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에게 하트를 심어주세요 80
* * *
“공주님, 폐하께서 답장을 보내셨어요.”
선물과 편지를 보낸 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그에게서 답장이 왔다. 보자마자 답장을 썼나 보다.
「내 사랑스러운 피앙세에게. 오늘 오전에 보좌관이 실수하는 바람에 머리가 아팠는데…. 그대의 편지를 받고 금세 다 나았어.
그런데 선물까지 받으니 지금 기분은 이루 말할 수가 없군. 티나가 말하기를 그대가 처음으로 완성한 손수건이라고 하던데. 검과 쿠키가 있는 모습을 보니 처음엔 깨닫지 못했는데, 계속 보니 알 것 같더군. 검은 나를 뜻하고 쿠키는 디저트를 만드는 그대를 뜻하는 건가? 어쨌든 손수건에도 우리 둘이 같이 있는 것을 보니 그대의 사랑스러움이 여기까지 묻어나서 오늘은 온종일 기분이 좋을 것 같아.」
편지를 보니 얼굴이 홧홧했다. 차라리 티나처럼 전부 쿠키 부스러기라고 하는 게 낫지. 검과 쿠키는 뭐란 말인가. 하나도 어울리지 않는 조합인데, 어떻게 저렇게 좋게 포장해줄 수가 있지. 손수건을 한참 들여다봤을 그를 생각하자 부끄러움에 몸 둘 바를 몰랐다. 역시 손수건은 보내지 않았어야 했는데.
“폐하께서 좋아하시죠? 제가 전해드리니까 굉장히 기분 좋아 보이셨어요. 안색이 활짝 피셨다니까요.”
“그래…. 다행이야.”
좋은 게 좋은 거지. 그럼.
“실은 나오다가 보좌관 중 한 분이 고맙다며 연신 감사 인사를 하더라구요. 오늘 폐하 분위기가 영 안 좋았나 봐요.”
아마 요즘 나 때문에 예민하긴 했을 거다. 보좌관들한테 너무 미안해지네. 왠지 실수도 큰 실수도 아니었을 것 같은데 말이다.
“오늘 오후에 폐하 집무실에 간식 좀 알차게 넣어줘야겠어. 티나.”
* * *
오후에 황제 집무실에 간식을 넣고 온 티나가 호들갑을 떨었다.
“공주님, 지금 루스타인 백작가 앞이 난리가 났대요. 제국민들이 앞에서 농성하면서 시위하나 봐요.”
루스타인은 엘리제 가문이 아닌가.
“…왜?”
“왜긴요. 폐하께서 공개한 엘리제 죄목이 낱낱이 드러나서 그렇죠. 보좌관이 얘기해 준 건데, 제국민들이 화를 못 참고 수위가 높아지면 엘리제를 부관참시할 건가 봐요.”
“이미 죽은 사람한테 화풀이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니.”
“저는…. 솔직히 그랬으면 좋겠어요. 엘리제 같은 사람은 그런 취급당해도 싸죠. 지금 공주님한테 망령이 붙어있다는 것만 봐도….”
여태 엘리제에 대한 속을 잘 드러내지 않던 티나가 눈을 내리깔더니 울분에 젖은 목소리로 말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티나도 마음고생 많았지? 엘리제 때문에 여러 번 조사까지 받았고….”
“제가 조사받은 게 뭐라구요. 공주님이 당한 걸 생각하면 몇백 번은 더 갚아줘야 된다구요.”
아직도 주변 사람들은 엘리제에 대한 분을 풀지 못한 모양이었다. 당사자인 나보고 어떠냐고 묻는다면, 악몽에서만 해방된다면 이제 아무래도 좋았다. 엘리제는 그냥, 이제 지긋지긋해서 꿈속에서 더 이상 안 보였으면 했다.
* * *
사방이 어둡고 축축한 곳에 내가 있다.
‘왜, 나. 만…? 같. 이. 가. 샬. 리.’
그녀의 얼굴은 죽은 이의 그것처럼 새하얗고 핏기없이 창백하다. 어두운 가운데 그녀만은 또렷이 내 눈에 들어온다. 손톱 밑에는 고인 핏물이 썩어 시커멓게 변질되었다.
그 소름 끼치는 손을 뻗어 내 발목을 덥석-
어김없이 오늘도 꽉 붙잡힌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그 앙상한 나뭇가지 같은 차갑고 메마른 손가락을 뿌리치지 못한다. 그녀는 점차 새카맣고 깊이를 알 수 없는 구덩이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 알 수 없던 구덩이는 점차 크기가 커지며 지옥 불처럼 시뻘겋게 변해버렸다.
