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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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감히…! 그 하찮은 것이!”
보니의 몸에서 빠져나간 크리하엘, 아니 에티오는 샬리의 마지막 말에 광분했다. 기나긴 시간, 그와 직접 이야기를 나누는 이는 손에 꼽을 정도이다.
영광으로 알아도 모자랄 것들이 그에게 대드는 것으로도 모자라…. 에티오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런 취급을 받은 적이 없었다.
이 음습하고 축축한 뿌리 안에 갇히기 전에도, 후에도 말이다. 그러나 에티오의 분노는 오래가지 못했다. 곧 고통이 찾아올 시간이었다. 100년 전 동대륙 때보다 더한 고통이.
에티오는 신 크리하엘의 아들이었다. 크리하엘의 자식은 몇 없었고 그는 신의 아들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날수록 아들은 아버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크리하엘은 자신이 만든 세계가 자생력을 갖출 때까지만 관여했다.
대지에는 생명을, 하늘에는 신력을 뿌렸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항상 하늘의 신력을 흡수해 대지 곳곳으로 퍼트리는 세계수가 있었다. 크리하엘 외에도 세계를 만드는 신들이 몇 있었으나 신력을 뿌리는 신들은 극히 드물었다. 그는 하늘의 신력이 다 소모될 때쯤이면 세계도 번성할 것이라 하였다.
다른 신들은 어느 정도 자신의 세계가 자리를 잡도록 도움을 주는 반면, 그는 신력을 뿌려 자생력만 갖추면, 잊고 지낸다 할 정도로 자신이 만든 세계를 방치했다. 그 이후 없어지는 세계는 그 세계의 섭리이며 수명이라 생각했기에 점차 생명력을 잃고 사라지는 세계도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 세계에서 신력이 어떻게 쓰이는지도 관여하지 않았다.
그가 들여다보지 않는 세계를 에티오는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다. 자신이 나중에 세계를 만든다면 저렇게 방치하지 않으리라. 애정을 가지고 가꿀 것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에게 그것이 애착이 아닌 집착이라 하였다.
-세계에 정을 쏟을수록 그 세계는 네 뜻과 달리 부서져 가고 만다는 것을 잊지 마라.
크리하엘 자신처럼 아들도 세계를 도외시하기를 바랐다. 그즈음, 에티오는 한창 크리하엘이 방치한 세계를 눈여겨보고 있을 때였고 더더욱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가끔 아버지 몰래 그의 세계에 장난질을 치기도 했다. 개미처럼 하찮은 미물들은 참으로 열심히도 살았다. 마음에 드는 이는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주고, 그러다 다시 마음에 차지 않으면 몰락시키기도 했다.
크리하엘의 세계에서 신력은 있을지언정 신탁은 없었다. 그가 굽어살피지 않는 데 있을 턱이 없었다. 어설프게 신력을 쓰는 신관들과 성녀들을 모아 에티오는 자신이 크리하엘인양 신탁을 내리고 세력을 구축했다.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그들 위에서 주무르는 맛은 중독성이 있었다.
그렇게 한참 공을 들이던 에티오는 결국 아버지에게 그 사실을 들키고 말았다. 대노한 크리하엘은 에티오를 그 세계로 내려보내 기약이 없는 벌을 내렸다. 세계수 안에 가두고 고통에 잠기게 만들어버렸다. 신의 아들은 세계수 안에서 죽지도 않고, 나오지도 못한 채 그렇게 절망에 빠졌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괴로운 것이 있었다. 자신이 주시하던 세계에 관여하지 못한 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다는 점이었다.
세계수는 매번 일정량, 에티오의 신력을 빨아들여 크리하엘의 신력으로 정화시킨 후 세상에 내보내고 있었다. 신력을 빼앗길 때마다 모멸감과 무력감을 느끼고, 고통 속에서 힘든 나날을 보내던 에티오는 어느 순간 이 세상에 관여하는 법을 깨닫게 되었다.
그와 세계수는 본의 아니게 연결되어 있었고, 그 세계수는 세상과 다시 연결되어 있었다. 에티오는 그것을 역이용하기 시작했다. 당신이 만든 세계, 난장판을 벌이리라. 에티오는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고 있었다. 세계수는 족쇄인 동시에 숨통을 트여줄 구명줄이었다. 그는 그 안에서 세계를 유린하기 시작했다.
