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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83화 (83/97)

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83

3. 악신강림

내가 우려하던 일이 결국 일어났다. 또한 제일 바라지 않던 일이었다.

“사람들을 풀어주세요.”

네가 하는 짓은 신도 뭣도 아니라고 퍼붓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너처럼 나를 화나게 한 이는 없었단다.”

없긴 왜 없어.

“그럼 동대륙의 영웅은 뭔가요.”

내 말에 그가 입꼬리를 올렸다.

“오랜만에 들어보는구나. 그래, 그 사람의 뒤를 따라가고 싶으냐?”

“나도 죽일 건가요?”

동대륙의 역사가 사실이었나 보다. 정말로 신탁을 거부해서 동대륙의 영웅을 죽였다고? 크리하엘이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하는 모양새를 했다.

“너는, 죽이기보단 괴롭히는 벌을 주는 것이 낫다고 여겼단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려무나.”

헛소리. 절로 이가 갈리는 와중에 뒤쪽에서 쿨럭대며 기침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놀라서 고개를 돌리자 카샤가 내 곁으로 오고 있었다. 움직일 수 없는 거 아니었나, 피를 토했어? 그의 앞섬은 엉망진창이었다. 망령 때문에 내가 쏟은 피와 그의 피로 범벅이었다. 그가 입가를 손등으로 닦아 내렸다. 서둘러 다가가 그를 살폈다.

“카샤, 이게 어찌 된….”

“흐음, 내 신력을 깨다니. 그래 내가 선택한 아이답구나. 그런데 끝까지 신탁을 이어갔으면 좋았을 것을 그랬지. 카시카프. 바보같이 다 망쳤구나.”

크리하엘이 크게 나무라는 투로 그를 책망했다.

“너는 내가 아끼는 아이지 않니. 다시 신탁을 이어가면 봐줄 용의가 있다.”

그의 말에 카샤가 입을 열자 다시 피가 울컥 새어 나왔다. 내가 소매로 닦으려는 것을 저지한 그가 나를 뒤로 숨겼다.

“그렇게 하면 물러가 주실 겁니까.”

크리하엘이 진한 미소를 흘렸다.

“재밌는 소리를 하는구나. 물론 내 할 일을 끝내면 돌아갈 거란다. 벌을 받을 사람은 받아야지.”

“그녀를 건드린다면, 내가 신탁을 이어갈 거라 생각하십니까.”

낮게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가 흉흉한 기세를 머금고 있었다.

“저런, 카시카프. 내 너를 아낀다 했더니 네가 뭐라도 된 줄 알고 배짱이 두둑해진 것이냐.”

그가 못마땅한 얼굴로 카샤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보니 때처럼 모이는 신력은 불길하기 짝이 없었다. 우리 둘 다 신벌을 받게 될 거라면 차라리 나 혼자 받는 것이 나았다. 처음에 크리하엘을 보고 집어먹었던 겁은 사라지고 화만 남았다.

“나오지 마.”

나를 붙잡고 있던 그가 내가 움직이려는 것을 눈치채고 한 말이었다.

“그러는 게 좋겠구나. 내가 화가 나서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말이야.”

이러나저러나 신벌을 받을 거라면, 지금 크리하엘의 발치 뒤로 구속구와 열쇠가 흩어져 있었다. 좀 멀리 떨어져 있긴 했지만, 오히려 그래서 구속구에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어차피 받을 신벌, 한 사람만 받으면 좋고 크리하엘에게 구속구를 채우면 더 좋았다.

“당신은 사기꾼이에요.”

웃음기 띠던 크리하엘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미물들과 대화한 적이 몇 번 없긴 하지만, 내가 들었던 말 중 가장 화가 많이 나는 걸 보니 넌 정말 소질이 있어. 내 화를 부추기는데 말이야.”

