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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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니가 내게 천천히 다가왔다. 아이가 신력을 개방하자 주위에 신력이 넘실거렸다. 친위대와 마법사들이 바짝 긴장한 채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분위기와 동떨어진 말을 내뱉는 사람도 있었다.
“세상에, 말도 안 되는 신력이에요.”
마법사 중 한 명이 감탄사를 내뱉자 옆에 있던 에이솔이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내 머리 위의 무언가가 크게 일렁이며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속이 메스꺼워졌으나 머리 위에 어떤 것이 붙어있는지는 알아야겠기에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아, 저게 대체 뭐야. 충격받은 내 입이 절로 벌어졌다. 시커먼 그것은 유령 같기도 하고…. 아니, 내 기준으로 그것은 괴물에 가까웠다. 반투명한 새카만 물체에는 눈코입이라 할 만한 것이 붙어있었는데 기괴스럽기가 말도 못 할 정도였다. 가만히 있어도 징그러운 형태의 괴물이 보니가 내뿜는 신력에 닿자 괴로워하며 일그러져 더 흉측했다.
저게 신력이 닿아야 모습을 드러낸 건가? 우리가 있는 이 공간에서 현재 움직이고 있는 것은 저 괴물밖에 없었다. 그것도 엄청나게 괴로워하며 요동치는 것이 느껴졌다.
“말해봐라. 저것을 없앨 수 있나?”
카샤가 딱딱하고 날카로운 어투로 보니에게 물었다. 그는 괴물을 일별하며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보니가 입을 떼는데 갑자기 머리 위의 그것이 비명 같은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끼에에에에엑
요동치며 소리를 지르는데 머리가 어질하며 핑 돌아 나도 모르게 몸을 휘청거렸다.
“샬리, 절대 움직이지 마라.”
카샤가 내 허리를 단단히 붙잡더니 들고 있던 검으로 내 머리 위의 괴물을 베어냈다. 그러나 횡으로 그어진 검의 흔적을 따라 갈라지는가 싶던 괴물은 다시 꾸물꾸물하더니 붙어 원상 복귀했다.
그가 입술을 짓씹으며 괴물에게 살기를 뿌렸으나 망령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일이었다. 저게 정말 엘리제의 망령이 맞나? 그런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비명만 지르던 괴물이 소리를 뚝 멈추더니 내 이름을 불렀다.
-샬, 리.
세 갈래로 갈라진 것 같은 이상한 소리로 나를 부르며 머리 위에 떠 있던 그것이 내 몸을 향해 들러붙기 시작했다.
-샬리…. 같… 이….
달라붙는 것과 동시에 몸에 힘이 쭉 빨리며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을 카샤가 붙들었다.
“내게 기대.”
그가 나를 붙잡으며 괴물이 내 등 뒤로 이동하는 모습을 유심히 살폈다.
“속이 메스꺼워요.”
등 뒤로 건너간 유령이 대체 무얼 하는지 모르겠으나, 전신의 기운이 뒤흔들리는 것처럼 어지럽고 정신이 없었다. 카샤가 아니었으면 서 있지도 못할 만큼 힘이 달렸는데 마치 저 괴물에게 내 기력을 다 빼앗긴 기분이 들었다.
“보니, 할 수 있나, 없나. 지금 신력으로 저 괴물만 자극한 것 같은데. 오히려 평소보다 급속도로 샬리의 상태가 안 좋아지고 있지 않나.”
그가 한없이 낮은 목소리로 보니를 추궁했다. 그 모습을 흐릿한 눈으로 보았다. 기력이 다하며 점점 정신이 가물가물해지고 있었다.
“없앨 수 있어요. 없앨 거예요. 저거.”
지금까지 들었던 보니의 말 중에서 가장 단호한 음성이었다. 아이 주위로 신력이 몽글몽글한 형태로 응축된 것이 보였다. 공만큼 커진 응축된 신력이 아이 주위로 하나둘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주변에 퍼져있던 신력이 아이 쪽으로 당겨가자 나는 더욱 숨쉬기가 곤란해졌다. 등 뒤에 붙어있는 괴물은 살맛이 나는지 이리저리 날뛰며 계속 나를 불렀다.
-샬리…. 나한테… 줘…. 나한테….
뭘 달라는 건지 몰라도 내 기운을 쏙쏙 빼먹고 있다는 것은 알겠다. 가만히 서 있기만 했는데도 내가 할딱이는 모습을 본 카샤가 초조한 얼굴로 보니를 채근했다.