한동안 내려오지 않던 신탁이 내려오자 신전들은 환호했고 그 성세를 키워 제국까지 만들었다. 제약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지속해서 세계수에게 신력을 빼앗기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대로 힘을 놀릴 수가 없었다. 에티오는 다시 세계를 굽어보기 시작했다. 난장판을 벌일 거라던 처음의 마음가짐은 사라지고, 그는 다시 애착을 두고 세계를 관리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벌을 주었다는 것도 잊었을지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세계수 안에서 활개를 치는 것을 두고 볼 리가 없으니 말이다. 에티오는 가끔씩 힘을 아끼고 아껴 신탁을 내렸다. 그렇게 하면 그들은 황송해하며 신탁을 받들었다. 성녀는 찾기 쉬웠다. 그 아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몸에 기형적으로 풍부한 신력이 모여들었다.
그렇게 신력이 모이는 곳을 눈여겨 봐두며 마치 그가 성녀를 지정해 내리는 것처럼 신탁을 내렸다. 간혹 힘 조절을 못 한 날이면 에티오는 세계수 안에서 더 큰 고통에 휩싸이곤 했다. 그리고 그 고통을 감당하지 못한 부정적인 기운들을 조금이라도 덜어볼 요량으로 세계수를 통해 밖으로 내보냈다. 악에 받친 정화되지 못한 부정적인 힘들이 세계수 밖으로 뻗어 나갔다.
그것은 동대륙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에티오의 변질된 신력이 대륙의 구석에서부터 세계의 에너지와 결합하여 엉뚱한 생물체가 생겨나고 있었다. 에티오의 부주의로 인한 것이었다. 그들은 그의 통제를 벗어났고, 운신이 제한된 그에게는 그것들을 처치해 줄 인간이 필요했다.
에티오는 신탁을 내려 그 생물체와 가장 상성이 반대인 인물 한 명을 지적했다. 그놈은 꽤 강대해 그 괴생물들을 차근차근 없애 그 실력을 내보이며 어느새 동대륙의 영웅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다시 또 에티오의 손바닥을 벗어나는 일이 생기고 있었다.
괴생물들을 죽이며 그것들과 자주 접촉하게 된 동대륙의 영웅은 서서히 에티오의 변질된 신력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면 그놈 또한 에티오의 통제를 벗어나게 되는 일. 그가 전혀 바라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미 영웅이 되어 있는 이를 신탁으로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었으니, 그는 처음으로 성녀를 통해 동대륙에 강림하였다.
그것은 꽤 힘에 부치는 일이어서 많은 힘을 쏟아부어야 했다. 그리고 에티오는 놈에게 자결할 것을 요구했다. 그때까지 고분고분 말을 잘 듣던 놈이 처음으로 에티오를 거부했다. 감히 신의 말을 거역하다니. 분노한 에티오는 남은 힘을 모조리 끌어모아 그놈을 죽여 버렸다.
생명을 해하는 일은 생명을 담는 신력과 반대되는 일이었다. 더욱더 힘에 부치는 일, 그리고 그 후 에티오의 신력 그 자체가 탁하게 변질되었다. 모든 힘을 쏟아부었던 에티오는 그 날 다시 고통 속에서 벗어나고자 울부짖으며 다시 부정적인 기운을 내보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결코 괴생물을 만들게 놔두지 않았다. 같은 일을 반복할 수는 없는 법이었으니, 그 기운은 희석된 채로 멀리멀리 퍼져나가 전 대륙을 잠식했다. 그날을 기점으로 사람들은 이름을 붙여 저주받은 만월의 밤이라 불렀다. 희석했다 해도 농축되어 찐득거리는 검은 기운은 여전히 없애지 못했다.
그것들은 세계수 주변으로 뿌렸다. 그리고 세계수의 이파리들과 함께 썩어 들어가 새카맣게 변해버렸다. 동대륙의 영웅이 없어진 이유는 급속도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누군가 영웅을, 에티오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동대륙 놈들은 세계수 근처로 와 그를 어떻게 해 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감히 하찮은 놈들은 세계수 뿌리 하나 밟지 못했다. 놈들은 오히려 희한한 걸 만들었다. 세계수 근처에 죽어버린 새카매진 이파리들로 구속구를 만든 것이다. 그리고 모든 성녀들에게 구속구를 씌웠다. 모든 힘을 쏟아버린 이후로 에티오는 가끔 신력을 제어하기 힘들었다.
신력은 회복되었지만 변질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 때문인지 신탁을 받은 성녀들은 가끔씩 미쳐버리기 일쑤였다. 동대륙 놈들이 만든 구속구는 미쳐버린 성녀들을 제어하기에 좋았다. 소통의 의미가 사라진 고장 난 성녀는 마녀로 만들어 제거했다. 말을 안 듣고 신력을 멋대로 사용하는 성녀들을 제거하기에도 좋았다.