미소를 지워버린 그의 얼굴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어차피 카샤에게 내린 신탁도 사기나 다름없었을 테니 내가 잘 막은 거죠. 눈앞에서 미끼를 흔들며 어떤 대의도 없이 당신만의 유희를 위해서 움직이라니, 카샤가 죽든 말든 당신은 상관하지 않을 신이니 사기꾼이 맞아요.”

크리하엘을 도발하는 말에 카샤가 나를 돌아보았다. 왜 그러냐는 듯이. 나는 크리하엘이 보이지 않는 선에서 팔찌를 채우는 것처럼 그의 손목 위로 둥글게 덧그렸다.

내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 것이다. 그가 잠시 미간을 찌푸리며 잡고 있던 손에 힘이 느슨해졌다. 그 틈을 타 손을 빼고 크리하엘에게 몇 걸음 다가가자 제자리에서 이리저리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던 크리하엘이 딱 그만큼 더 멀어졌다.

“샬리, 다가가지 마라.”

내가 다시 천천히 몇 걸음 더 나아가자 크리하엘이 자연스럽게 다시 뒤로 발걸음을 물렸다. 다가가면 좋아할 줄 알았던 크리하엘이 몸을 뒤로 빼는 모습이 수상쩍었다. 계속 이렇게 뒤로 가다간 그가 뒤쪽의 구속구를 눈치챌지도 몰랐다.

“그래, 어떤 벌을 내릴지 정했다. 저 아이가 너를 많이….”

지금이라고 생각하며 힘껏 달렸다. 내 도발로 화가 난 크리하엘이 내게 신벌을 내릴 동안 카샤가 구속구를 주워들길 바랐다. 그러나 몇 번 뛰지도 못한 채 카샤에게 허리를 잡혔다.

“샬리, 내가 미쳐버리는 꼴을 보고 싶은 건 아니겠지.”

그가 내 귓가에 나지막이 살벌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만 신벌을 내리고 끝내야겠구나.”

크리하엘이 구속구를 눈치챈 것 같지는 않은데. 어째서 그는 왜 내가 다가가는 만큼 멀어지는 것인지.

“당신 말대로 끝내는 게 좋겠습니다.”

카샤가 검을 빼 들었다.

“나를 찌르려 하느냐. 성녀는 내가 아니거늘. 찔러봤자 무슨 소용이냐. 그 전에 네가 가까이 올 수 있을지도 의문이 드는구나.”

“타격은 가겠지요. 그리고 사라져 줄 것이 아닙니까.”

그가 천천히 다가가도 크리하엘은 물러나지 않았다. 나와는 다른 반응이었다.

“바보 같으니, 이 아이가 네 손에 죽어도 나는 없어지지 않아.”

“저 성녀의 몸이 아니면 이제 오기 힘들지 않겠습니까. 단 한 번도 신이 이렇게 강림했다는 말을 들은 바가 없습니다. 그 말은 저 아이만 사라지면 된다는 거죠.”

“머리 굴리는 것은 좋았으나, 내가 이런 성녀를 다시 만들지 않는다는 보장이라도 있느냐.”

“내가 살아있는 동안은 못 만들겠지. 그게 쉬웠으면 지금까지 몇 번이고 강림했을 것이 아닌가.”

카샤는 이제 존대를 집어치우고 크리하엘을 향해 위협적으로 칼을 겨누었다.

“애석하구나. 버릇도 없고. 똑똑한 줄 알았더니 멍청하기까지. 네 칼끝은 이 아이의 머리카락 한 올도 건들지 못할 것이거늘.”

설마 그가 나 대신 신벌을 받으려 하는 건가. 구속구와 팔찌는 여전히 크리하엘의 뒤에 있었다. 나도 모르게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가 신벌을 받는 게 극도로 싫은 것처럼 카샤도 내가 받는 게 싫겠지. 그러나 나보다 그가 구속구를 노리는 것이 훨씬 가능성이 높은 일인데. 그보다 그는 정말 보니를 찌를 셈인가.

찌르겠지…. 그라면 아마… 기회가 된다면 찌를 것이다. 혼자서는 안 된다. 둘 중 누구든 시선을 끌어 구속구를 크리하엘에게 씌우는 수밖에 없었다.