“아직인가?”
보니가 이를 악물고 계속 원형의 신력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아이의 얼굴에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이제 5개에 달하고 있었는데 마지막 원의 크기가 점점 커지며 다른 네 개의 원과 같은 크기가 되자 보니가 심호흡을 하며 내 등 뒤의 망령을 노려보았다.
보니가 망령을 없애려고 준비하는 것을 눈치챘는지 괴물이 내 속으로 파고들려고 하는 것이 느껴졌다. 절로 토악질이 나왔다.
흡- 아, 싫어. 그만….
“샬리 언니, 의식을 잃으면 안 돼요!”
내 몸에 무언가가 퉁-하고 부딪혔다. 보니가 쏘아 보낸 응축된 신력 덩어리였다. 부딪힘과 동시에 정신이 한순간 맑아졌으나 몸에 커다란 충격이 왔다. 시원하고 청량한 기운 맴돌았으나 몸이 덜덜 떨리는 것이, 거대한 신력 덩어리가 한 번에 부딪히는 것이 결코 몸에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응축된 신력 덩어리는 장난이 아니구나. 한 번만 맞았는데도 거대한 신력에 속이 몹시 울려서 뒤흔들리는 기분이었다. 기력을 다 빼앗긴 허약한 상태라서 그런지 몰라도 괴물을 없애기 전에 내가 먼저 골로 갈 것 같았다. 다만 내 등 뒤의 괴물이 엄청난 괴로움에 몸을 떠는 것이 유일한 위안이라고 해야 할지….
“보니, 일반적인 신력으로도 양이 많은데 지금 그걸 다시 응축했으니 샬리 공주님이 굉장히 힘들어 보이지? 최대한 공주님 몸에 닿지 않게 해야 해.”
에이솔이 보니 곁으로 빠르게 붙으며 조언하기 시작했다.
“빗맞히더라도 망령의 몸체 쪽으로만 쏴. 빠른 속도로, 그리고 연속으로 쏘아봐. 공주님에게 달라붙지 않고 망령 몸체가 다 나와 있을 때.”
괴물이 내 등을 쿵쿵 치는 것인지 둔통이 느껴졌다. 마치 어깨로 문을 크게 두드리며 들어오려는 것처럼 충격이 가해져 왔다. 물리적인 충격이 아니었으나 고통스러웠다.
흐으-
반복되는 충격에 울컥하며 내 입에서 무언가가 왈칵 쏟아졌다. 메스꺼움을 참지 못하고 토사물을 쏟은 것인가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새빨간 피가 카샤의 정복 가슴 언저리를 흥건하게 적시고 있었다.
“샬리, 이게 대체….”
그가 아연실색하더니 목소리가 떨리며 눈동자에 노기가 서리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가 맹렬한 기세로 괴물을 쏘아보더니 입술을 짓씹었다. 망령은 신력으로밖에 없앨 수 없었다. 그가 느끼는 절망감과 상실감이 내게 전해졌다. 카샤의 얼굴이 괴롭게 일그러지는 것이 보이자 맥없는 정신으로 그의 손을 더듬어 잡았다.
“하아….”
괴물이 등 뒤를 쳐대는 간격이 느려지는 반면 그 힘은 더욱 거세지고 있을 때였다.
“보니! 지금!”
에이솔의 말에 보니의 신력 덩어리가 연속으로 날아오는 것이 보여 눈을 질끈 감았다. 다가올 충격에 대비하는데 주변의 공기가 크게 흔들리는 느낌 외에는 내게 충돌하는 것이 없었다.
-키에에에엑
날카로운 비명이 울리자 카샤가 내 머리를 한쪽 팔로 감싸 안으며 귀를 막았다. 괴물과 연결된 것이 확실한지 망령이 괴로워하는 것이 내게도 여실히 느껴졌다.
“한 번 더!”
에이솔이 말함과 동시에 등 뒤로 다시 공기가 크게 흔들렸다. 그리고 무언가가 뚝- 끊겨나갔다. 앞으로 크게 쏠리며 그 충격에 머리가 다시 찡하니 울렸으나 동시에 나는 큰 해방감을 느꼈다.
괴물의 비명은 멈추지 않았으나 아무래도 좋았다. 드디어 망령과 내가 완전히 분리된 것 같아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뒤를 돌아보자 괴물이 괴로운 듯 몸부림치면서도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것이 꼭 나를 찾는 것 같았다.