아래는 뜨거운 용암이 흐르고 빨간 눈이 번들거리는 악마 같은 이들이 손을 뻗어 엘리제를 무자비하게 끌어내린다. 엘리제가 끌려갈수록 발목을 잡힌 나 또한 속절없이 주르륵 당겨간다.
싫어. 제발. 엘리제, 나 좀 놔 줘. 나는 울음을 삼키며 연신 제발 만 외쳤다.
샬리, 같이 가. 네가 있을 곳도 여기야- 엘리제가 히죽 웃자 그녀의 입가가 귀까지 걸리며 괴악망측하게 변했다. 마침내 그녀의 얼굴이 구덩이 속으로 잠기고 내 발목을 잡은 손만이 남았을 때였다.
닿기 싫어. 저기 닿기 싫어!
헉…. 헉….
나는 오늘도 반사적으로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꿈은 갈수록 괴이쩍었다. 일어나니 온몸이 땀에 절어 있었다. 식어서 차갑게 젖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대가 준 손수건을 이렇게 쓰게 될 줄은 몰랐군. 아까워서 한 번도 쓰지 않았는데.”
카샤는 이미 일어나 있었다. 그가 희미하게 웃으며 손수건에 물을 적셔 내 얼굴의 식은땀을 닦아냈다. 그가 나를 안아 들고 침실과 연결된 욕실로 데려갔다. 나는 기진맥진하여 말할 기운조차 없었다. 마석으로 알맞게 따뜻한 온도를 유지 중인 탕 안에 그가 나를 조심스레 내려놓으려 할 때였다.
흐읍-
발끝에 닿는 따뜻한 물에 화들짝 놀라 그에게 떨어지지 않으려 바동거렸다. 물인데, 탕 안인데. 아직 꿈의 끔찍한 여운이 가시질 않았는지 구덩이로 착각하고 말았다. 그런 나를 카샤가 쉬이 달래며 다시 끌어안았다. 그가 나를 다시 안아 들고 침대로 가서 타월에 물을 적셔 전신을 닦아 내렸다.
“카샤….”
품으로 파고들자 그가 나를 끌어안았다. 그의 체향과 따뜻한 온도가 서늘해진 마음과 몸을 데웠다.
“…이게 정말 망령 때문일까요?”
“원혼은 끈질기니까, 그럴 가능성이 크지.”
지금 내 정신상태가 불안정했다. 꿈에서 평생 엘리제가 나올 거라고 생각하자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스트레스를 받자 크게 울컥했지만, 눈앞에 카샤가 있어 끝까지 참았다.
고작 두 주일 동안 이 정도의 악몽. 샬리오니가 겪었던 몇 달간의 생생한 꿈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계속 참는다 쳐도 그 옆에서 같이 괴로울 카샤를 생각하니…. 그는 내가 쓰러지고 나타날 샬리오니가 두려운 것이다.
아마, 지금도. 내가 악몽을 꾼 첫날 이후로 그는 내가 자기 전에 항상 찾아왔다. 일이 많아 늦어져도 어떻게든 일찍 오려고 했다. 그러니 이제 와서 따로 잠을 자자고 청해도 그가 내 말을 들을 리가 만무했다. 지금 이런 상태를 보였으니 더더욱.
“…애요. 없애버려요.”
“무엇을….”
그가 내게 물었다.
“망령하고 샬리오니, 둘 다요.”
* * *
“보니!”
밖에서 달려오는 보니를 힘껏 끌어안았다. 대체 얼마 만에 보는지 몰랐다. 아마 보름도 넘었던 것 같은데. 카샤가 옆에서 크게 헛기침을 했다.
“샬리 언니, 보고 싶었어요. 너무너무.”
보니가 내게 안겨 대꾸하면서 자꾸 내 머리 위를 손바닥으로 꽉 쥐었다 폈다 했다.
“보니, 뭐 하면서 지냈어? 그런데 언니 머리에 뭐가 있어?”
보니가 미간에 힘을 주며 내 머리 위를 노려보았다.
“새카만 거 들러붙어 있어요. 안 떼어져.”
그 말에 등에 소름이 쭈뼛했다. 정말로 망령이 달라붙었나. 보니가 여전히 용을 쓰며 이제 양손을 내 머리 위로 올려 휘휘 저었다. 카샤가 옆에서 그런 보니를 보더니 아레인에게 턱짓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아레인이 보니를 훌쩍 들어 내게서 떼어냈다.
“네 말대로 샬리에게 망령이 붙었다. 없앨 수 있나?”