크리하엘을 찌를 기회가 온다면…. 부디 목숨만은 살려주길 그저 바랄 수밖에. 지금 우리 머리 위에 수십 명의 인질이 떠올라있었다.

이 상황에서 보니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애걸할 수는 없었다. 남은 거리를 가늠하는데 크리하엘이 카샤에게 다시 손을 뻗었다. 그 손에 다시 신력이 뭉쳐 드는 것이 보였다.

“손발이라도 잘라놓아야 그만둘 성싶구나.”

크리하엘이 손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자마자 구속구를 향해 달렸다. 조금 빠른 감이 있긴 했지만 혹시라도 그가 내게 시선을 돌린다면 카샤가 대신 구속구를…. 내가 달려오는 것을 본 크리하엘이 멈칫하는 것이 보였다. 아까부터 나를 꺼리는 기색이 정말 이상했다. 아닌 척하지만, 신경이 예민하게 곤두서 있어 계속 그런 모습들이 눈에 띄었다.

카샤도 크리하엘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눈에 확연히 보였다. 카샤보다 내가 달려오는 것에 더 당황하는 모습이. 그리고 곧 그가 크게 노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감히 하찮은 미물들이 나를 뭐로 보고…!”

카샤와 내가 둘 다 그를 향해 뛰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곧 가까워졌다. 내가 먼저 달려 나갔어도 카샤가 금방 따라잡았다. 그리고 나는 실수를 하고 말았다. 실수라기보다는, 본능이 먼저 움직였다. 카샤에게 짓쳐 들어가는 신력 덩어리를 외면할 수 없었다. 믿는 것도 있었다. 그저 내 감, 그거 하나뿐이지만.

카샤의 손발을 자를 거라는 것이 빈말은 아닐 것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카샤가 저걸 맞게 되면 치명적일 거라는 것은 알겠다.

그러나 나를 꺼리던 크리하엘을 보면, 구속구를 가지러 가야 할 내 몸이 비틀렸다. 방향을 틀어 카샤의 몸을 감싸 안았다.

잠시 당황한 그가 나를 안은 채 다시 몸을 틀려 했다. 그러나 이미 빠르게 다가온 신력 덩어리가 큰 소리를 내며 내 등과 충돌했다. 크리하엘의 신력은 왜 그런지 모르겠으나 탁하고 역했다.보니 때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속이 진탕되며 뒤흔들렸으나, 버틸 수 있었다.

이미 보니를 통해 신력으로 회복되어 있던 몸이라 한번 맞고 쓰러지는 일은 없었다. 물론 진탕된 내부로 인해 다시 피를 토하긴 했으나. 손도, 발도 다 붙어있었다.

그저 과도하게 응축된 신력을 맞은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연속으로 여러 번 맞는다면 몰라도 한두 번이라면 이 정도의 신벌, 맞아줄 수 있었다. 그 사이에 카샤가 구속구를 챙긴다면…. 나는 어느 정도 확신이 생겼다.

“내가,”

카샤가 이를 갈며 내 양어깨를 꽉 붙들었다.

“뭐라고 했지. 샬리?”

그러나 나보다 그의 손이 더 떨리고 있었다. 뒤에서 발걸음 소리를 내며 크리하엘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시종일관 떠들던 이가 말이 없는 걸 보니 정말 많이 화가 난 모양이었다. 카샤가 잡고 있던 어깨를 놓고 다시 나를 뒤로 붙들려는 것을 뿌리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거리낌 없이 크리하엘을 향해 다가갔다.

뛰지도, 질질 끌지도 않고 곧바로 걸어갔다.

그런 내 모습을 어안이 빠진 채 보던 카샤가 뒤늦게 울화를 터트리며 다가와 내 손을 잡아챘다.

“가지 마!”