아니, 찾고 있었다. 내 이름을 부르면서.
“샬리…. 어디…. 샬리…. 필요해…. 샬리….”
“샬리, 내 목을 안아라.”
다급한 그의 말에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목에 팔을 둘렀다. 그가 나를 훌쩍 들어 올려 빠르게 몇 걸음 뒤로 물러나자 에이솔이 다시 아이에게 조언했다.
“저 망령을 이제 완전히 끝장내자꾸나.”
보니의 몸 주변에는 단 두 개의 응축된 신력의 구체가 남아있었고 그중 하나가 다시 괴물을 향해 돌진했다. 구체와 괴물이 충돌하자 엄청나게 눈 부신 빛이 팍하고 터져 잠시 눈을 멀게 했다. 아주 긴 시간처럼 느껴지는 몇 초가 지나고 서서히 빛이 사그라들며 시야가 트이기 시작했다.
빛이 걷히고 사물이 뚜렷해지자 보이는 그것은 더 이상 괴물이 아니었다. 회색으로 옅어진 그것은 이제야 유령이라고 불릴 만했다. 시시각각 연기처럼 흩어지며 눈에 띄게 크기가 줄어들고 있던 망령이 곧 나를 발견했다. 순간 멈칫했으나 그것은 이제 확연히 크기가 줄어 커다란 손바닥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향해 느릿느릿 다가왔으나 내 코앞까지 왔을 땐 한 줌의 먼지처럼 화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마지막까지 긴장으로 숨을 참고 있던 내가 안심하며 숨을 토해냈다.
카샤가 나를 강하게 끌어안더니 얼굴 여기저기에 연신 키스를 퍼부었다. 퍼붓는 키스마다 안도감이, 기쁨이, 그리고 애절함이 넘쳐흘렀다. 마지막으로 이마에 입을 맞춘 그가 입술을 떼어내지 않고 한참을 그렇게 나를 안고 있었다.
그가 이러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등 뒤에 있어 나조차 제대로 보지 못한 괴물을 그가 가장 가까이서 보고 있었다. 그런데 나를 붙드는 것 외에 아무것도 못 했으니 만약 나였다면 누가 속을 긁어내리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카샤가 감정을 추스를 수 있도록 가만히 기다렸다. 그의 품에 완전히 파묻혀서 시야가 막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폐하, 아직 하나 더 남았잖아요.”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이는 그를 조심스레 불렀다. 카샤가 고개를 들자 그제야 주변을 확인할 수 있었다.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보니였다.
마지막 남은 구체 하나가 그 주위를 맴돌았다. 아이는 매우 힘겨워 보였고, 에이솔이 옆에서 부축하고 있었다. 옆머리가 땀에 젖어 얼굴에 달라붙어 있는 것이 여간 안쓰러운 것이 아니었다. 내려달라는 뜻으로 카샤의 팔을 약하게 두드렸다.
“그대는 괜찮나? 피를 토했어.”
그가 나를 천천히 바닥으로 내리더니 초조한 모습으로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괜찮아요. 이제 망령도 사라지고 없잖아요.”
사실 아직도 놀란 몸이 그 여파로 잘게 떨리고 있었으니 내 말은 설득력이 없었다.
“아, 지금 구속구를 푼 상태니 신력으로 샬리를 치료할 수 있겠군.”
보니가 성녀라는 것을 상기한 카샤가 크게 안도했다.
“보니, 고마워. 네가 저 끔찍한 망령을 해치운 거야. 얼마나 대단한지 알겠니? 언니를 살린 게 너야.”
끙끙거리며 힘들어하던 아이가 내 말을 듣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옆에서 에이솔이 도와주었다고 해도 아직 어린아이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다가가 천천히 품에 안자 보니가 울음을 왈칵 터뜨렸다. 아이에게서 흘러나오는 신력이 내 몸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도 나를 치료하는 모양이었다. 안으로 부드럽게 흘러들어온 신력이 진탕된 속을 천천히 어루만지며 빠른 속도로 내상을 치료했다. 숨쉬기가 훨씬 편해지고 몸의 떨림도 잦아들었다. 울음을 그친 보니가 내 옷자락을 그러쥐었다.
“고생했어. 하지만 한 가지 할 일이 더 있어. 이번에는 쉬울 거야. 그 언니는 얌전히 있을 거니까. 만나봤지?”
아이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번에는 빨리 끝내고 언니랑 쉬러 가자.”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이를 진정시키고 나도 마음의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