카샤가 보니에게 물었다. 보니는 그의 눈치를 보듯 눈을 데구르 굴리더니 내게 고정했다. 정확히는 내 머리 위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이의 작달막한 손가락이 움찔거렸다.
“…지금은 못 해요.”
아이가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하며 제 발목을 내려다보았다. 미스릴 발찌가 차 있는 구속구를.
“네가 할 일은 두 가지다. 하나는 샬리에게 붙은 망령을 없애는 것. 또 하나는 그녀의 몸 안에 있는 이도 같이 성불시키는 것.”
아마 알아들었을 것이다. 나를 깨운 사람이 보니라고 했으니까. 그의 말에 아레인과 티나의 눈동자가 커지며 의아해했다. 망령은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으나 내 몸 안에 뭐가 하나 더 있다고 하니 놀라는 것이다.
“폐하께서 하시는 말씀 무슨 말인지 알겠어? 못하겠으면 언제든지 말해. 보니가 위험해질 수도 있으니까 신중하게 생각하고 말해줘.”
카샤에게 압박감을 느낀 나머지 무턱대고 알겠다고 할까 봐서, 나는 보니에게 이 상황에 대한 위험성을 여러 번 설명했다.
“이거…. 풀면 할 수 있어요. 샬리 언니. 그 다른 사람도 찾을 수 있어요.”
보니는 계속 내 머리 위를 힐끗거리며 발을 동동 굴렀다.
“보니가 보기에 정말로 망령 같아?”
“모르겠어요. 처음 보는 거예요. 그런데 나쁜 거라는 건 알겠어요. 계속 샬리 언니 기운을 먹고 있어요.”
보니가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울상이 되었다.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정말 내 기운을 먹어서 안색이 안 좋아지고 있는 걸까.
“흐음….”
카샤가 입꼬리 한쪽을 비죽 올렸다.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은 채 차갑다 못해 시린 표정으로. 그가 손가락을 몇 번 까닥거리자 어김없이 근처에서 루이가 나타났다.
“엘리제를 부관참시해야겠다. 제도 거리의 공개 처형대에서 할 거니까 친위대장에게 말해놔.”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의 말에 루이가 존명의 자세를 취한 뒤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미 죽은 이를 그래 보았자 무얼 하나 싶었으나 그의 기세가 흉흉하니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해서 그의 분이 풀린다면 할 말이 없었다. 지금 제도 내에서 엘리제의 평판은 매우 나빴다. 카샤가 공개한 죄목이 너무 많아 손가락으로 셀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분노한 제국민들이 부관참시한 엘리제의 시신을 어찌할지는 불 보듯 뻔했다. 루스타인가는 아마 정신적으로 멸문을 당할지도 모른다.
“카샤, 마지막은 불태우는 게 좋겠어요. 그렇게 해주세요.”
분노하고 흥분한 관중들에게 시신을 쥐여주는 것보다 화형이 나았다. 그는 내키지 않는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다시 보니에게 당부했다.
“절대로 무리하지 마. 알겠지? 못하겠으면 말하고 바로 구속구 차야 해.”
주변에는 친위대 절반과 마법 부서 사람들도 절반이 와 있었다.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보니가 혹시라도 실수한다면 아이가 어찌 될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들은 황족이 최우선이니 말이다. 보니가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하녀에게 미스릴 발찌를 풀 수 있는 열쇠를 하녀에게 건네었다. 하녀는 곧장 열쇠를 들고 보니의 발목에 묶인 발찌를 풀기 시작했다.
딸깍-
발찌가 풀리는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지자 보니의 주변으로 웅웅대는 소리가 나더니 주변으로 흰빛이 부드럽게 터지며 주변을 향해 퍼져나갔다. 내 안에 있는 샬리오니의 신력이 반응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가 기쁨에 떠는 것이 몸 안에서 느껴졌다. 본인이 곧 성불할 것이라는 걸 알아차린 듯했다. 나 또한 몹시 편안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악몽을 꾸고 난 뒤로 곤두세워져 있던 신경이 느슨해지며 편안한 감각이 몸을 휘감았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닌 듯했다. 주변 모두가 그렇게 편안한 기분을 느끼는 와중에 다시 여기저기서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샬리….”
“공, 공주님….”
카샤가 나를 보며 탄식하고 티나가 나를 가리키다가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만이 아니라 그들 대부분이 어느새 편안함을 내버리고 내 머리 위를 바라보며 한껏 경계하고 있었다. 어쩐지 내 머리 위를 올려다보기가 무서워졌다. 무언가가 머리 위로 꾸물거리는 것이 나 또한 확연히 느껴졌기 때문이다.