정적인데 이게 뭐라고 마냥 숨기고 있을 수는 없었다. 마법사는 이런 현상에 관심이 많으니 충분히 믿어주기도 할 테지만, 일전에 보았던 샬리오니의 영혼이 그 신뢰성을 더 높여줄 것이다. 나는 에이솔에게 내가 이곳에 온 연유를 가감 없이 전했다.
“세상에! 이런 시국만 아니었어도….”
마법사의 연구심이 무럭무럭 솟아나는 눈치였다.
“그래요. 나중에 다 대답해줄게요. 이 일부터 해결하고 나면요.”
“물론 이 일이 우선이죠! 해결하지 못하면 당연히 뒤도 없는 것을요. 우선 우리 마법부서 사람들은 전부 수긍할 거예요. 그 일이 있고 난 뒤부터 공주님의 영혼이 분리된 것으로 말이 많았거든요. 친위대 쪽은, 음 믿건 말건 명령만 내리면 해결될 거라 생각합니다만….”
“사람들을 모아서 대책을 마련해야겠어요. 대책이라기보다는 복수에 가깝지만요. 그리고 카샤가 깨어나면 허락할 것 같지도 않으니 지금부터 당장이요.”
“공주님, 대책 마련은 언제든 환영입니다. 하지만 폐하께서 허락지 않으시면 저희도 움직일 수가 없어요.”
“이대로 영영 깨어나지 않으면 움직일 수밖에 없을 거예요. 에이솔.”
사람이 일어나지 않는데 명령이 다 무슨 소용이야.
“그건 좀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입니다만, 일단은 대책부터 세워 봐요.”
* * *
헨리와 블레인은 매번 다녀갔다. 카샤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달려왔으나 그들도 무엇을 어찌하지는 못했다.
“샬리, 식사는 하고 있습니까.”
헨리가 걱정스러운 말로 나를 챙겼다.
“시중인의 말을 들어보니 아예 하지 않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폐하께서 일어나셨을 때 샬리오니 공주님의 이런 모습을 보신다면 아마 크게 화를 내실 겁니다.”
블레인이 나를 보며 주변인들이 내게 한 말을 그대로 했다. 물론 나도 같은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음식을 보기만 해도 속이 들끓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오늘은 그들에게 할 말이 있었다. 그들의 협조도 구해야 하니 반드시 설득해야 한다. 나는 같이 설득해 줄 에이솔과 아레인을 옆에 두었다.
“할 말이 있습니다. 두 분의 도움이 필요해요.”
“샬리가 요청하는 도움이라면 항상 준비되어 있습니다만.”
“먼저 들어보겠습니다.”
둘의 겉으로 보이는 태도는 상반되나, 하는 행동은 항상 비슷했다.
“크리하엘에게 복수하려고 합니다.”
그 현장에 없었던 헨리나 블레인에게는 참으로 허무맹랑하게 들릴만한 말이었다. 나는 긴장한 채 그들을 보며 침을 삼켰다. 두 사람이 나를 한번 보고 에이솔과 아레인을 한번 보았다. 정말 행동하는 것이 비슷하다.
“흠, 샬리. 신에게 복수한다고요?”
“계속 얘기해보십시오.”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집어치우라고 할 줄 알았는데 들어보자고 한다. 에이솔과 아레인에게 도와달라고 하길 잘했다. 나는 에이솔에게도 했던 내 존재 이유에 대해 다시 그들에게 설명했다.
“그러니까, 샬리는 본래 이쪽 사람이 아니란 말이군요.”
“믿어주시나요?”
내 말에 헨리가 씩 웃었다.
“이미 폐하와도 얘기가 끝난 문제 아닙니까? 주군이 믿는데 신하가 된 자가 안 믿을 수 없는 노릇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