역정이 난 얼굴로 다가오던 크리하엘이 내가 다가가자 바로 멈춰 섰다. 내 몸을 제게 당기려면 카샤도 이상함을 느낀 듯 잠시 멈추었다. 역시 무언가 있었다. 확인해야만 했다.

“손발이 잘리지 않았어요.”

“카시카프를 향해 쏜 것을 네가 맞았으니 아무 탈이 없는 것이지. 저 녀석이 네게 저리 절절매는 것을 보니 다른 신벌을 내릴 걸 그랬군.”

크리하엘이 말까지 돌리며 하는 말이 꼭 변명 같았다.

“내게 신벌을 내리세요. 그리고 이제 더 이상 우리에게 관여하지 말고 돌아가세요.”

“내가 왜 하찮은 네 말을 들어주겠느냐.”

“그럼 제가 다가갈 수밖에 없어요.”

떠보는 내 말에 크리하엘이 크게 비웃었다.

“다가와서 무얼 하려고 그러느냐. 네가 대체 뭐라고.”

그러게. 내가 대체 뭐라고 당신이 그렇게 피하는지. 다시 카샤의 손을 빼려 했으나 그는 이번만큼은 꽉 잡은 채로 놓아주지 않았다.

“이러면 나도 정말 어쩔 수가 없구나.”

크리하엘은 더 이상 피하지 않고 내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나는 뒤돌아 카샤를 보고 구속구 쪽으로 눈짓했다. 그의 눈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항상 효율을 중시해 왔잖아요.”

내가 그를 향해 속삭이자 그가 차갑게 응수했다.

“네가 포함되면 항상 효율이 사라지는 건 몰랐나 보군. 지금처럼.”

그가 마지막 말을 뱉는 순간 등허리가 섬뜩했다. 뒤돌아보려는 찰나 그가 내 몸을 끌어안고 뒤집었다.

“안 돼!”

그가 나를 끌어안고 있어 충격의 여파가 전해졌다. 카샤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분명 아주 짧은 시간이었으니, 신력을 많이 모으지 못했을 거다. 심하게 다치지 않았을 거다. 그래야 한다.

“카샤….”

그가 고통에 겨운 얼굴을 가리려는 것인지 한 손으로 두 눈을 가렸다. 그 와중에도 내 허리를 억세게 감아 당겼다.

“나를 따르지 않으면 그렇게 벌을 받게 되는 거다. 카시카프. 너희가 효율 얘기를 하길래 나도 그렇게 해보았단다. 적은 신력으로 최대 효율을 내보았지. 온전히 나만의 힘이라 지금의 다른 신력으로 치료할 수도 없단다. 안타깝게 되었구나.”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오르니 도리어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카샤에게… 무슨 짓을 한 거예요? 신력이 곧 당신 아닌가요? 다르다니 무슨 말이죠?”

“정말 너는 성가신 아이야. 유희가 과했지, 샬리오니의 말을 들어주는 게 아니었는데 말이다. 돌려보낼 수도 없고 골치 아프구나. 그래도 지금 이 상태는 꽤 흡족하군.”

근처까지 와 방심하고 있는 크리하엘을 향해 카샤의 검을 빼 들어 종으로 그어 내리자 그가 다시 멈칫하며 물러났다. 크리하엘의 어깨의 천이 칼끝에 잘려나갔다. 재차 찌르려는데 내 허리를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움켜쥐고 있는 카샤 때문에 빠져나갈 수 없었다.

“쯧, 봐 주마. 지금부터 괴로울 테니 말이다. 이만하고 돌아가야겠구나. 너무 오래 있었거든.”

허망하게도 이런 일을 저질러놓고 그가 서둘러 보니의 몸에서 빠져나가려 하고 있었다. 그는 여유로운 척했으나 누가 봐도 다급히 빠져나가는 모양새였다.

“내가 무섭나 보네. 꼬리를 말고 도망가는 꼴 좀 보라지.”

빠져나가는 크리하엘의 표정이 내 말에 분노로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보니의 몸에서 나가는 것을 끝까지 볼 시간이 없었다. 카샤, 그가 먼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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