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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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그 자리에 앉았고 앞에 선 보니가 내 왼손을 잡고 눈을 감았다. 조금 전 나를 치료할 때처럼 신력이 왼손을 타고 넘어오기 시작했다. 능숙하게 들어온 신력이 곧바로 몸 안에 있는 샬리오니를 건드렸다. 그것을 둥글게 감싸는가 싶더니 천천히 다른 쪽으로 인도하기 시작했다. 이동하는 쪽은 내 오른손이었다.
샬리오니와 보니의 신력이 오른손의 끝으로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스르르 빠져나오는 신력을 가만히 보고 있자 내 안에 자리하고 있어야 할 것을 잃는 것처럼 커다란 상실감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반투명한 연기처럼 흐물거리더니 점차 윤곽을 갖추기 시작했다. 빠져나간 반투명한 혼은 샬리오니의 모습 그 자체였다.
“공주님…. 말도 안 돼”
“샬리…. 괜찮은 겁니까?”
티나와 아레인이 할 말을 잃고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내 속에서 나의 모습을 한 영혼이 빠져나왔으니 충분히 놀랄 만한 일이었다. 이제 완전한 형태를 갖춘 샬리오니가 그들을 보며 싱긋 웃었다.
“아직도 말을 안 해주면 어떻게 해? 놀라는 것 좀 봐.”
“그러게요. 미리 말해줄 걸 그랬어요.”
망령도 그렇고 샬리오니도 이런 식으로 나타날 거라 생각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내 몸 안에서 없앤다고 생각했기에 어쩌면 알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망령 때문에 성불 못 하는 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그녀는 몸서리를 치는 시늉을 했다.
“성불하면 이제 다시 나타나지 않는 건 확실하겠지?”
어느새 다가온 카샤가 그녀를 경계하며 뒤에서 나를 끌어안았다.
“계속 나타났으면 싶어요? 그럼 뭐 계속 있고.”
“농담하는 거 아니다.”
그가 날카로운 기세를 흘렸으나 영혼에는 닿지 않았다.
“누가 농담이래요? 찰거머리도 아니고 왜 그렇게 들러붙어 있어요? 살아있는 사람도 망령이 될 수 있었나 봐.”
샬리오니가 그에게 비아냥거리는 것을 본 나는 당황했다. 둘이 나누는 대화는 가시가 달린 것처럼 뾰족뾰족했다.
“그렇게 치면 네가 더 악랄한 망령이 아닌가. 거의 기생 수준이었지.”
“아, 내 몸이었다니까, 정말 말이 안 통해. 넌 저 사람이 왜 좋은 거야? 내가 제일 이해 안 되는 부분이거든.”
샬리오니가 그를 보며 눈을 흘겼다.
“어째서…. 영혼이 나와 있는데 샬리는 괜찮은 겁니까? 꼭 기억을 잃기 전의 샬리 같습니다.”
“그래요, 마치 공주님이 두 사람이 된 거 같아요.”
옆에서 우리를 지켜보던 아레인과 티나가 정답에 근접한 질문을 했다.
“둘의 말이 맞아요. 기억을 잃기 전의 샬리오니가 저 영혼이에요. 자세한 건 나중에 설명해 줄게요.”
“저번이 마지막일 줄 알았는데 다시 작별 인사를 할 기회가 생겼네. 아레인, 남아있는 샬리를 잘 보살펴줘요. 그리고…다른 좋은 사람 만나길 바랄게요.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죠?”
“아…. 정말 샬리로군요.”
복잡한 표정의 아레인에게 샬리오니가 의뭉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하지 않고 웃기만 했다.
“티나도 지금 행복해 보이니까 내가 마음이 편해. 앞으로도 그렇게 잘 살아주면 더할 나위 없을 테고.”
“이건 이상해요. 샬리 공주님이… 어째서 영혼이….”
티나는 여전히 받아들이기 힘든 듯 나와 샬리오니를 번갈아 보며 울상을 지었다. 아직 뭐가 뭔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그들에게 느닷없는 작별인사를 남긴 샬리오니가 이제 보니를 바라보며 기특하다는 듯 씩 웃었다.
“조그만 게 정말 고생했네. 내 몸에 달라붙은 그 망령은 신성 제국의 성물을 써야 할 정도가 아닌가 싶었는데 말이야. 이런 일은 극히 드무니까 나도 정말 놀랐다고.”