동대륙에서 세력의 반을 잃게 된 에티오는 그 뒤로 신중해지기 시작했다. 대신관 놈들은 신탁을 제대로 지키는 놈들이 거의 없었다.
하나같이 제 입맛대로 바꿔 해석하며 제 세력을 불리는 데에만 열중하였다. 그렇다고 다시 신탁을 내리기에는 그 힘이 아까웠다. 별일이 아니면 에티오는 눈감아 주기 시작했다. 자주 신탁을 내려 성녀들이 미쳐버리면 소통을 할 수가 없으니 말이다.
어찌했던, 이 대륙의 절반은 아직도 에티오의 힘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완전히 제 손안에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륙은 그럭저럭 굴러가기 시작했다. 유희도 제 손바닥 안에 있을 때나 재밌는 것이었다. 대신관 놈들 때문에 잘나가다 한 번씩 일이 틀어지고는 했다.
이번에는 프레타스 제국에 황족의 씨를 말리고 갈아엎을 예정이었다. 오래 해 먹었으니 교체할 때도 되었다 생각한 에티오가 이번에 난 황자를 주시했다. 놈을 샅샅이 훑자 그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꽤 영특하고 강골한 놈이니 제 입맛대로 갖고 놀아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부모를 잃고 어린 나이에 목숨을 위협받고 있는 그가 가장 원하는 것은 참 소박하게도 황제가 될 자에게 걸맞지 않은 것이었다. 황태자는 그것이 정말로 이루지 못할 동화 같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매번 목숨을 위협받고 살아 그런지, 한낱 어리석은 미물에게 자주 일어나는 일임에도 그는 영 희망 없이 살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신탁을 들먹이며 그 보상을 해주겠다고 했다. 미물의 생에 어리석게도 목숨 걸만한 사랑 한번 못할 일이 있을까. 뭐, 못한다면 할 수 없는 일이고. 그리고 신탁의 내용을 아는 성녀와 대신관은 신의 품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생명을 해함으로써 다시 한번 그의 신력이 변질되었으나, 개의치 않았다.
간만에 참 재밌는 일이 생겼으니 말이다. 지루할 때는 한없이 지루하더니 재밌는 일은 연속으로 일어났다. 변방에 왕국, 공주의 영혼이 고장이 나버린 것이다. 그 아이가 신전으로 찾아왔을 때는 웬만한 일로는 놀라지 않는 에티오도 놀라고 말았다. 그 공주의 영혼은 과거 에티오가 죽였던 동대륙의 영웅이었다.
100년 가까이 되었으니 윤회할 시기이긴 했지만, 신에게 죽임을 당한 영혼에 아무래도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게다가 미래를 꿈으로 본다 하니 그는 흥미가 동했다. 그러나 공주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에티오에게 죽은 전생의 기억도 없을 텐데, 억울한 일을 당할지 모른다며 에티오와 거래를 하려 들었다.
이 문제를 해결해주는 조건으로 미래를 알려준다는 맹랑한 소리를 했다. 전생에 쓰고 팽한 전적이 있으므로, 에티오는 너그럽게 넘어가 주었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어야 했다. 이상하게도 샬리오니와 연결되어 이쪽으로 넘어온 영혼은 사사건건 에티오를 방해했다. 마침 몇 세기에 한 번 나타날까 말까 한 성녀와도 함께 있어 구속구에도 불구하고 직접 강림해, 주의를 주었다. 그리고 에티오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겁을 주기 위해 신력으로 발 한쪽의 힘줄을 끊어내려 했는데 그게 먹히질 않았다. 구속구로 온전히 힘을 못 쓰기도 했지만, 아예 듣지 않는다니 말이 안 되었다. 말하는 도중 해하는 신력이 아닌 일반 신력을 슬며시 밀어 넣었더니 그것은 잘만 들어갔다.
그리고 또 하나 더, 깨달은 것이 있었다. 에티오 가까이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태연하다. 벌벌 떨며 그가 내뿜는 신력에 굴복해 꼼짝도 못 하고 무릎을 꿇어야 정상이건만. 구속구 때문일 것이다. 그의 주의를 충분히 들었으리라 생각하며 찝찝한 기분을 떨치고 세계수로 돌아왔다.
오랜만의 강림에 그는 다시 고통에 떨었다. 그러나 그는 그 후에도 더 후회할 일이 생길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의 잘못된 판단으로, 에티오를 해할 수 있는 유일한 영혼이 나타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