“저도 상상이라서 놀랐어요. 그렇게 어마어마한 게 붙어있을 줄은….”
“그 정도로 집념이 대단한 사념체였어. 궁에 남겨진 원한 조각들이 하나씩 내 몸에 달라붙더니 결국 몸집을 부풀리며 저렇게 되지 뭐겠어.”
“정말 말이 많군….”
뒤에서 카샤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그녀는 가소로운 듯 콧방귀를 끼며 그를 무시했다.
“마지막으로 묻고 싶은 건 없어? 내가 이제 가면 궁금한 게 생겨도 답해줄 수 없으니 지금 말하렴.”
그녀가 큰 아량을 베푸는 것처럼 굴었다. 나는 혹시나 해서 전에 말한 것을 한 번 더 물었다.
“내 기억은….”
“이미 없애버린 걸 어떻게 하니. 미안하지만 그건 안 돼.”
“됐어요. 그럼 없어요.”
갑자기 물어보라고 하면 생각날 리가 없잖아. 나는 불퉁한 기분으로 대꾸했다.
“샬리.”
“왜요?”
“우리가 영혼을 공유하고 있어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 넌 정말 사랑스러워. 모두에게 충분히 사랑받을 만해. 그 행복을 누릴 자격도 있는 사람이고 말이야. 그러니 과거에 너무 연연하지 마. 뻔뻔하다고 생각하겠지만 나 또한 네 행복을 빌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이니까. 여기서 네가 행복하길 바랄게. 내 몫까지 잘 살아줘.”
그녀가 진심을 담아서 내게 행복을 빌어주었다.
“당신도 이제 악몽의 고리를 끊고 행복해졌으면 좋겠어요. 다음 생에는 말이에요.”
“그래, 이번 생에서 못 다한 거 다 할 거니까.”
그녀가 그렇게 말하고 보니를 불러 눈짓했다. 이제 성불할 시간이었다. 보니는 샬리오니의 영혼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아이의 주위를 맴돌던 신력이 응축된 마지막 남은 구체가 점점 크기를 부풀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크기가 커지는 대신 점점 색이 옅어지기 시작했다.
응축된 상태에서 크기만 커지는 듯싶었다. 그리고 구체는 샬리오니의 영혼만큼 커졌을 때 멈추었다. 그것을 보니가 천천히 샬리오니 쪽으로 밀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다가간 커다란 원형 구체가 샬리오니의 영혼을 감싸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영혼이 새하얀 빛 가루처럼 흩날리기 시작했다.
바깥에서 시작된 흩날림은 점차 소용돌이치는 꽃잎처럼 퍼지더니 그녀의 미소를 마지막으로 남김없이 사라졌다. 정말로 사라졌다. 원래의 샬리오니가 내게 몸을 넘겨주고 진정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녀를 잃은 나는 왠지 모를 상실감에 서러움이 북받쳐 올랐다. 붙어있던 영혼 한쪽이 떨어져 나간 공간은 허전함으로 텅텅 비었다.
“샬리, 몸은 좀 어때, 속은 어떻지?”
완전히 사라져버린 이의 여운을 느낄 새도 없이 그가 나를 돌려세우고 이리저리 살폈다.
“나는 괜찮아요. 멀쩡해요. 아까 보니가 다 치료해 주었어요.”
그가 예고도 없이 나를 안아 들었다.
“다들 수고했다. 샬리, 그대는 쉬어야 하니까 바로 돌아가도록 하지.”
어느새 성큼성큼, 사람들에게서 멀어지며 서두르는 그를 붙들었다.
“폐하, 아직 보니 구속구를….”
“공주님, 보니가 이상해요!”
티나가 새된 목소리로 기겁하며 나를 찾았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보니의 구속구를 풀고 시중인들은 거의 다 내보냈기 때문에 발찌와 열쇠는 티나가 가지고 있었다. 안겨있던 나는 바동거리며 내려와 티나를 향해 달려갔다.
“티나! 구속구부터 채워!”
“샬리, 가까이 가지 마라!”
등 뒤에서 카샤가 나를 붙들었지만 뿌리치고 다시 달렸다. 보니는 웅크린 채 잘게 떨고 있었다. 신력이 불안정한 모습으로 기이하게 날뛰는 모습과 함께였다.
안 된다. 크리하엘이 오면…. 달리는 와중에 제발, 제발 몇 번이나 중얼거리며 빌었다. 티나는 서둘러 소매에서 열쇠와 발찌를 꺼내 보니에게 다가갔다. 긴장이 풀어져 있던 친위대와 마법사들이 다시 경계태세로 들어갔다. 웅크리고 있어 발목이 보이지 않자 티나가 조심스레 보니에게 손을 뻗었다.
“티나! 발이 아니라도 상관없어 손목에라도 우선….”
부디 보니가 신력을 과다하게 사용한 여파로 떨고 있는 것이길 간절히 빌었다. 그러나 그런 나를 비웃는 것처럼, 발찌를 손목에 채우려는 티나의 손을 보니가 덥석 잡았다. 보니에게 달려가던 나는 그 자리에 뚝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아이의 눈은 어느새, 흰자위만으로 가득했다.
눈동자가 없는 그 괴이한 눈이 한껏 휘어지며 티나를 향했다. 저번에도 느꼈지만, 초점이 없는 눈임에도 이상하게 누구를 보는 건지 알아챌 수 있었다. 티나가 겁에 질려 손목을 빼내려 하자 아이가 가볍게 웃으며 티나의 손목을 더 당겼다.
“무례하구나, 감히 내게 구속구를 채우려 들다니.”
아, 크리하엘이 보니의 몸을 차지했다. 다시 그를 만난 것이다. 나는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 카샤에게 다가가려 했으나 기이한 일이 사방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크리하엘의 것으로 추정되는 신력이 주변을 빠르게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보니의 신력에서 느꼈던 청량함과는 확연히 달랐다.
사슬에 얽매인 것처럼 사람을 숨 막히게 하는 탁한 신력이었다. 곳곳에서 사람들이 신음을 내뱉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고통스러워 보이는 얼굴을 한 채 그들이 공중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손과 발이 묶인 사람처럼 꼼짝도 하지 않은 채였다. 이곳은 돔 형태로 천장이 매우 높았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같이 전부 천장에 닿을 정도로 높이 떠오르고 있었다.
어째서 이런, 나는 크리하엘을 돌아보았다. 옆에 있던 티나도 마찬가지로 옴짝달싹 못 한 채 떠오르고 있었다. 바닥에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건 나와 카샤, 그리고 크리하엘뿐이었다.
“무슨 짓이에요?”
“나야말로 묻고 싶구나.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는 알고 있겠지?”
나는 입술을 짓씹으며 카샤에게 다가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다가가지 않는 게 좋겠구나, 내가 무얼 할지 모르니 말이야.”
뒤에서 크리하엘이 내게 경고의 음성을 보냈다. 카샤는 위로 떠 있지만 않을 뿐이지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맹렬한 시선으로 크리하엘을 노려보고 있었다. 지금 여기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나와 크리하엘뿐인가. 건물 안의 모습은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신이 아니라 지옥의 악마에게 잡혀있다 해도 될 정도로.
“왜 이런 짓을 벌이는 거예요? 당신이 정말 신이 맞긴 한가요?”
오래전부터 크리하엘에게 품고 있던 의문을 던졌다. 왜 나만 이렇게 움직이게 놔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다른 이들을 인질로 잡아놓은 채 혼자 이렇게 크리하엘과 대면하고 있으니 겁이 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크리하엘이 하는 짓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신과 달라도 한참 달랐다.
“네가 저지른 죄가 너무 많아, 나열할 수도 없을 지경이구나.”
역시나 그는 내 말은 무시한 채 본인의 할 말부터 했다.
“내가 분명 경고했지 않니, 방해하지 말라고.”
보니의 몸을 한 채 그가 쯧 하며 혀를 찼으나 크리하엘이 들어있는 이상 귀여운 아이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것도 모자라 샬리오니를 내 허락 없이 성불시키기까지 했지. 분명 샬리오니도 알고 있었을 텐데 괘씸하기 짝이 없구나. 너희들은.”
같은 영혼을 뿌리로 두고 있어서 그런가, 하고 크리하엘이 말을 덧붙였다. 그제야 생각이 났다. 샬리오니가 성불시켜주는 조건으로 꿈으로 알고 있던 미래를 크리하엘에게 알려주기로 했었다는 것을. 그런데 그녀는 크리하엘을 통하지 않고 성불해 버렸다. 그는 매우 노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그러면 벌을 받아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